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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글/인터뷰와 현장기사

사랑방을 지키는 ‘마지막 재야’, 안영민 [작은책이 만난 사람]

by 최규화21 2026. 4. 9.

 

“맛있는 거 뭐 사왔어?”

 

교수님 댁 문을 막고 선 다섯 살 꼬마의 호령(?)에 대학생 청년들이 쩔쩔 맨다. 그 시절 최고급 과자였던 ‘사브레’를 내밀어도 소용이 없다.

 

“에이, 맛도 더럽게 없는 거 사갖고 왔네.”

 

누구 하나가 얼른 가게에 뛰어가서 양갱이나 ‘뽀빠이’를 사오면, 그제야 꼬마 수문장은 만족스럽다는 듯 한 발짝 물러섰다.

 

청년들이 찾아온 교수님은 바로, 세계적인 수학자이자 통일운동가인 안재구(1933~2020) 선생. 문 앞에 버티고 서 있던 꼬마는 그의 막내아들 안영민(58) 평화의길 이사장이다.

 

지난해 12월 25일 성탄절 오후, 서울 장충동 평화의길 사무실에서 안 이사장을 만났다.

 

남매들에게 두고두고 구박(?) 거리가 된 꼬마 수문장 이야기. 하지만 그에게 웃으며 추억할 만한 어린 시절 이야기는 그리 많지 않다. 그의 나이 겨우 열두 살 때, 아버지는 ‘사형수’가 됐다. 그의 어린 시절은 혹독한 가난을 견디고 세상의 낙인에 맞서야 하는 시간이었다.

 

1979년 안재구 선생이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으로 투옥되자, 4남매의 생계는 오직 어머니 장수향 여사의 몫이 됐다. 어머니는 화장품 행상을 시작했다. 그래도 ‘드러나지 않게’ 어머니를 도와주신 분들이 있었다. 학비도 주변의 도움으로 마련할 수 있었다.

“내 학비는 엄마 친구가 대줬고, 누나 학비는 수녀님이 대줬죠. 구치소 (수감자) 교화를 맡은 수녀님이신데, 아버지를 알게 되고 어머니도 만나게 되면서 우리를 많이 챙겨주셨어요.”


그렇게 온정을 베푸는 사람들만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간첩가족’이라는 손가락질은 더 가혹했다. 고개를 돌리고 수군대던 이웃들. 친지들조차 발길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힘이 쏙 빠진 채 돌아왔다. 연탄 가게 주인이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간첩 집에는 연탄 안 팔아요. 그리 알고 그냥 가세요.”
(…) 너무 추울 때는 아버지의 책을 연탄 아궁이에 태워 방을 덥혔다. 차마 수학책은 태울 수 없었다. (…) 그렇게 다섯 식구가 한 방에 모여 혹독한 겨울을 외롭게 견뎌냈다.(안영민의 책 <아버지 안재구> 41~42쪽)


영민이 중학생이던 때. 그때는 반장을 선생님이 임명하던 시절이었다. 담임선생님은 공부도 잘하고 리더십도 있는 영민을 반장으로 임명했다. 그러자 한 아이의 엄마가 학교에 따졌다.

 

“그 애 아버지가 누군지 알아요? 어떻게 그런 집의 애를 반장으로 뽑을 수 있어요?”

 

그 뒤로 반장 임명은 취소되고 다른 아이가 반장이 됐다.

“그런 걸 겪고 나니까 (아버지) 얘기 하면 안 된다는 걸 알았죠. 일절 내색을 안 했어요. 이해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친구들 중에 나중에 대학 가서 운동권이 된 애들도 있어요. 걔들이 뒤늦게 ‘네 아버지가 안재구 교수님 맞냐?’ 하면서 깜짝 놀랐죠.(웃음)”


어머니는 구속자 석방운동에도 앞장섰다. 1985년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이 결성될 때, 어머니 장수향 여사는 공동대표를 맡았다.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안재구 선생. 전 세계 수학자들의 구명운동도 일어났다. 덕분에 2심에서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영민도 수학을 잘했다. 학교 시험에서 수학 문제를 틀리는 일이 드물었고, 학교 대표로 수학 경시대회도 출전했다. 중학교 시절부터, 대학은 꼭 수학과로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1987년 대학에 들어갔다. 경북대 수학과. 아버지가 18년간 몸담았던 바로 그곳이었다. 영민을 가르칠 교수들은 대부분 아버지의 후배나 제자들이었다. 그들이 얼마나 영민을 반기고 아꼈을지는 말할 것도 없다. 영민도 아버지의 뒤를 잇는 수학자가 되겠다며 열심히 공부했다.

 

하지만 영민의 인생을 바꿔놓은 첫 번째 계절이 다가오고 있었다. 1987년 여름이었다.

6월항쟁의 열기가 전국을 끓어오르게 했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평범한 학생들까지 수업을 거부하고 거리로 뛰쳐나가던 시절. 영민의 친구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역시 민주화라는 거대한 “물결 속으로 서서히 빨려 들어갔다”(<아버지 안재구> 428쪽).

 

그의 인생을 바꿔놓은 두 번째 계절은, 1988년 겨울이었다. 무기수였던 아버지가 9년 3개월 만에 가석방된 때. 영민은 휴학 중이었다. 학문의 길과 학생운동의 길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술로 세월을 보내며 고민에 젖어 살던 중에, 뜻밖에도 아버지가 석방된 거였다.

“아버지가 (감옥에서) 나오신 게 결정적이었어요. (6월항쟁 이후로) 양심수 석방 투쟁이 불붙으면서, 그 결과로 석방되신 거거든요. 그런데 그 과정에서 제가 한 역할이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런 생각이 들면서, 이제 학생운동을 해야겠다 다짐을 하고 복학하게 됐죠.”

 

영민은 1991년 경북대 총학생회장과 대경총련(대구경북지역총학생회연합) 의장을 맡았다.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중앙위원 활동도 했다. 경찰은 그를 잡으려고 수배를 내렸다.

 

수배 생활은 3년이나 이어졌다. 1994년 봄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았다.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 하지만 형이 확정된 지 불과 나흘 만에 그는 다시 체포됐다. 이유도 모르고 끌려간 곳은 경찰청 대공분실. 더 기가 막힌 건, 아버지도 안기부로 잡혀갔다는 거였다.

 

이른바 ‘구국전위’ 사건. 안재구․안영민 부자를 비롯해 구속자는 무려 23명에 달했다.

“사실은 나를 구속시켜서 아버지한테 협박을 한 거죠. ‘협조하면 아들을 풀어주겠다.’ 나뿐만 아니라 큰누나도 구속시키려고 했어요. 그렇게 가족간첩단으로 엮으려 했던 거죠.”

 

1995년 유엔인권위 산하 ‘자의적 구금에 관한 실무위원회’는 구국전위 관련자들의 구금이 국제규약 위반이라 보고, 시정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발표했다. 국제 인권단체인 앰네스티도 안재구․안영민 부자와 구국전위 관련자들을 ‘양심수’로 지정했다.

 

재판 결과, 영민에겐 징역 2개월이 선고됐다. 부자가 함께 구속된 상황에서 차마 무죄를 선고할 수는 없으니 판사가 나름 찾아낸 ‘묘수’ 아니었을까. 하지만 영민은 앞서 수배 건으로 받은 1년 6월의 ‘외상값’ 때문에 2년 4개월을 감옥에서 보내야만 했다.

 

아버지 안재구 선생에게는 다시 한 번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하지만 5년 뒤인 1999년 광복절 특사로 석방됐다.

 

학생운동을 정리한 영민은 1998년, 당시 진보적 시사지로 사회에 큰 영향력을 떨치던 월간 <말> 기자가 됐다. 수학과 출신이 언제 글쓰기를 연마했는지 물으니, 재밌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의 필력을 키워준 건, 팔 할이 ‘연애편지’였다는.

“감옥에 있을 때 ‘산이 엄마’(아내)를 소개받아가지고, 얼굴은 못 보고 6개월 동안 편지만 주고받았어요. 그러고 나와서(석방돼서) 만나고, 한 2년 뒤에 결혼했죠. 내가 감옥에서 연애편지 한 통 쓸 때, 거의 밤을 꼬박 새웠거든요. 그래서 지금도 어디 가서 글쓰기 강의할 때 늘 얘기해요. 온 힘을 다해서 절실하게 쓰면 누구나 잘할 수 있는 게 바로 글쓰기다.(웃음)”

 

2001년엔 <민족21> 창간에 함께했다. 2000년 6․15공동선언의 영향으로 남과 북 사이에 ‘말의 길’도 열린 덕분이었다. ‘남북이 함께하는 통일언론’을 표방한 언론답게 방북 취재만 10여 차례 경험했고, 북의 <통일신보>, 일본의 <조선신보> 등과도 활발히 교류했다.

 

‘안영민 기자’는 어깨에 날개를 단 듯 마음껏 뜻과 능력을 펼쳤다.

“그때가 내 인생의 전성기였다고 생각해요. 진짜 재밌었어요, 거침없었고. 그때는 남북 공동행사가 많이 열렸잖아요. <민족21>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굉장히 좋아하고 반겨주고….”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2008년을 끝으로 방북 취재의 길은 막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공안당국은 다시 한번 안재구․안영민 부자를 표적 삼아 ‘사건’을 기획했다.

 

2011년 국정원은 안영민 기자의 집을 압수수색했다. 아버지 안재구 선생 역시 압수수색을 당했다. 국정원은 ‘조총련의 지령을 받아 활동했다’며 안 기자에게 간첩 혐의를 씌웠다.

저들은 자신만만한 태도였다. 국정원의 팀장은 첫 수사 때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일본의 조직하고 주고받은 문서는 어차피 다 나옵니다. (…) 결국은 우리가 다 찾아냅니다.”
“아니, 뭐가 있어야 감추든 말든 할 거 아닙니까?”
그들만큼 나도 자신 있었다. 당연했다. 국정원이 찾은 ‘지령문’이니 ‘보고문’이니 하는 건 애초부터 없기 때문이다.(안영민의 책 <아버지 안재구> 459~460쪽)


증거가 없으니 안영민 기자를 구속도 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국정원은 계속해서 언론에 거짓 정보를 흘렸고, 언론은 이미 ‘대를 이은 빨갱이 부자’라며 여론재판에 열을 올렸다.

“나중에 재판 때 수사기록을 보니까, 내가 <민족21> 대표가 됐던 2005년부터 일거수일투족이 다 나오더라고요. 노무현 정부 시절이었는데도 국정원은 계속 감시하고 있었던 거예요.”

 

재판은 7년이나 걸렸다. 국정원은 당연하게도(!) 간첩 혐의를 입증하지 못했다. ‘부자간첩단 사건’이라며 떠들썩하게 시작됐지만, 법원의 집행유예 선고로 용두사미로 끝났다.

 

하지만 안영민 기자는 중요한 것을 잃었다. 국정원과 언론에 의해 ‘간첩 소굴’로 몰렸던 <민족21>이 2013년 문을 닫은 것. 아직도 그에겐 큰 안타까움과 원통함이 남아 있다.

“남북관계에 있어서 아주 쟁쟁한 사람들이 <민족21>을 중심으로 모여 있었거든요. 그들을 월간지란 틀 속에 다 담아내지 못한다면, 새로운 그릇을 만들어서 그 역량을 담아 나갔어야 되는데, 그걸 미처 준비 못했죠. 막 고민을 시작하던 참에 (국정원에게) 딱 두들겨 맞고….”

 

<민족21>이 못다 간 길을 이어가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 바로 ‘사단법인 평화의길’이다. 2018년 남북정상회담과 4․27 판문점선언이 중요한 계기가 됐다. 다시 한반도에 평화의 기운을 높이고 남북관계에 물꼬를 트는 마음으로, 같은 해에 출범했다.

 

하지만 지금 남북관계를 바라보는 안영민 이사장의 마음은 가볍지 못하다. 북은 지난 2023년, 남북을 “동족관계, 동질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로 규정했다. 안 이사장은 이럴 때일수록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며 ‘실사구시’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선 적대적 관계를 평화적 관계로 돌리고, 그 속에서 상식적이고 현실적인 교류협력을 확장해 나가야죠. 그래서 그게 윈-윈이 된다는 걸 실질적으로 검증하는 게 중요하겠죠. 오히려 더 편하게 생각할 수도 있어요. ‘남북이 이렇게 교류하고 협력하면 서로 더 잘 살 수 있어’ 그런 형태로 가는 게 지금 시대엔 맞지 않을까. 50년, 100년이 걸리는 과정 모두가 통일이에요. 결과만 보기보다 과정 하나하나에 충실하는 남북관계가 되면 좋지 않을까.”
통일은 오랜 기간의 교류협력을 통해 만들어나가는, 과정으로서의 통일이다. 마치 수직선의 0과 1 사이에 무수히 많은 점들이 있듯이 0이라는 분단의 시점에서 1이라는 완전 통일의 시점을 향해 무수히 많은 점을 찍어나가는 과정이 바로 통일인 것이다.(안영민의 책 <행복한 통일 이야기> 187쪽)


이재명 정부가 “꽉 막힌 남북관계에 바늘구멍이라도 뚫기 위해” 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국가보안법 폐지다. 지난해 12월 1일, 국회에 국가보안법 폐지안이 발의됐다.

“미래지향적인 남북관계로 가기 위해서는, 최소한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는 법은 없애야죠. 정말 답답합니다. 국가보안법이 수십 년 동안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탄압하는 도구로 사용돼왔다는 걸 민주당 국회의원들도 뻔히 다 알잖아요. 이번에야말로 (폐지)될 거라고 봅니다. ‘꼭 해야 된다’는 당위이면서, 동시에 ‘할 때가 됐다’는 기대이기도 합니다.”

 

안 이사장은 지난해 3월 아버지 안재구 선생의 삶 이야기를 담은 책 <아버지 안재구>(내일을여는책)를 펴냈다. 그리고 12월에는 민가협 4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상임운영위원장으로, 민가협 40주년 기념 헌정공연 ‘어머니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 행사를 치러냈다.

 

전대협동우회 회장을 맡고 있는 그도 어느덧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변혁을 외치며 세상에 나온 전대협 세대, 6월항쟁 세대도, 이제 다음 세대로부터 혁신을 요구받는 대상이 됐다. 그래서일까. 그는 요즘 ‘재야’라는 말의 무게를 새삼 무겁게 느낀다.

“우리 세대는 재야보다 더 좋은 길이 열렸어요. 국회로도 나갔고, 공직에도 많이 나갔잖아요. 대신 안타까운 건, 후배들이 존경할 만한 재야의 선배들이 없어졌어요. 다들 양지를 찾아서 떠나고, 그나마 남아서 버티는 사람들은 ‘아직도 그러고 있냐?’ 하는 시선을 견뎌야 되죠. 저도 그런 얘기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저와 비슷하게 늙어가고 있는 사람들끼리는 이런 얘기를 하죠. ‘우리가 마지막 재야가 되자. 여기저기 민망하게 기웃거리지 말고.’”

 

평화의길 사무실은 구조가 독특하다. 사무공간은 안쪽으로 좁게 자리하고 있고, 문을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넓은 공간은 ‘열린 공간’으로 마련됐다. 영상 촬영이나 20~30명 규모의 강연, 소모임 등 공간으로 쓸 수도 있고, 오가다 차 한잔 마시며 쉬거나, 공부를 하거나 놀고(?) 싶을 때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안 이사장은 이곳을 ‘사랑방’처럼 써주길 바랐다.

 

지난겨울 내란을 막아낸 ‘응원봉 세대’를 보며, 안 이사장은 ‘마지막 재야’의 책임에 대해 고민했다. 그가 생각하는 선배 세대의 역할이란, 결국 이 ‘사랑방’과 다르지 않다.

“(기성세대 활동가들이) 항상 젊은 세대를 키워야 한다고 말은 하면서, 행동은 자꾸 우리 판에 청년들보고 나오라고만 하는 거예요. 달라져야 돼요. 젊은 세대한테 ‘싸우고 싶은 대로 싸워봐, 돈은 우리가 대줄게’ 이런 태도가 필요하지 않나. 감히 ‘마지막 재야’라고 한다면 우리 역할은, 새로운 세대가 기꺼이 자기 머리로 생각하고 자기 힘으로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는 거, 거기에 돈을 모아주고 마음을 모아주는 거. 이런 거 아닐까요.”

 

- 월간 <작은책> 2026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