단짝 친구들의 주먹다짐, 어른들이 원망스러워요
[서평] <우리마을 이야기>(1~3권)
4월 6일, 제주도 강정마을에서 들려온 소식에 잠시 머릿속이 멍해졌다. 해군기지 공사를 온몸으로 막아온 문정현 신부님이 허리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는 소식. 일흔이 넘은 나이에 ‘평화유배자’를 자처하며 그 험한 싸움을 하고 계신 것만으로도 안타까운데……. 참담하고 죄송한 마음이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그 슬픈 소식은 이 책을 다시 펼쳐보게 했다. 오제 아키라의 <우리마을 이야기>. 일본 정부의 나리타공항 건설에 맞서 싸운 산리즈카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만화다. 황무지를 맨손으로 개척해 마을을 이루고 살아온 산리즈카 사람들. 하지만 1966년 7월 14일, 일본 정부는 산리즈카 마을에 공항을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미군 전투기의 이착륙을 위해 공항 건설을 시급히 밀어붙이는 일본 정부. 그렇게 시작된 ‘산리즈카투쟁’은 일본 현대사에서 가장 격렬했던 민중운동으로 기록됐다.
<우리마을 이야기>는 국가의 개발정책에 반대하는 민중투쟁의 ‘모든 면’을 보여준다. 국가의 일방적 결정, 형식적인 공청회, 돈을 앞세운 회유, 마을 사람들의 분열과 갈등, 학생과 다른 지역 농민들의 연대, 유언비어와 언론의 거짓 선전, 그리고 무자비한 경찰력을 통한 강제수용까지. 그 속에서 땅을 지키며 싸우는 사람들의 얼굴과 마음이 생생하게 살아 있어 딱딱한 기록물이 아니라 한 편의 흥미로운 드라마로 읽힌다.
작가는 소학교 5학년생 뎃페이의 눈으로 당시를 기록한다. ‘농지 사수’를 외치는 반대파와 ‘조건부 매각’을 내건 조건파로 나뉘어버린 어른들을 따라 아이들도 편을 갈라 싸운다. 단짝인 겐지네가 조건파로 돌아서자 반대파인 뎃페이는 겐지와 주먹다짐까지 벌인다. “너희들은 같은 편도 적도 아니”라고 말리는 선생님에게 겐지는 “태평스럽게 그런 말 하고 있을 때 불도저가 와서 학교를 싹 쓸어버릴” 거라고 소리친다.
안타까움 이상의 무엇이 느껴졌다. 불안에 떠는 아이들에게 누구도 이 싸움의 진실을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 때문이었다. 마을을 왜 없애야 하는지 알지도 못한 채 서로를 미워해야 했던 아이들. 지금의 현실에서도 ‘어른들 일에 신경 쓰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는 말 말고, “옳다고 믿는 일을 위해 행동을 일으키는 것. 그 행동 속에서 배우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공부”라는 말을 해주지 못하는 우리를 반성하게 됐다.
이 만화가 나온 것은 산리즈카투쟁이 시작된 지 20년도 더 지난 1990년대 초다. 강정마을의 현실을 기록한 만화는 그보다는 빨리 세상에 나왔으면 좋겠다. 만화라는 형식이 갖는 친근함을 통해 우리 아이들에게 오늘의 진실을 더 잘 말해줄 수 있을 테니까. 그 책의 출판기념회를 구럼비 바위 위에서 열고 그 자리에서 문정현 신부님이 축하의 노래를 멋들어지게 한 곡 뽑아주시는 상상. 우리 아이들과 함께 꾸고 싶은 꿈이다.
* <우리마을 이야기> 오제 아키라 쓰고 그림, 이기진 옮김, 길찾기 펴냄, 2012년 3월, 각 권 8800원(전 7권 중 3권 발간)
우리마을 이야기. 1
'용역놀이' 하는 아이들에게 '현실적 판타지'를 (0) | 2012.09.20 |
---|---|
한 글자 한 글자 온몸으로 밀어낸, '엄마의 역사' (0) | 2012.07.15 |
'우연'이 선물해준 새해 목표, "불편하게 살기" (0) | 2012.03.11 |
'찌질'한 청춘들을 위한 뜨거운 포옹 (0) | 2012.02.07 |
열두 시의 하늘 위를 나는, 시인의 시간 (0) | 2011.09.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