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쟁의 ‘실물’을 2026년의 현실에서 또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사랑과 전쟁’이나 ‘범죄와의 전쟁’처럼 비유 속에나 남은 단어인 줄 알았는데.
낯설다.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더 낯설다. 우리의 일상에서 ‘전쟁’이란 단어가 등장하는 맥락은 어떤가. 쓰레기봉투 구하기가 어렵다는 대화에서, 기름 값 싼 주유소마다 차들이 줄을 선다는 기사에서, 주식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논하는 뉴스에서 ‘전쟁’은 언급된다.
정말 ‘전쟁’이란 말은 이렇게만 등장해도 되는 단어일까.
그래서 이 사람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전쟁의 민낯을 확인하기 위해 20년 세월을 바친 사람. 2000개 마을을 돌며 6000명의 증인들을 만나 학살의 참상을 파헤친 사람. 이념의 그림자에 숨죽인 인간의 역사를 발굴해온 스토리텔러. 충북역사문화연대 박만순(60) 대표다.
지난 3월 15일 충북 청주시 성화동의 한 작은도서관에서 박 대표를 만났다. (사)함께사는우리의 대표를 겸하고 있는 그가 지역 주민들과 함께 호흡하는 보금자리다.
박 대표는 “군대 생활 27개월 빼고는 청주에서만 산” 토박이다. 1985년 충북대에 입학했다. 전공이 역사학인가 생각했더니 뜻밖에(?) 경제학이다. 그런데 졸업장이 없다. “학생운동을 열심히 해서 제적당한 건 아니”라고 했지만, 아주 관련 없는 이유도 아니다. 4학년 등록금을 학생회 선거에 다 써버리고 등록을 안 해서 미등록 제적이 됐다.
제적될 걸 알면서도 학교에 등록금을 내지 않은 건, 그가 정한 삶에 대학 졸업장은 필요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1991년 뜻 맞는 사람들과 함께 ‘청주 노동자의집’을 만들었다. 임금 체불이나 산재, 노동조합 설립 등 법률 상담과 노동자 지원을 위한 곳이었다.
“처음에 상근자가 여섯 명이었어요. 대표를 정해야 되는데, 다 성격상 누구 앞에 나서는 걸 싫어한 거야. 가위바위보를 해서 다른 선배가 됐어. 근데 그 양반이 다음 날 출근을 안 하는 거야. 부담스럽다고. 그래서 다시 가위바위보를 했는데 내가 져서 대표를 하게 됐어요.”
노동자의집에서 활동한 시간이 3년 반. 그동안 받은 활동비가 모두 200만 원밖에 안 됐다. 홀몸일 때는 어찌어찌 버텼지만 1992년 결혼해, 이듬해 딸까지 낳은 상황이라 생계가 막막했다. 그래서 1994년 노동자의집 상근활동을 마치고 장사를 시작했다.
팬시점으로 시작해 소주방과 만화방, 삼겹살집 ‘사장님’으로 10년간 살았다. 그러면서도 사회운동의 끈은 꾸준히 놓지 않고 있었다. 1997년 21C시민정치포럼 기획위원장을 맡아 시민정치아카데미를 열고, 역사 등 인문학 강좌를 진행했다.
현재 그가 역사 기록자이자 마을운동가로 살게 된 데는 두 번의 ‘선거’가 큰 계기가 됐다.
첫 번째가 1998년 시의원 선거다. 지역 사회운동 진영 내에서 ‘민중투쟁도 중요하지만 시의회 안에서 정치운동을 통해 지역을 바꾸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몇몇이 직접 후보로 출마하기로 했는데, 그중 한 명이 당시 서른두 살의 박 대표였다.
하지만 결과는 아까운 낙선이었다.
“후배들이 6개월 동안 돈 한 푼 안 받고 헌신적으로 선거운동을 해서 그 정도라도 표를 얻은 거죠. 그리고 거꾸로, 그렇게만 해선 안 된다는 것도 알았죠. 주민들 속에서 직접 만들어낸 결과물을 가지고 출마해야 하는 거지, 정치적 당위성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걸요.”
낙선이 남긴 뼈아픈 반성. 특히, 선거용 명함에는 그럴 듯하게 적혀 있었지만 실제로는 제대로 하지 못한 일들이 ‘죄의식’으로 남았다. 이후 사회교육센터 일하는사람들 회장을 맡아 문해교육과 방과후 공부방 운영을 하게 된 건 그 ‘미안함’ 때문이었다.
2000년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가 결성됐다. 충북대책위는 2년 뒤인 2002년 만들어졌다. 박 대표는 비상근 운영위원장을 맡았다.그리고 그의 인생을 바꾼 두 번째 선거가 다가왔다. 2004년 국회의원 선거. 민주노동당 소속으로 출사표를 던졌다. 하지만 이번에도 고배를 마셔야 했다.
낙선의 아픔보다 그를 더 괴롭힌 건, 이번에도 ‘명함’이었다. 선거용 명함에 들어 있던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충북대책위 운영위원장’이란 직함.
“잘못된 건 아니에요. 실제로 직책을 맡고 있었으니까. 근데 선거운동 끝나고 나서 굉장히 부끄러운 거야. 내가 상근활동을 한 것도 아니고 기자회견이나 무슨 행사 때만 나갔는데, 선거운동 기간에 마치 내가 일을 다 한 것처럼 떠들고 다닌 거에 대한 죄의식, 미안함…. 그래서 결국 ‘내가 그렇게 떠벌렸던 거에 대해서 책임을 지자’ 생각한 거죠.”
총선 이듬해, 충북대책위 상근 운영위원장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무슨 운동을 하든 최소 10년은 하자”며 시작한 일. 2008년 충북대책위가 문을 닫은 뒤에도 충북역사문화연대의 이름으로 꾸준히 이어졌다. 비상근 활동을 시작한 2002년부터 치면 올해로 24년째다.
한국전쟁 전후 학살된 민간인 수는 전국적으로 최대 100만 명까지 추정된다. 보리쌀을 준다는 말에 속아 국민보도연맹에 이름을 올린 죄로, 총부리를 들이대는 인민군에게 밥을 지어준 죄로, 좌익이 의심되는 가족을 둔 죄로, 대체 무슨 죄인지 알 수 없는 죄로도 수없이 죽었다.
‘빨갱이’라서 죽은 사람도 있고, 죽고 나서 ‘빨갱이’가 된 사람도 있었다. 그들의 죽음을 슬퍼하거나 기억하거나 반문하는 자들 모두 ‘빨갱이’가 됐다. 슬픔도 원망도 침묵 속에 가둬야 했던 수십 년 세월이 흘렀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고, 그 죽음 아래 쌓여온 말들. 스스로를 유족이라 부를 수도 없었던 유족들의 말을 듣는 것부터가 진실규명의 시작이었다.
“전쟁 때 어느 동네에서 사람이 많이 죽었다더라, 이런 소문이 들리잖아요. 그럼 그 마을을 가지 않고서는 진실을 조사할 수가 없죠.”
박 대표는 2005년부터 충북 지역 약 2000개의 마을을 직접 찾아다니며 약 6000명의 노인들을 만났다. 처음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연구용역 사업이 계기가 됐다. 하지만 연구용역 사업이 끝난 뒤에도 멈추지 않았다.
한 사람을 서른 번이나 만나기도 했다. 어느 마을에서 일어난 학살 사건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였다. 그의 기억에서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건 처음부터 쉽지 않았다.
“처음에 물어 물어서 마을 경로당으로 갔어요. ‘어르신, 6.25 때 얘기 좀 들으러 왔습니다’ 그랬더니 어르신이 내 손을 끌고서 아무도 없는 방으로 가는 거야. 다른 할아버지들 없는 방으로 가서 조그맣게 조그맣게 얘기하는 거야. 그러다가 누가 ‘빨갱이들 좀 죽인 거 가지고 왜 쓸데없이 그래!’ 그러면 이 어르신이 또 입을 닫아요.”
다음엔 그 할아버지의 집으로 찾아갔다. 당시는 1기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해 진실규명 신청을 받고 있을 때였다. 한참 설명을 드리고 신청서를 쓰려 하는데, 또 변수(?)가 생겼다.
“할머니가 번개같이 튀어와 갖고서 딱 막아. 당신은 살 만치 살았는데 자식하고 손주들 무슨 해코지 받으려고 거기 도장을 찍냐고, 막 뭐라고 하는 거야. 오랜 세월 동안 연좌제가 있었으니까…. 할머니를 아무리 설득해도 안 되는 거야.”
그렇다고 포기할 수 있나. 할머니가 안 계실 때를 골라서 또 찾아갔다. 그렇게 하기를 서른 번. 그 면에서만 67명이 학살됐다고 하는데, ‘유일한 생존자’인 할아버지는 63명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박 대표는 그걸 보며 “발품을 파는 만치 결과가 나오는구나”라고 확신했다.
“2018년 기준으로, 충북에서 학살 희생자 2700명을 찾아냈어요. 그때까지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진실 규명한 인원이 800명이었어요. 그러니까 1900명을 제가 별도로 찾아낸 거예요.”
그가 찾아낸 발굴한 증언들은 책에 담겨 새로운 세대들에게 전해졌다. 2018년 <기억전쟁>을 시작으로 2020년 <골령골의 기억전쟁>이 출간됐고, 2021년부터 2025년까지 <박만순의 기억전쟁> 1~4권이 차례로 출간됐다. <기억전쟁>은 박건웅 작가의 만화 <악마의 일기>의 모티브가 됐다. 그 인연으로, 이후에 나온 박 대표의 책 표지를 박건웅 작가의 작품으로 채우고 있다.
박 대표가 기록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한 때는 2016년. 거기에도 큰 계기가 있었다.
“2015년에 한 달 사이에 두 번이나 뇌졸중으로 쓰러졌어요. 그 뒤부터 본격적으로 글을 쓴 거예요. 내가 나름대로 민간인 학살 진실규명 활동을 그때 기준으로만 해도 10년을 했는데, 내가 또 쓰러지거나 아예 잘못되면 이 역사는 누가 기억할까. 내가 만났던 유족 분들도 이미 돌아가신 분들도 있는데 이 기록은 누가 후대에 남길까.”
그때쯤이었다. 마침 대전충청 오마이뉴스의 심규상 기자가 제안했다. 시민기자로 등록해서 민간인 학살 이야기를 직접 써보라고. 분량의 제약이 큰 종이신문과 달리, 분량도 주제도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점이 제일 반가웠다.
처음에 용기 내 쓴 글들이 호평을 받았다. 조회수가 100만을 넘긴 기사도 있었다. “그 바람에 신이 나서” 쓰다보니, 지금까지 10년 동안 민간인 학살 이야기만 약 280편을 썼다. 민간인 학살만을 주제로 한 연재로는 ‘비공식’ 국내 최다 연재 기록이 아닐까 싶다.
“사실은 다 비슷비슷한 얘기일 수 있어요. 하지만 280명의 생애 이야기가 다 따로따로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거지. 이걸 연구서 형식으로다가 쓰려고 했다면 책 두 권 이상은 못 냈을 것 같아요. 민간인 학살 연재로 책 여섯 권을 묶어냈으니까, 내 나름대로 역할은 하지 않았나, 그냥 그런 거에 자부심을 갖는 거죠.”
20년 세월. 2000개 마을. 6000명의 증언. 1900명의 피해 규명. 280편의 기사. 여섯 권의 책. ‘선거 때 떠벌렸던 거에 대해서 책임을 지자’는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 남긴 결과다.
솔직히 그동안 “진짜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순간이 세 번은 있었다.
“역사의 진실 규명에 조금이나마 일조하고, 피해자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어루만져주고, 이걸 기록으로 남기는 것까지가 내 역할이지, 무슨 감투나 명예 이런 걸로 했으면 지금까지 하진 않았겠죠.
마을마다 가서 유족 어르신들 얘기 들을 때마다 눈물 흘릴 만큼의 이야기가 모두에게 있어요. 누구는 ‘그거 다 비슷비슷한 거 아냐?’ 그러겠지만, 나는 들을 때마다 그들 각자의 인생이, 고통이 다 따로따로 느껴지니까 지금까지 (이 일을) 해온 거죠. 결국 사람들 얘기를 무진장 들은 거, 그게 기록의 원천이고 활동의 기반이죠.”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은 ‘100만 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다. ‘한 사람이 죽은 100만 개의 사건’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사건의 무게가 제대로 인식될 수 있다. 박 대표가 해온 ‘스토리텔링’이 바로 그런 거다. 숫자로 뭉뚱그려져서는 안 되는 각각의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이야기 속에 살려내는 일. 이 참혹한 역사를 그 무게 그대로 후대에 전해주는 일.
국가폭력의 실상을 기억하는 것은 고인들의 명예회복과 유가족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것으로 그칠 수는 없는 일이다. 평화와 인권의 소중함을 널리 공유하는 것, 대한민국 시민, 특히 청소년들에게 ‘좋은 전쟁은 없다’라는 교훈을 공감케 하는 것이 이 책을 쓴 궁극적 목적이다. 이 책은 망각을 강요한 세력에 대한 ‘기억전쟁’이다.(<박만순의 기억전쟁 1> 7쪽)
지난 2월 3기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했다. 박 대표는 여전히 학살 유족들의 진실규명 신청을 돕고 있다. 인터뷰를 하는 날에도 대전에서부터 찾아온 이들이 박 대표에게 도움을 구했다.
박 대표는 진실화해위원회와 같이 국가가 주도하는 과거사 정리에 걱정이 컸다. 가장 큰 걱정은 역시 ‘학살의 기억을 어떻게 국민 모두의 역사로 만들 것인가’ 하는 거였다.
“저는 위령사업이 아니라 기억사업으로 명칭을 바꿔야 된다고 봐요. 시민들과의 소통과 공감대 확산에 주안점을 둬야 된다. 민간인 학살, 여전히 많은 시민들이 잘 모르거든요. ‘왜 진실화해위원회를 3기까지 하고 있어?’ ‘그거 보상금 1억 넘게 받는다는데 왜 국민 세금을 그런 데 써?’ 피로도를 느끼잖아요.
주된 책임은 국가한테 있지만, 민간인 학살 진실규명 운동을 하고 있는 저부터 우리 시민사회, 유족회한테도 일부의 책임은 있는 게 아닐까.”
박 대표는 광주의 5.18이 온 국민의 보편적 기억이 되고, ‘폭동’에서 ‘사태’를 지나, ‘민주화운동’과 ‘항쟁’으로 불리게 된 과정에 정답이 있다고 말했다. 온 국민이 공유할 수 있는 강력한 문화적 기억. <택시운전사>와 같은 콘텐츠의 힘이 절대적이었다는 거다.
“(민간인 학살도) 기록하고 교과서에 싣고 영화도 만들고, 그런 데 지원을 해서 ‘더 이상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역사의식을 공유하는 데 초점을 맞췄어야 되는데, 너무 개별 보상이나 위령사업 쪽으로만 갔던 건 아닌가 진지하게 반성해야 돼요. 평화와 인권의 정신은 온데간데없고 보상 이야기만 남는다면, 이건 잘못 해온 것 같아요. 방향을 바꿔야죠.”
2026년 중동. 미국이 일으킨 전쟁이 매일같이 죽음의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죄 많은 전쟁 때문에 죄 없는 사람들이 죽어간다. 1950년 한반도에서 그랬던 것처럼.
“한국 사회에서 이제는 민주화가 거의 정착된 거 아닌가, 이렇게 생각했는데 (윤석열이) 쿠데타를 일으켰어요. 그리고 지금 트럼프가 하는 짓 보세요. 이대로라면 민주주의나 인권은 계속 위험하기 때문에, 오히려 거꾸로 ‘민주주의와 인권 운동은 몇 백 년이라도 계속돼야만 된다,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게 해준 거죠.”
하지만 전쟁은 전쟁터에만 있지 않다. 전쟁은 일상 속에 녹아 있을 때 더 두려운 법이다. 죽이거나 죽어야만 하는 전쟁처럼, 짓밟거나 짓밟혀야만 하는 무한경쟁 사회.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똑같은 생각을 강요하는 사회. 인간다운 삶을 가로막는 폭력적인 사회.
박 대표의 평화는 단순히 ‘전쟁하지 않는 상태’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경쟁과 폭력이 지배하는 ‘전쟁 같은’ 사회에서 벗어나, 모두가 자유로운 선택 속에서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는 삶. 그게 바로 박 대표가 꿈꾸는 평화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인용을 하고 있는데 ‘좋은 전쟁보다 나쁜 평화가 낫다’, 참 그것만큼 좋은 말이 없는 것 같아요.”
- 월간 <작은책> 2026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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