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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위한 전쟁은 없는가(2/2)

긴 글/리뷰

by 최규화21 2009. 3. 16.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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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를 위한 전쟁은 없는가(2/2)

   ―《총칼을 거두고 평화를 그려라》(박홍규, 아트북스, 2003)를 읽고 ―

 

 

  애국주의와 이분법

 

  저자는 이 책의 ‘여는 글’에서 제국주의 침략전쟁의 사상적 바탕이 되었던 애국주의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다. “애국의 진정한 의미는 조국의 어떤 점을, 왜 사랑해야 하는가, 또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가를 따져 물은 다음에 비로소 구할 수 있다. 즉 ‘애국주의’를 옹호하는 것이 정당하려면 민주주의, 자유, 인권과 같은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가 그 안에 담겨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파시스트 국가와 같이 인간성을 오히려 파괴하는 집단을 비판하고 저항하는 것은 외려 조국을 사랑하는 자의 의무라 할 것이다.(p24~25)”

  저자가 애국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렸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저자가 ‘애국’이라는 가치보다는 ‘민주주의’, ‘자유’, ‘인권’과 같은 가치를 먼저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당히 의미 있는 말이다. 멀리서 찾을 것도 없이 우리의 근현대사만 놓고 보더라도, 애국이라는 말을 정권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으로만 생각했던―생각하도록 강요받았던― 때가 있지 않았던가. 당시 우리의 순진한 애국주의는 군사독재정권을 지탱해 주는 힘이 되었고, 민주적 권리의 실종과 노동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착취, 그리고 베트남 민중들에 대한 학살이라는 결과로 돌아왔다.

  저자는 이어서 “국가의 부도덕에 눈감지 않고 양심의 호소에 귀기울였던 사람들이 감내했던 고난을 생각해보라. 맹목적인 애국주의는 책임 있는 자율적 판단을 결여했다는 점에서 미성숙이고, 사고하지 않는 이분법에 기초하므로 독선적이며 당연히 비이성적이다. 우선 그런 비이성에서 해방되어야 반전과 평화를 말할 수 있다.(p25)”라는 말로 자율적 판단과 비이성으로부터의 해방을 촉구하고 있다. 애국이라는 것은 대개 우리에게 긍정적인 가치로 인식되지만, 애국은 그 말 자체로 긍정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애국의 대상인 현재의 국가 권력이 어떠한 모습인가에 따라서 긍정성을 띌 수도, 부정성을 띌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사이에서 민주, 자유, 인권, 평등과 같은 보편적 가치들을 놓고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애국주의에 대한 저자의 비판은 아주 적절하다. 그런데 한 가지 딴죽을 걸자면, 애국주의에 대해서는 ‘사고하지 않는 이분법’을 적용하는 것을 비판한 저자가 왜 전쟁이라는 대상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못하였는지 의문이다. 애국이라는 가치에 대해서도 이분법적 접근을 넘어서 그 긍정성을 궁리해 보아야 하듯이, 반전이라는 가치에 대해서도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말이다.

 

  평화의 미술을 기다리며

 

  어느 시대에나 예술가들은 대개 어떤 정치적 현실에 깊이 소속되기보다는 그것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부유(浮游)하기를 원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을 어떤 사람들은 순수성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순수성이 아니라 탈정치성일 뿐이다. 정치적 현실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순수라고 부른다면, 한 집단의 구성원들의 삶의 문제를 결정하는 정치라는 영역은 자연스럽게 순수하지 못한 더럽고 불순한 것으로 왜곡되고 만다. 그렇게 왜곡된 정치는 민중들의 외면을 받게 되고 결국 탈정치의 이데올로기를 순수라는 말로 포장하는 것은 정치적 상황의 변화에 무관하게 자신의 예술적 성과를 인정받고자 하는 예술가들의 변명이거나, 이미 정치적 패권을 장악한 자들이 정치에 대한 민중들의 관심을 무너뜨리기 위해 벌이는 속임수에 불과하다.

  불행하게도 우리 미술계에는 그러한 변명 혹은 속임수를 넘어서고자 하는 노력이 일천한 것이 사실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유럽이나 미국, 또는 남미의 다양한 작가와 작품을 소개하면서, 그 사이사이에 우리 미술계에 대한 아쉬움과 비판을 토로하고 있다. 우리 역사에도 수많은 전쟁이 등장하지만, 전쟁 속의 영웅들이 아니라 그 속에서 죽어가는 민중들을 인식하거나 전쟁의 야만성을 폭로한 작가와 작품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 언급은 책의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데, 저자는 우리 미술계 속의 반공주의를 우리 미술의 종속성과 문화적 편식증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우리 미술의 반공주의는 다른 어떤 예술 분야보다 강한 탓인가? 전시회는 레핀(Ilya Efimovich Repin, 1844~1930)을 제외하고는 더더욱 소개된 적이 없다. 여하튼 우리 문화의 편식증은 어떤 나라보다 극심하다.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세계문화의 보편적인 모습을 이해할 수 없다. 프랑스나 미국 문화만 보고 세계문화 운운하는 것은 그야말로 장님이 코끼리 다리 만지는 격이나, 한국 현대미술은 그 두 나라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p116)”

  저자는 이 책에 소개된 유럽 평화미술의 뿌리를 고야로 설정하여, 우리 미술계에도 고야의 정신으로부터 시작하는 평화미술의 전통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들라크루아나 마네뿐 아니라 민중의 봉기를 그리 도미에나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77)도 고야에서 출발했다. 사실 우리에게도 그것이 1919년 삼일운동의 유관순 이후 지금까지 수없이 이어지는 민중저항의 그림으로 남아야 했으나 우리에게는 그런 전통이 없다. 불행한 일이다. 바로 지금이야말로 우리는 고야에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p68~69)”

  저자는 우리에게는 저항의 그림, 평화미술의 전통이 없다고 하지만,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반전과 평화의 미술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물론 그 역사는 아주 짧지만 내 생각에는 80년대에 본격화되었던 민중미술운동에서 평화미술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본다. 물론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문제의식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비록 서양미술이 갖고 있는 것만큼의 전통이나 성과는 없다고 하더라도 분명히 민중미술운동과 같은 중요한 움직임들이 있었고, 극심한 문화적 편식증을 앓고 있는 우리 사회에 작지만 의미 있는 성과들을 남겨 왔다고 본다. 더욱이 오늘날의 반동적 정치상황을 생각한다면 민중미술의 성과와 지향은 더욱 계승되어야 할 것이 마땅하므로 우리 평화미술의 시작점 또한 그것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저자는 우리 예술가들에게 따끔한 충고를 계속했다. 특히 우리 예술인들과 국민들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피카소에 대한 이야기로 우리 예술인들을 비판하는 부분은 무릎을 칠 정도로 공감이 갔다. “<게르니카>는 스페인 군국주의 500년에 대한 도전이다. 이는 또한 고야의 <5월 3일>에서 이어져 내려온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예술가들에게 피카소 정신을, 피카소의 사랑과 기행만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예술정신을 따르도록 요청한다. 피카소의 예술정신을 한마디로 시대정신에 투철한 반항적 예술정신이다.(p221)” 피카소의 ‘시대정신에 투철한 반항적 예술정신’은 비단 예술가들뿐만 아니라 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누구나가 다 본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전쟁과 미술이라는 주제를 다룬 이 책을 읽으면서 특별히 어렵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미술에는 워낙에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미술사적인 내용이라든가 화법이나 풍조에 대한 내용은 굳이 끝까지 이해하려 하지 않고 과감히 그냥 훑어 읽고 넘어갔기 때문이다. 미술은 빼고 반전의 사상에만 초점을 두고 읽은 탓인지 뭔가 좀 아쉬운 느낌은 남는다. 저자가 전하고자 했던 이야기의 반밖에 전해 듣지 못한 느낌이라고 할까.

  그리고 앞서 가장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이야기한 저자의 전쟁에 대한 관점 문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저자도 다른 부분에서는 민중의 저항권에 대해 대단히 힘주어 긍정하고 있는데, 어째서 전쟁에 대한 무조건적 부정을 표방하면서 민중들의 저항의 전쟁은 한 번도 상정해 보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전쟁과 예술이라는 쉽지 않은 주제에 대해서 방대한 자료와 지식을 동원해 책을 써 낸 저자의 노력에는 큰 박수를 보낸다.

  역사 발전의 주체는 바로 인간이고,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인간의 정신과 마음이다. 지식은 그것만으로 실천으로 이어질 수는 없지만, 지식과 정서가 합치되면 인간은 역사를 이끌어 가는 주인공으로서 행동하게 된다. 인간의 해방과 역사의 진보를 추구함에 있어서 예술의 역할을 빼놓고 생각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것에 있다. 저자의 바람과 비슷하게, 앞으로 우리에게도 그러한 예술의 역할을 자각하고 실천하는 ‘반항적’ 예술가, ‘혁명적’ 예술가들이 넘쳐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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