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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유감

긴 글/칼럼

by 최규화21 2008. 4. 10.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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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선 유감(遺憾)



  18대 총선이 끝났습니다. 한나라당이 과반의석을 확보했고, 친여계열의 당선자 수를 모두 합하면 전체 299석 중에 200석 가까운 의석을 여권에서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노무현정부의 실정의 여파로 지난해 대선에 이어 올 총선에서도 한나라당이 압승할 것이라는 예측이야 여기저기서 나왔던 것이지만, 예상보다 큰 놀라움을 주었던 것은 바로 46.1%로 역대 전국단위선거 중 최저치를 기록한 투표율이었습니다. 20~30대의 투표율이 특히 더 낮았는데, 그것은 지난 5년간 이른바 민주개혁세력의 실패로 인한 허무와 상실감 때문에 젊은 유권자들이 이번 총선 투표에서 여당도 야당도 선택하지 못하고 기권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18대 총선의 투표일이었던 지난 4월 9일, 저는 서울 성북구에 있는 한 투표소의 참관인으로서 투표가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아침 6시 투표 시작 시각에 겨우 맞추어 투표소에 갔는데, 문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50~60대의 시민들을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루 종일 투표소를 찾은 시민들 속에서 지팡이를 짚거나 휠체어를 타고 와서 선거사무원의 도움을 받아 겨우 투표를 하는 고령의 어르신들도 여럿 볼 수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가만히 앉아서 투표를 지켜보는 일은 확실히 조금 지루한 일이기도 하고 육체적으로 힘든 일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저는 얼굴을 들지 못할 정도의 부끄러움 때문에 너무나도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60~70대 어르신들이 편치 않은 몸으로도 어떻게든 한 표의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투표소를 찾는 것에 반해, 제 또래의 20대 젊은이들은 하루 종일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 밖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번 총선이 시작되기 이전부터 투표를 하지 않겠다는 제 주위 친구들로부터 여러 가지 이유를 들었습니다. “누가 국회의원이 되든지 나와는 상관없다.”, “다 그 놈이 그 놈이라서 찍을 사람이 없다.”, “취업준비하기 바빠서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시간이 없다.” 등, 모두 비슷하게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회의를 강하게 드러내는 말들입니다. 물론 기권도 유권자가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는 하나의 의사표현방식이자 당연한 권리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 세대에 팽배한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회의, 허무감에 대한 원죄는 기성의 정치인들에게 있다는 사실 또한 절대 부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말들을 들으면서 자꾸 맹수에게 쫓기면 수풀 속에 머리를 처박고 숨는다는 꿩의 이야기가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꿩은 맹수에게 쫓기다가 더 달아날 곳이 없으면 수풀 속에 머리만 처박고 숨는다고 합니다. 머리를 수풀 속에 처박았으니 자신에게는 맹수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몸통은 그대로 수풀 밖에 드러나 있으니 그것은 사실 숨은 것이 아니지요. 결국 꿩은 그 모습을 보고 쫓아온 맹수에게 잡아먹힙니다. 제 눈에 맹수가 보이지 않으니 맹수도 자신을 못 볼 것이라 생각한 어리석은 착각 때문에 꿩은 목숨이라는 어마어마한 대가를 치르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치에 대한 관심을 버린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정치로부터 무관해지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우리가 정치로부터 등을 돌리고 눈을 가리고 정치를 쳐다보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현실정치의 영역에서 보이지 않게 되고 벗어나게 되는 일은 절대로 생기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어떠한 선거나 마찬가지로 누군가는 나의 의사와 무관하게, 그러면서도 절차적으로는 지극히 정당하게 우리의 대표자로서 선출되고, 그는 그의 사상과 의지에 따라 정치적 활동을 벌여나가게 됩니다.

  우리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국민으로서 적을 지니고 살아가는 한 대한민국의 법과 제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낸 세금이 그것을 유지하는 데에 쓰이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난 대선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가 이명박정부의 정책으로부터 무관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낸 세금이 이명박정부의 정책을 지원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는 데 아무런 영향도 준 바 없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침묵 덕분에 이명박은 대통령이 되었고 우리가 낸 세금은 이명박정부의 정책을 실현하는 데에 쓰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세금으로 지원하게 된 그 정책들은 변화된 제도로서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다시 우리에게로 돌아올 것입니다.

  20~30대 유권자들의 정치에 대한 실망과 회의 때문에 이번 총선은 역대 최저의 투표율로 치러졌습니다. 18대 국회는 여권의 압도적인 우세로 구성되었고, 그것에는 40~50대 이상 유권자들의 변함없는 투표율과 투표성향이 한 몫을 했다고들 합니다. 꿩은 자신의 눈을 가리고 맹수가 자신을 보지 못할 것이라 착각한 대가로 자신의 목숨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정치에 등을 돌리면 정치도 우리를 무관하게 여기리라 착각한 대가로 무엇을 빼앗기게 될까요?

  우리가 무엇을 보며 살아가는가 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는 곳에서 우리를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 역시 우리의 삶에 몹시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정치를 보고 있든 그렇지 않든, 중요하게 여기든 그렇지 않든, 정치는 그것과 무관하게 항상 우리를 보고 우리의 삶의 곳곳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여전히 등을 돌리고 눈을 가리고 우리는 정치로부터 무관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을 것인지, 내가 모르는 곳에서 나를 보고 있는 시선과 그것이 우리의 삶에 주는 영향을 바로 보고 개선해 나갈 것인지 진지한 성찰과 선택의 시간이 필요하리라 생각되는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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