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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상, 그리고 언어

긴 글/칼럼

by 최규화21 2008. 4. 4.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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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와 사상, 그리고 언어



  역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오랜 시간 우리들을 괴롭혀온 예민한 논쟁거리들 중의 하나입니다. 잊을 만하면 불거지는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나,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문제, 정치인의 친일행각 논란, 최근의 우파 국사교과서 발행 등 우리의 역사를 둘러싼 수많은 일련의 논쟁들은 단순히 그 사건 자체에 대한 진위나 긍부를 넘어 우리의 뿌리 깊은 역사의식으로부터 나오는 가치관들을 확인하게끔 해줍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자신과 자신의 동포들의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만큼, 역사에 대한 관점의 문제는 현재 우리들의 삶에 대한 중요한 인식의 기준을 좌우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현재를 인식하고 미래를 개척하는 가치관과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탈리아의 역사가인 B.크로체가 했던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라는 말도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정권을 장악한 등장한 사람들이 계속해서 권력의 중심부에서 군림했던 이후 약 30년 동안의 이 사건을 ‘5·16군사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역사는 이 사건을 ‘5·16군사쿠데타’라고 고쳐 기록하고 있습니다. 쿠데타는 ‘무력으로 정권을 빼앗는 일’을 말하는 것으로서 지배 계급 내부의 단순한 권력 이동으로 이루어지며, 체제 변혁을 목적으로 피지배 계급이 지배 계급에 대해 하는 혁명과는 구별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 ‘혁명’이라고 말하다가 ‘쿠데타’라고 고쳐 말하는 이유가 그 30년 사이에 1961년 그 날, 그 사건의 사실관계가 변화했기 때문은 물론 아닐 것입니다. 변화한 것은 바로 이 사회의 가치관입니다. 우리 사회의 보편적인 가치관이 총칼에 의해 강요된 침묵뿐인 현재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국민 모두가 정치의 주인으로 권리를 누리는 미래를 지향했기 때문에 ‘군사혁명’은 ‘군사쿠데타’로 이름을 고쳐달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5·16에 대한 역사의 평가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기억하면서 B.크로체의 말을 다시 읽어보면,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라는 말은 “과거를 해석하고 미래를 개척해나가는 것은 모두 현재를 살고 있는 인간의 가치관과 의지에 달려있다.”라고 조금 발전시켜 해석해도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의 역사는 원래부터 정해져있는, 인간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어떤 절대적인 ‘힘’에 의해 발전해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힘’의 존재에 대한 주장은 역사발전의 주체로서의 인간의 능력에 대한 자각을 가로막기 위해 꾸며낸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역사를 단순히 과거에 존재했던 사실들을 밝혀내고 기록하는 것으로 그 의미를 한정짓는 태도 역시 역사발전에 있어서 인간의 주체적인 의지의 역할에 대해 바로 보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역사는 언제나 그렇게 이끌어가고자 하는 인간 다수의 의지와 의도에 의해 진행되어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뿐인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가 언제나 인간의 가치관과 의지에 의해 움직여왔다는 사실 그 자체는 우리에게 긍정적인 사실도, 부정적인 사실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어떤 가치관을 지닌 인간들이 중심이 되어서, 어떤 지향과 의지를 가지고 역사를 이끄는가 하는 것이 진짜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거꾸로 말하자면, 역사 발전의 중심에 서있는 이 시대의 인간들이 어떠한 가치관과 사상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 역사의 향방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쯤에서 결론을 확인하자면 “인간의 사상과 언어가 역사를 개척한다.”는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입니다. 결론으로 삼은 이 문장 속에는 ‘사상’과 함께 ‘언어’라는 단어가 새로이 들어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사상은 바로 의식과 사고의 작용이고, 그 의식과 사고의 작용을 결정짓고 전달하는 핵심적인 요소가 바로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인간이 사회를 만들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고안된 수단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고 발전시켜나가기 위해 언어라는 수단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는 말입니다. 굳이 다른 예를 들지 않더라도 우리는 언어가 없는 의사소통, 일상적 사회생활, 나아가 정치 · 문화 · 사상활동 등을 쉽게 상상하지 못하는 것으로 그 중요성을 알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언어적 공동체는 민족적 · 종교적 · 문화적 공동체와 그 테두리를 거의 같이 합니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이 세계를 정의하고 인식하고 그 속에서 만들어지는 민족 · 종교 · 문화 · 사상 등의 추상적인 개념 또한 언어를 통해 구체화하고 공유하고 보존하는 것입니다.

  사상이 역사를 해석하고 현재를 인식하고 미래를 개척하는 데에 핵심적인 판단기준이라면, 그것을 만들고 공유하는 데에 절대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언어입니다. 그런 점에서 한 공동체 안에서 역사와 사상과 언어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한 덩어리로 중요하게 인식되고 교육됩니다. 우리가 중 ․ 고등학교 시절 배웠던 내용들만 보아도 그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영어나 수학처럼 성적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과목들은 오히려 민간의 교과서를 사용하면서도, 국어나 국사, 윤리와 같은 과목에는 꼭 국정교과서를 통해 전 국민들에게 같은 내용의 교육을 실시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 한 민족이나 국가가 그 정체성을 형성하고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역사와 언어와 사상체계를 공유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역사는 언제나 인간의 사상과 의지에 의해 움직입니다. 그리고 수천수만 년을 이어온 그 과정은 현재에도 부단히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역사가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중에서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다시 우리의 후손들에게 어떻게 전할 것이냐 하는 문제는 우리의 사상과 언어를 통해 결정해야 할 몫입니다. 우리의 지나온 역사를 새로이 바로 보고, 앞으로 인간을 위한 가치로 귀결되는 진정한 인간의 역사를 개척해가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사상과 언어라는 이 오래된 두 단어에 새삼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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