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고요한 사람이다. 오래 듣고, 천천히 생각하고, 나직이 말한다. 남을 공격하는 말, 자신을 포장하는 말을 그는 잘 할 줄 모른다. 대신 위안의 말, 이해의 말, 겸손의 말을 주로 입에 담는다. 내가 기자로서 만나온 김정덕 ‘정치하는엄마들’ 활동가는 그런 사람이다.
정치하는엄마들은 ‘엄마들의 직접정치’를 표방하며 2017년 만들어졌다. ▲모든 엄마가 차별받지 않는 성평등 사회 ▲모든 아동의 권리가 보장되는 복지사회 ▲모든 생명이 폭력 없이 공존하는 평화사회 ▲현재와 미래 세대의 환경권을 옹호하는 생태사회를 만들어간다.
2018년 사립유치원 비리 사태를 통해 정치하는엄마들의 ‘대활약’을 목격한 사람들이 많을 거다. 이들은 그밖에도 ‘민식이법’으로 대표되는 어린이 생명안전 운동, 스쿨미투 운동, 교육․보육 공공성 강화 운동, ‘아기기후소송’ 등으로 꾸준히 ‘존재감’을 높여왔다.
김정덕 활동가는 창립 때부터 활동을 시작해, 공동대표와 상근활동가로 지금까지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8월 24일 서울 동작구에 있는 정치하는엄마들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엄마’가 되기 전 그는 무역회사 관리직으로 일했다. 그는 그 시절의 자신을 “주변을 잘 못 돌아보고, 야근 많이 하고 일만 알던 사람”(2019. 3. 18. 베이비뉴스)이라 말했다.
2014년 4월. 임신 사실을 안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텔레비전에선 배가 기울고, 가라앉고, 그러다 완전히 바다 아래로 사라지는 장면이 며칠 동안 생중계됐다.
“이런 세상에서 내가 아이를 낳아도 되는 걸까? 아이가 태어나도 되는 걸까? 굉장히 혼란스러웠어요. 아무 잘못 없이 세상을 떠나게 된 아이들도 다 나 같고, 그 아이들을 찾으면서 울고 있는 사람들도 다 나 같고…. 나랑 하나도 다를 게 없는 것 같았어요.”
그해 말 아이가 태어났다. 하지만 바로 해외근무를 나가야 했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을 아이와 떨어져 지내고, 1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떨어져 지낸 시간만큼, 더 잘해주겠다고 단단히 각오를 다졌다. 잠시 일을 그만두고, 두 돌이 된 아이와 함께 지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포부(?)가 무색하게도, 아이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제가 완전히 재사회화되는 것 같았어요. 지금까지 제가 해왔던 일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완전히 다른 세계가 열린 거예요. 제가 일하던 사회와, ‘육아’라는 세계는 너무 동떨어져 있고, 제 자아가 분리되는 것 같았어요.”
얼마 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낼 수 있게 됐다. 아이가 등원하면 파트타임 일을 했다. 하원시킬 때는 놀이터에 들러 놀았다. 어느 날, 그동안 보이지 않던 ‘풍경’ 하나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놀이터를 둘러싸고 서서, 노는 아이들 지켜보는 ‘엄마들’이었다.
“그동안 왜 이 사람들이 안 보였지? 내 눈에 안 보이던 이 사람들은, 제가 기존에 살던 회사라는 삶에 있던 사람들이 아닌 거예요. 이제 나도 ‘내 눈에 안 보이던 사람들’이 됐구나. 내가 엄마가 됐다고 느낀 건, 그날 놀이터를 둘러싼 엄마들을 만나고 나서였어요.”
처음 엄마가 된 사람들이 거의 공통적으로 겪는 ‘고립감’. 김 활동가도 그랬다. 어디서도 배운 적 없는 육아라는 세계. ‘맘카페’ 정보에 매달리는 것으로는 해결이 안 됐다. 포털사이트에는 수많은 뉴스들이 떴다 사라지지만, 엄마의 삶과는 동떨어진 얘기들이었다.
사회는 아이 낳을 때만 “애국한다”고 격려하지만, 정작 아이를 낳고 보면 모르쇠로 돌변합니다. (…) 길고 긴 노동시간 때문에 일과 육아를 병행하기 어렵고, 버티다 못해 사표를 쓰면 ‘경단녀’가 되어 영영 사회와는 이별입니다.(정치하는엄마들 홈페이지 소개글 일부)
‘사람 노릇’ 하려면 직장에서 일을 해야 한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는 생각했다.
‘지금 내가 이렇게 아이를 돌보고 있는 건 사람 노릇이 아닌가?’
엄마로 살아가는 시간이 점점 길어질수록, 보이지 않던 장면이 보이고, 하지 못했던 생각을 하게 됐다. 시야가 넓고 깊어졌다. 오히려 아이를 키우면서 ‘사람 노릇’을 배워갔다.
“뭘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우리 아이만 이렇게 보고 있다가, 점점 다른 아이들이 보이고, 또 그 아이의 옆에 있는 엄마라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정치하는엄마들 창립을 주도한 건 장하나 전 국회의원이다. 하지만 원래 김정덕 활동가는, 장하나라는 국회의원이 있는 줄도 몰랐다. 정치에는 “너무너무”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김영하 작가님이 장하나 의원 후원회장을 하고 계셨어요. 제가 좋아하는 작가가 후원회장을 한다기에 ‘장하나가 누구지?’ 하고 SNS 팔로우만 하고 있었던 거예요.”
인연은 그렇게 사소하게(?) 시작됐다. 덕분에 장하나 ‘언니’가 ‘엄마정치’를 주제로 연재하던 칼럼들을 접할 수 있었다. 칼럼을 통해 제안한 만남에 몇몇 ‘언니들’이 응답했다. 몇 번의 준비모임을 거쳐, 2017년 6월 11일 창립총회가 열렸다. 김정덕 활동가도 이날 아이와 함께 참석했다. 김 활동가는 그 자리의 풍경을 ‘충격’이라는 단어와 함께 묘사했다.
“아이들이 막 뛰어다니는 거예요. 뒤에 돗자리가 다 깔려 있고, 아이들은 놀고. ‘언니들’은 앞에서 막 총회를 진행하고 있고…. 아이들이 뛰놀고 엄마한테 왔다 갔다 해도, 누구도 방해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죠. 누구도 엄마를 탓하거나 아이를 탓하지 않아요. 해방감이라 할까요? 그런 광경을 처음 봤어요. ‘이래도 되는구나’ 정말 충격 받았어요.”
참석한 사람들에게 마이크가 돌았다. 각자 이 자리에 왜 왔는지, 자기 이야기를 쏟아냈다. 김정덕 활동가도 마이크를 잡았다. 혼자 아이를 키우며 힘들었던 이야기, 세상이 이런저런 걸 해줬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들을 하고 자리에 앉으니, 한 ‘언니’가 그에게 말했다.
“언니가 그걸 하시면 돼요!”
그 말이 김 활동가에게는 “우리가 바라는 건 다 우리가 할 수 있어!”라는 소리로 들렸다. 정치가 바뀌어야 한다면, 우리 엄마들이 직접 정치를 바꿀 수 있다는 다짐과 믿음의 말.
그때부터는 늘 ‘언니’들과 연결돼 있다는 생각에 든든했다. 대부분 낮에는 일과 육아로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고, 아이가 잠들고 나면 온라인 채팅방으로 들어와 이야기했다. 아픈 아이를 간호하느라 잠들지 못하는 밤에도, ‘혼자’라는 생각은 더 이상 들지 않았다.
“그 새벽에 깨서도 외롭지가 않은 거예요. 나만 이렇게 힘든 게 아니야, 어딘가 나처럼 이런 시간을 보내는 엄마들이 있어, 그 자체만으로도 굉장히 큰 힘이 됐어요.”
정치하는엄마들 회원들은 서로를 ‘언니’라고 부른다. 성별도, 나이도 상관없이 모두 언니라 부르고 존댓말을 쓴다. 언니들은 다양하게 이어지고 뭉쳤다. 활동기구(소모임) 구성은 누구든 먼저 제안할 수 있다. 정책모임은 물론, 자조모임과 지역모임도 만들어졌다.
김정덕 활동가는 언니들과 함께 기자회견도 나가고 토론회도 나갔다. 언론 인터뷰에 응하거나 직접 글을 기고하는 일도 생겼다. ‘연대단체’라 부르는 다른 시민사회 단체 사람들과도 어울렸다. 그의 이름 뒤에 ‘활동가’란 호칭이 붙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저는 사실 ‘활동가’라는 직업이 있는 것도 언니들을 만나고 나서야 알았어요. 정말 대단하다! 이런 사람들이 있어서, 이 사회가 더 이상 무너지지 않고 있었구나.”
정치하는엄마들 활동을 한 지 2년도 되지 않은 2019년 2월, 그는 공동대표로 선출됐다. 이른바 사립유치원 비리 사태를 지나, 정치하는엄마들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커져 있을 때였다. 역할도 많아졌고 기대도 커졌다. 대표라는 자리를 맡는 데 부담은 없었을까.
“누구든 정치하는엄마들 활동을 할 수 있고, 또 활동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대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대표든 아니든 무슨 차이가 있지? 대표가 아니어도 했을 일이고, 대표여도 했을 일인데’ 그런 생각. 그리고 나 혼자가 아니고 언니들이 있어 가능한 일이니까.”
이런 생각을 한 데는 정치하는엄마들의 특별한 분위기가 한몫했다. 정치하는엄마들의 언니들은 대부분 돌봄을 책임지는 사람들. 아이나 부모가 아프면 ‘보호자’로 그 곁을 지켜야 하는 사람도 대부분 엄마들이다. 약속한 활동에 함께하지 못하는 날도 그만큼 많았다.
“우리는 누군가를 돌보고 있는데 항상 누군가가 아파요. 아이가 아프든, 부모가 아프든, 아니면 언니들이 아프든. 그러면 다들 ‘언니는 지금 이걸(활동을) 할 때가 아니고 언니를 돌봐야 돼요’ 이렇게 얘기하거든요. 다 이해해요. 지금 다른 사람이 겪고 있는 어떤 문제가, 나한테도 언제든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내가 못하면 다른 사람이 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이 못하면 내가 할 수도 있고. 내가 이걸 해야 하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서로의 짐을 더는 거죠. 미안해하지 않고, 언제든 또 같이 할 수 있도록.”
김정덕 활동가는 ‘엄마정치’의 시작을 ‘연결’의 가치에서 찾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시대를 건너오면서, 연결의 중요성을 더 간절히 느끼게 됐다. 어쩌면 어떤 사회적 이슈에 대해 빠르게 목소리를 모아내는 활동보다 더 중요한 게 바로 ‘연결’이었다.
“코로나 때 굉장히 필요했던 게 심리적 지지대, 심리적 안전망이었어요. 우리가 그런 연결망이 되면 어떨까 싶었어요. 뭔가 내 이야기를 했을 때 반응이 있다는 것 자체가 위안이 되니까요. 결국 그런 연결의 효능감이 정치로도 연결되지 않을까요? 우리가 어떤 목소리를 낼 때, 사회적으로 화답이 오면 효능감을 느끼고 덜 고립되잖아요.”
그렇게 연결된 언니들이 사회와 지역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다. 아이가 다니는 학교의 운영에 참여하거나, 마을의 통학로와 놀이터를 개선하거나, 위기상황에 놓인 이웃의 권리를 위해 연대한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깃발’처럼 싸우고 있다.
“언니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굉장히 분투하고 있어요. 작은 싸움들이죠. 저는 언니들이 깃발 같다고 생각해요. 거기서 그렇게 신호를 주고 있는 거라고. 언니들이 어디에서든 우리의 의제를 가지고 싸우고 있으니까, 또 다른 사람들이 언니들을 보고 찾아오기 쉬울 거예요.”
지난해 8월 정치하는엄마들은 김기현 당시 국민의힘 대표를 고발한 적 있다.
정치하는엄마들과 더불어민주당이 함께 주최한 후쿠시마 핵 오염수 관련 간담회에 ‘어린이 활동가’들이 참여했다. 그걸 보고 김 전 대표는 “어린 초등학생들을 민주당의 정치투쟁에 불쏘시개 역할을 하는 ‘활동가’로 소개하는 장면에서는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며, ‘전위부대’, ‘홍위병’ 등의 표현으로 어린이들을 모욕했다.
“어린이들이 본인의 목소리를 냈다는 이유만으로 입에 담지 못할 말들을 쏟아낸 야당 대표도 있었잖아요. 어린이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고 하는데, 그걸 이용한 자들은 따로 있거든요. 정작 자신들이야말로 어린이를 이용의 대상으로만 보고 있기 때문에 그런 발언을 할 수 있는 거잖아요. 양육자들은 알고 있어요. 어린이들이 얼마나 주체적인 인간인지.”
정치하는엄마들은 서울시 성평등상 대상, 6월민주상 대상, 어린이안전대상 행안부장관 특별상, 오체투지 생활실천부문 특별상, 박영숙살림이상 단체상, 언론인권상 특별공로상 등 수많은 상을 받으며 사회적으로 역할을 인정받고 있다.
누군가의 헌신 없이 이런 성과가 날 리 없다. 모든 ‘언니’들이 다 부족한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힘을 보탰겠지만, 상근활동가들의 어깨가 조금 더 무거운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김정덕 활동가는 2년의 공동대표 임기를 마친 뒤에도 지금까지 상근활동가로 살고 있다.
그에게도 ‘퇴근’이 따로 없었다. 낮 동안 정신없이 활동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또 돌봄노동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를 재우고 나서 컴퓨터 앞으로 다시 출근하는 날이 많았다. 밤새 집에서 기자회견 준비를 하고 아침에 바로 기자회견장으로 달려간 것도 여러 날이다. 언제 어디서든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건 기본이다.
수면부족과 피로누적. 결국 지난해 ‘넉다운’ 되고 말았다. 코끝부터 오른쪽 눈까지 대상포진이 찾아온 것.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 때문에 아무것도 보지도 읽지도 못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의지로 해결할 수 없는 통증 앞에 ‘강제 휴가’를 보내게 됐다.
“한번 호되게 당해봐야 아는 것 같아요. 나도 ‘오프(off)’가 필요하구나. 그다음부터는 몸에서 신호가 오면 ‘안 돼, 여기서 멈춰야 돼!’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게 됐어요.”
아이들과 놀듯 숨 쉬듯 자연스러운 일상의 정치를 이어가도록 하겠다.
2019년 김 활동가의 공동대표 취임사 한 대목이다. 그 마음은 지금도 여전하다.
“내 생각은 어떤지, 네 생각은 어떤지 나눌 기회를 잘 갖고 있나? 그게 어렵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내 생각과 네 생각을 나누는 일, 결국 거기서 시작하는 게 정치 같거든요.”
활동을 하며, 우는 날이 많았다. 2019년 봄, 어린이생명안전법안 운동을 막 시작할 때도 그랬다. 죽은 아이의 이름으로, 살아 있는 아이를 지키자는 슬픈 이름의 법들이 만들어지던 때.
그날 기자회견 사회는 김 활동가의 몫이었다. 회견장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기자회견문을 먼저 읽다가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장하나 언니에게 연락해 “언니, 저 너무 눈물 나요. 기자회견 사회 봐야 되는데 어떡해요?”라고 말했다. 장하나 언니가 대답했다.
“언니, 그냥 우세요.”
그에게 정치란 같이 우는 것, 같이 사는 것, 죽지 않고 같이 잘 사는 것이다. ‘애도’는 그의 힘이다. 가라앉는 세월호를 힘없이 바라보고 있던 날들을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오늘도 우리가 살리지 못한 이름들을 부르며, 우리가 지켜야 할 아이들을 껴안는 중이다.
“같이 살고 싶다, 죽지 않고 잘 살고 싶다는 생각도 자주 해요. 그러려면 혼자는 너무 힘들고 많은 사람들이 같이했으면 좋겠는데, 그런 과정을 만들어가는 게 정치가 아닐까. 뉴스에서 보여주는 정치가 참담하다면, 그 꼴을 바꿀 수 있는 것도 결국은 나랑 곁에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나 혼자 가면 무섭고 힘드니까, 한 명이라도 두 명이라도 같이 가자고 목소리 낼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어요. 놀듯 숨 쉬듯 자연스럽게,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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