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역놀이’ 하는 아이들에게 ‘현실적 판타지’를
[서평] 이병승이 쓴 ‘가치동화’ <여우의 화원>
7월 27일, 눈을 의심케 하는 사진들이 인터넷 속보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머리가 터진 사람, 인중이 찢어진 사람, 흘러내린 피로 윗옷이 완전히 젖은 사람……. 경기도 안산에 있는 SJM이라는 공장에서, 용역 200여 명이 노동자들을 폭행해 30여 명이 크게 다쳤다.
노동자들의 투쟁 현장에 용역들이 등장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지난해 부산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이 정리해고 철회 싸움을 할 때도 그랬다. 심지어 그 동네 아이들이 노조 편과 용역 편으로 나뉘어 쫓기고 쫓는 ‘용역놀이’를 한다는 기사가 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안타까운 이야기는 한 편의 동화로 만들어졌다.
올해 3월에 나온 <여우의 화원>을 다시 꺼내 읽은 것은 그 때문이다. 이병승이 쓰고 원유미가 그린 이 책은 민수와 억삼이의 이야기를 통해 더불어 사는 삶과 약속의 중요함을 생각하게 해주는 동화다.
미국 유학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벽암시로 돌아온 초등학교 5학년 민수는 ‘벽암시 절반을 먹여살린다’는 미래자동차 사장의 아들이다. 억삼이를 비롯한 같은 반 친구들은 대개 미래자동차에서 일하다 해고된 노동자들의 자식들. 아무것도 모르는 민수는 친구들이 하는 ‘용역놀이’에 함께했다가 흠씬 두들겨 맞는다.
‘용역이 깡패냐’고 묻는 민수에게 아버지는 ‘공장이라는 잔디밭을 망치는 잡초들을 뽑아주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해고된 아버지가 월급을 받지 못해서 학교를 빠지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억삼이를 보며 민수는 혼란스러워 한다. 그런 혼란 속에서 서로의 마음을 바라보기 시작한 두 사람. 민수는 억삼이가 선물한 ‘잡동사니’의 의미를 깨달아가며, 연극을 통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아버지들에게 전하려 한다.
민수든 억삼이든, 한쪽에 완전히 감정을 이입하기는 쉽지 않다. 초등학생에게 신용카드를 주며 ‘돈의 힘’을 배우라는 아버지가 얼마나 될까. 용역들과 몸싸움을 하며 농성하는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어느 한쪽에 동화되는 것보다 두 아이가 ‘잊어버린 약속’을 기억해가는 과정 자체를 쫓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한쪽의 승리로 끝나지 않는 결말은 그래서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솔직히 나도 억삼이 아버지가 복직했다는 이야기로 마무리되기를 바랐지만, 정말 그렇게 끝났다면 이 책은 1차원적인 ‘선전선동’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착한 편이 나쁜 편을 이긴다는 결론은 통쾌하기만 할 뿐 ‘생각’을 남겨주지는 못한다.
동화에서 잘 다룬 바 없는 상당히 현실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따지고 들자면 현실적이지 못한 부분도 많다. 한마디로 ‘현실적 판타지’라고나 할까? 쌍용자동차에서, 한진중공업에서, 또 SJM과 더 많은 어느 곳에서 아버지들의 비극을 목격하고 있는 아이들. 그 비극의 양쪽에서 서로에 대한 ‘현실적 증오’만 배우기 전에, 이런 ‘판타지적 공존’의 이야기를 통해 서로의 눈을 마주 보게 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 덧붙이는 말 : <여우의 화원> 판매 수익금의 일부는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와 가족들을 위한 심리치유센터 ‘와락’에 기부된다.
* <여우의 화원> 이병승 씀, 원유미 그림, 북멘토 펴냄, 2012년 3월, 175쪽, 1만1000원
여우의 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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