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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글/인터뷰와 현장기사

연대의 힘으로 ‘끝’을 만드는 사람, 허지희 [작은책이 만난 사람]

by 최규화21 2026. 4. 9.

 

“설악산 단풍 지각”이란 기사 제목이 반갑다. 기왕 지각한 거 더 천천히 물들고 더 늦게 지면 좋겠다. 단풍잎이 떨어져 땅에 닿기 전에 ‘한 남자’의 발이 먼저 땅에 닿아야 하니까. 그리고 올해는 꼭 설악산 대청봉 단풍을 보겠다는 ‘그 여자’의 꿈도 이뤄져야 하니까.

 

‘한 남자’의 이름은 고진수다. 서울 명동 도로 한가운데, 20미터 높이 철제 구조물 위에 있는 남자. 바로 그 도로 옆에 있는 세종호텔의 요리사다. 그는 2021년 해고를 당하고, 지난 2월 13일부터 도로 위 철제 구조물에 올라 고공농성을 하고 있다.

  
‘그 여자’의 이름은 허지희다. 고진수가 지부장으로 있는 관광레저산업노조 세종호텔지부의 사무장. 허지희 역시 해고자다. 고진수는 하늘에서, 허지희는 다른 해고자들과 함께 땅에서 투쟁하고 있다. 그들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을 함께 걸어가는 중이다.

 

허지희가 세종호텔에 입사한 지 벌써 30년도 넘었다.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에 있는 대학에서 호텔경영학을 전공했다. 대학 시절 내내 빨리 취업해서 ‘독립’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졸업을 하고 혼자 서울로 왔다. 이력서 40장을 써와서 다 뿌렸다. 한 호텔의 프런트캐셔 자리에 이력서를 넣고 기다리는 동안,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전화교환’ 자리가 갑자기 비었는데, 3개월만 ‘알바’를 해줄 수 있냐는 거였다. 그렇게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계획에 없던 일이지만 막상 해보니 나쁘지 않았다. 손님들과 대화할 기회가 많아서 좋았다. 그러던 중 세종호텔에서 면접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처음엔 떨어졌다. 그런데 얼마 뒤 다시 연락이 와서 일하러 오라고 했다.

“처음엔 (세종호텔에) 안 갈라 그랬어요. 기분 나빠가지고.(웃음) 근데 ‘사립대 재단 소유니까 웬만하면 망하진 않겠네’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간 거예요.”

 

세종호텔(세종투자개발)은 세종대 학교법인 대양학원이 100% 지분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세종호텔에서 전화교환 일을 시작했다. 그때가 1993년이었다.

 

8명이 3교대 근무를 했다. 한 달에 7일은 야간근무가 돌아왔다. 세계보건기구(WHO) 국제암연구소는 교대근무를 발암물질로 규정한 바 있다. 야간노동은 뇌·심혈관 질환과 난임·유산 등과도 관계가 깊다. 의학 논문을 읽어보진 않아도, 허지희는 그 점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결혼 후 5년 동안 아이가 안 생겼어요. 그때는 시험관 시술이 의료보험 대상이 아니어서 비용도 많이 들었거든요. 그것도 문제지만 (정신적인) 상처를 엄청 많이 받아요. 수정란이 내 배 속에 들어오면 임신을 한 것 같은 착각을 해요. 그러다 착상에 실패하면 아이를 잃은 것 같은 슬픔이 있어요. 세상을 잃은 것 같은……. 오랫동안 난임으로 정말 힘들었거든요.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생각이 든 게, 야간근무 때문에 그런 문제가 있지 않았을까…….”


시술과 실패, 기대와 절망을 거듭하며 몇 년을 보냈다. ‘엄마가 될 수 없나보다’ 포기하려던 때 “하늘의 도움으로” 아이를 가졌다. 2005년에 첫 아이, 2007년에 둘째 아이를 낳았다.

 

둘째아이를 임신했을 때, 임신 8개월 때까지 야간근무를 했다. 임신부는 보통 10~15킬로그램은 몸무게가 느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허지희는 몸무게가 늘지 않았다.

 

“다이어트 하시면 안 돼요! 애기 체중이 이거밖에 안 되는데.”

 

산부인과 의사는 그녀가 일부러 몸매관리(?)를 하는 줄 알고 ‘경고’를 할 정도였다.

 

임신 8개월이 지나서야 야간근무를 피할 수 있게 됐다. 그러자 갑자기 10킬로그램 가까이 몸무게가 늘었다. 덕분에 다행히 아이를 건강하게 낳을 수 있었다.

 

‘워킹맘’으로 사는 것도 쉽지 않았다. 3교대 야간근무의 삶은 바뀌지 않았으니까. 시부모님이 집으로 와서 아이를 봐주셨지만, 그렇다고 ‘며느리의 일’까지 덜어지는 건 아니었다.

“(주간 출근을 하려면) 새벽 5시에 일어나서 밥을 해요. 어르신들은 찌개가 있어야 되니까 김치찌개, 된장찌개 끓이고, 반찬도 하고. 시부모님은 딱 애만 봐주셨기 때문에, 제가 아침밥을 딱 차려놓고 출근해야 되는 거예요.”

 

야간근무를 마친 다음 날은 육체적 한계를 느꼈다. 밤새 일을 했으니 아침에 퇴근해서 집에 가면 잠을 자고 쉬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야간근무 하는 날은) 어머님이 밤에 아이를 데리고 주무세요. 아침에 제가 오면 ‘나 간다~’ 하고 가시는 거예요. 아이는 ‘엄마 왔다!’ 하고 신나서 저랑 놀고 싶어 하는데, 저는 피곤하고 졸리고……. 나중에는 어머님한테 거짓말했어요. 퇴근이 여덟 시가 아니고 열 시라고. 너무 힘들어서 탈의실에서 두 시간을 엎드려 자고 퇴근했어요.”


일과 육아. 회사와 집 사이에서 아슬아슬 버텨가던 생활. 2012년엔 허지희의 일상을 더 크게 흔들어놓는 사건이 생겼다. ‘파업’이었다.

 

2011년 7월 복수노조 설립을 허용하는 노동조합법이 시행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세종호텔에는 새 노조가 생겼다. 조합원 280여 명 중 230여 명이 새 노조로 넘어갔다.

 

50여 명이 남아서 2012년 새해 벽두부터 파업에 들어갔다. ▲비정규직 정규직화 ▲부당전보 철회 ▲외주용역화 중단 등이 쟁점이었다. 호텔 로비를 점거하고 38일간 투쟁을 이어갔다.

 

농성 중에 설 연휴를 맞았다. 농성장을 지키는 사람이 적어지면 침탈이 들어올 게 걱정됐다. 허지희는 명절을 쇠러 집으로 가는 대신, 아이들을 농성장으로 데리고 왔다. 일곱 살, 다섯 살 두 아이를 데리고 조합원들과 함께 윷놀이를 하면서 농성장을 지켰다.

 

그녀는 생각한다. 그때 그 파업이 지금의 허지희를 만든 ‘결정적 순간’이었을 거라고.

 

회사는 해가 갈수록 전화교환원 수를 줄여나갔다. 그리고 2014년, 20년간 전화교환 업무를 해온 허지희를 룸메이드(룸어텐던트)로 발령 냈다. 객실을 정비․청소하고 관리하는 일이다.

“이제 부당전보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제 문제가 됐죠. 단순히 업무만 바뀐 게 아니라, 제 문제를 가지고 ‘싸우는 노동자’가 된 거예요.”

 

허지희는 이때 처음으로 노조 간부직도 맡고, 투쟁과 노동을 함께 해갔다. 룸메이드 일을 하며, 크고 작은 근골격계 질환들을 달고 살게 됐다. 그러다 2018년엔 디스크가 터져버렸다.

“너무 아파서 며칠 잠을 못 자니까 정말 ‘살려주세요’ 소리가 나와요. 물리치료를 받아도, 약을 먹어도, 뭘 해도 안 좋아지니까 전문병원에 가서 긴급 수술을 받았죠.”

 

참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아픈 와중에 오히려 편안한 마음이 들더란다.

“수술받고 병원에 일주일 정도 누워 있었는데, 그때 ‘쉰다’는 게 이런 거구나, 라고 느꼈어요. 인생에서 처음으로. 육아와 일에서 벗어나서 온전히 혼자 쉰 게 처음이었요.”

 

2020년이 됐다. 코로나19 팬데믹이 터졌다. 세종호텔은 관광객이 끊겨 경영이 어려워졌다며 희망퇴직을 실시했다. 허지희는 휴직을 하면서도 희망퇴직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세종호텔은 민주노총 조합원들을 식음료팀으로 배치했다. 2021년 8월 식당 문을 닫았다. 그리고 11월, 정리해고를 통보했다. 허지희의 이름도 해고자 명단에 올라 있었다.

“3교대 야간근무를 20년간 하고, 목디스크가 터질 정도로 일했잖아요. 그런데 나를 쫓아내겠다니……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어요. 정의감이 아니에요. 배신감 때문에 싸워요.”


12월 첫날부터 호텔 로비를 점거하고 파업에 들어갔다. 12월 10일, 예고대로 정리해고가 단행됐다. 직장폐쇄와 가처분까지 들어왔다. 해고자들이 호텔에 출입할 경우 한 명당 100만 원씩 배상금을 물리겠다는 거였다. 해고자들은 호텔 정문 앞으로 옮겨 농성을 이어갔다.

사람 손이 필요 없어서가 아니다. 정규직을 희망퇴직시킨 대신 용역회사를 썼다. 비정규직 외주화를 위해 민주노총 소속 조합원만 정리해고한 것이다. 280명이 관리하던 333개 객실을 정규직 21명이 운영한다. 호텔 커피숍과 뷔페는 외부 식당과 병원에 임대했다.(<고공농성자 고진수가 추석 전에 내려오려면> 허지희, 한겨레, 2025년 9월 24일자)


한 해, 또 한 해, 시간은 잔인하게 흘렀다. 2023년 5월 정부는 ‘완전한 일상회복’을 선언했다. 이미 세종호텔은 팬데믹 이전보다 더 높은 객실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노조는 해고의 명분이었던 ‘코로나’가 물러갔으니 식당 영업을 재개하고 해고자 복직을 논의하자고 요구했다. 하지만 세종호텔의 입장은 분명했다. ‘복직을 전제로 한 대화는 없다.’

 

해고자들은 법에도 호소했다. 정리해고의 부당성을 밝혀달라는. 하지만 법정 싸움은 쉽지 않았다. 연이은 패소. 2024년 12월 대법원마저 세종호텔의 손을 들어줬다.

이상했다. 코로나로 식음료 업장을 폐지해 우리 조합원들에게 휴업 명령을 내린 것은 부당하다고 한 법이, 그 휴업 명령을 받았던 우리가 정리해고 된 것은 정당하다고 했다. 법은 약자의 편이 아니리는 것을 확인했다.(<온몸으로 겪은 세종호텔 잔혹사와 투쟁사> 허지희, 오마이뉴스, 2024년 7월 4일자)

 

대개 패소 확정판결이 나오면 투쟁의 동력도 크게 꺾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세종호텔 해고자들은 좀 달랐다. 대법원 선고 전 진행된 한 인터뷰에서 허지희는 이렇게 말했다.

“(대법원) 판결이 나올 때를 결승전으로 보고 싸우잖아요. 대법 판결 나올 때까지 싸우겠다 하잖아요. 저는 그렇게 이야기 안 해요. 대법원 결과가 나와야, 그때부터 진짜 투쟁이다. 진짜 싸움은 그때부터 시작인 거예요. (줄임) 진짜 오리지널 투쟁은 우리가 만드는 거라 생각해요.”(<운 좋은 세종호텔과 끝을 정하는 사람들> 희정, 대구노동히어로, 2024년 12월 3일자)

 

세종호텔 해고자들은 대법원 판결 전부터 “진짜 투쟁”을 만들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준비했다. 그러던 중 내란사태가 터졌다. 국회 앞에서 불법 비상계엄을 막아낸 시민들은 겨우내 광장에 모여 ‘윤석열 파면’을 외쳤다. 세종호텔 해고자들도 함께했다.

“(세종호텔 집회를 하고) 헌법재판소로 행진을 하니까 깃발이 180개, 250명 정도가 같이 오는 거예요. 그전에는 많아야 50명 정도 왔거든요. 보이더라고요. 광장의 힘이 노동조합으로 오고 있구나. 그때 자신감을 얻었어요. 지금 해야 되겠다 싶더라고요. 지금 해야 되겠다.”

 

‘지금 해야 되겠다’고 생각한 것. 바로 고공농성이었다. 2025년 2월 13일, 고진수 지부장이 세종호텔 앞 도로 철제 구조물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 주 주말, 윤석열 파면 집회에 참가한 광장의 시민들이 응원봉을 들고 세종호텔  앞으로 행진했다. 몇 만 명이나 되는지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고진수 힘내라! 세종호텔 해고자들 힘내라!” 외치는 함성이 명동 거리에 쩌렁쩌렁 울렸다.

“저희(다른 해고자들)는 앞에서 피켓을 들고 오열했어요. 그때 딱, 우리가 이겼다고 생각했어요. 이겼다. 이 투쟁의 결론이 어떻게 나든, 우리는 이미 승리했다.”

 

20미터 높이의 철제 구조물. 1인용 텐트를 펼칠 수도 없는 좁은 공간. 그저 현수막으로 커튼처럼 쳐놓고 그 안에서 겨울, 봄, 여름을 나고 가을을 맞았다.

 

해고자 12명 중 6명이 남았다. 지금껏 싸워올 수 있었던 이유는 이들만의 힘이 아니었다.

“세종호텔 노조는 깨알같이 작아요. 매주 집회(목요문화제)를 이어나가는 것 자체도 기적이거든요. 예전엔 우리 조합원 10명만 집회를 한 날도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너무나 다양한 사람들이 연대를 많이 해주시잖아요. 어마어마한 사랑을 받았어요. 받은 게 너무나 많아요.”

 

특히나 든든하고 고맙고 사랑스러운 이들이 있다. 바로 지난겨울 윤석열 파면의 광장에서 만난 청년들, ‘말벌 동지’들이다. 세종호텔 앞 지상 농성장에는 언제든 그들이 있다. 해고자들과 오랫동안 함께 같이 먹고 같이 자면서 거의 ‘식구’가 됐다.

“내 새끼 같아가지고 저도 ‘엄마 모드’가 돼요. ‘밥 먹었어?’부터 시작해서.(웃음) (지난겨울부터) 지금까지도 아침저녁으로 오거든요. 정말 놀라워요. 어쩌면 이런 인연이 있을까.”

 

뜨겁게 뭉치고 질기게 싸웠다. 그 덕분에 지난 9월, 교섭이 시작됐다. 정리해고 이후 4년 만이다. 그리고 주명건 세종대 명예이사장은 국정감사 증인으로 채택됐다. 세종대 설립자의 장남이며 재단의 ‘실세’로 여겨지는 인물.

“세종호텔에서 주명건은 해리포터에 나오는 볼드모트 같은 존재거든요.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금기시되는 사람. 그런데 그런 사람을 국정감사 증인으로 세운 거예요. 대법원 판결이 끝나고 나서도 우리가 계속 투쟁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고, 교섭 자리도 만들었고, 주명건까지 불러냈고, 지금껏 우리 노조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을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은 결국 이 두 글자에서 끝나야 한다. ‘복직’.

 

더 오랜 시간 끝없는 투쟁을 해온 사람들에게도 ‘끝’은 있었다. 언젠가 세종호텔 해고자들에게도 “거짓말같이” 끝이 올 거라고 허지희는 믿고 있다.

“해고자들은 똑같은 생각을 할 거예요. (꿈이 있다면) 일상으로 돌아가는 거죠. 더 이상 ‘해고자 허지희’로서 살지 않는 것. 더 이상 마이크도 쥐고 발언도 안 해도 되고, 원고 투고도 안 해도 되고, 손피켓도 좀 그만 만들고…… ‘해고자 아닌 허지희’로 살아가는 것.”

 

지난봄엔 깃발을 들고 행진하는 길에서 벚꽃을 봤다. 비처럼 흩날리는 꽃잎을 보며 감탄하기도 잠깐. ‘아이고 올해는 벚꽃 구경을 여기서 하는구나’ 서글픈 생각이 들었단다.

 

봄에는 벚꽃 보고, 여름엔 피서 가고, 가을엔 단풍 보고, 겨울엔 눈 구경 다니는 것. 누군가에겐 하나 특별할 것 없는 소박한 일상이, 누군가에겐 4년째 마음에만 품고 있는 꿈이다.

 

작은책 11월호가 인쇄되기 전에 이 글의 끝에 사진 한 장을 더 추가하게 되기를 바란다. 설악산 대청봉 단풍을 배경으로 찍은 ‘해고자 아닌 허지희’의 사진을.

 

- 월간 <작은책> 2025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