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사람들”이 합창을 한다. 학교 교실 크기 절반이나 될까. 좁은 도서관에 남녀노소 30여 명이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여기는 경기 광주시 퇴촌면에 있는 베짱이도서관.
세월호 참사 ‘10년’을 딱 열흘 앞둔 날. <홀 - 어느 세월호 생존자 이야기>(2021) 북콘서트가 열렸다. 책의 주인공인 ‘세월호 파란 바지의 의인’ 김동수 씨와 부인 김형숙 씨,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만화로 그린 김홍모(53) 작가가 나란히 자리했다.
세 시간 가까이 이어진 이야기와 노래. 다정함 넘치는 자리가 마무리 된 뒤, 김홍모 작가와 따로 마주 앉았다. 역시나 첫 번째 이야기 주제는 <홀>과 세월호가 될 수밖에 없었다.
기울어가는 세월호에서 마지막까지 학생들을 구하기 위해 애쓰던 김동수 씨. 그는 살아남은 죄로, 더 많은 사람을 구하지 못한 죄로 지독한 트라우마를 겪었다. 구조하지 않은 책임, 진실을 밝혀야 할 책임, 죽은 자의 넋을 달래고 산 자의 아픔을 껴안을 책임을 대한민국 정부는 외면하고 있었다. 김동수 씨는 죄책감과 울분을 못 이겨 자해를 반복했다.
“동수 님이 국회 앞에서 자해했을 때(2019년), 기사를 하나 봤어요. 의사가, (김동수 씨가) 더 이상 자해하면 목숨이 위험할 거라고 말하는 거예요. 그때는 (<홀> 작업을 언제 시작할지) 갈등하고 있을 때거든요. 더 늦으면 정말 큰일 나겠다 싶은 거예요. 적어도 의로운 일을 한 사람의 마지막이 불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어요. 이분을 살려내고 싶은 마음. 만화를 통해서 이분을 세월호에서 끄집어내서 사람들을 만나게 하고 싶다는 마음이었죠.”
“이 얘기 할 때마다 꼭 눈물이 터져요”라는 말과 함께, 김홍모 작가의 눈에 정말 눈물이 차오른다. 아무리 새로운 오늘을 살아내려 해도, 자꾸만 그날의 끔찍한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김동수 씨. <홀>의 마지막은 그런 김동수 씨를 ‘끄집어 올리는’ 장면으로 끝난다.
‘세월’이란 말은 그랬다. 한번 입에 올렸다가는 마음을 잡아먹혀 버릴 것 같은 말, 마주하기엔 너무 무겁고 두려운 말. 처음엔 김홍모 작가 역시 다르지 않았다. “나는 작업할 때 힘들지라도 독자가 읽을 때는 덜 힘들게 해줘야겠다는 마음”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김 작가는 김동수 씨 가족들을 여러 차례 인터뷰하며, 그들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이해하려 했다.
“장면을 만들려면 내가 하루는 동수 님이 되고, 하루는 형수님(김동수 씨 부인)이 돼야 해요. 그래야 이야기가 나오고 대사가 나오니까, 감정이입을 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혈당이 올랐어요. 운동을 맨날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당뇨 판정을 받은 거예요. ‘왜 그러지?’ 그러고 나서 어찌 됐건 살을 8~9킬로그램쯤 빼고 운동을 더 하면서 혈당이 떨어지고 이제 괜찮다 싶었는데, 이번엔 이명이 온 거예요. 귀에서 왕왕왕왕왕 이렇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생활고까지 닥쳐왔다. 연재 후반 “몸은 아프지, 돈은 없지, 이 난국을 어떻게 타개해야 되나” 하던 와중에, 4․16재단의 문화콘텐츠 공모에서 예술분야 대상을 받았다. 그 상금으로 또 몇 달을 버티면서 결국 연재를 마치고 출간까지 진행할 수 있었다.
김홍모 작가가 직업적인 만화가로 산 지도 20년이 넘었다. 홍익대학교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그는, 대학을 졸업한 뒤 민중미술 창작집단인 ‘그림공장’에서 활동했다. 그리고 2000년대 초반 인터넷신문에 시사만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이 만화가로서의 출발이다.
시사만화를 그리면서 ‘이야기’에 대한 갈증을 느낀 그는 2006년 첫 번째 단행본 만화책, <소년탐구생활>을 선보인다. 그는 여기서 ‘수묵만화’를 처음으로 시도했다. 프랑스에 번역 출간된 <소년탐구생활>을 보고 한 평론가는 “만화가 시(詩)적이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저는 동양화를 전공했으니까 동양화로 만화를 그리면 개성도 있고 종이책에도 잘 어울리고 또 내 이야기에 정말 잘 어울리겠다 싶어서, 최초의 수묵만화를 책으로 냈죠.”
이후 김홍모 작가는 수묵만화에 이어 또 한 번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바로 ‘르포만화’다. 2009년 일어난 용산참사가 계기가 됐다. 김홍모 작가 등 여섯 명의 만화가들은 참사 이면의 ‘사람’ 이야기를 직접 취재해 <내가 살던 용산>(2010, 공저)에 담았다.
“용산참사가 나고, 방송을 보고 충격을 받은 거예요. 철거민 분들이 살려고 올라갔다가 죽어서 내려오신 거니까, 내 이웃이 죽은 것 같고, 그 울분과 분노가 저한테도 전해졌어요. 그런데 그렇게 원통했는데, 한두 달 지나니까 희미해지는 거예요. ‘이렇게 잊히는구나’라는 생각에 스스로 화들짝 놀랐고 약간 무섭더라고요. 그래서 만화 작업을 시작한 거죠.”
작가들은 감옥에 갇혀 있는 분들을 면회하거나 편지로 이야기를 듣고, 참사 현장을 찾아 유가족들에게 직접 이야기를 들었다. 책과 영상 등 자료 취재도 빼놓지 않았다. 르포의 사실성과 만화의 친근함이 훌륭히 결합한 <내가 살던 용산>은 르포만화의 가능성을 각인시켰다.
‘만화의 힘’을 확인한 작가들의 시도는 계속됐다. <떠날 수 없는 사람들>(2012, 이하 공저), <섬과 섬을 잇다>(2014), <빨간 약>(2015)까지, 거의 매년 르포만화 작업을 이어갔다.
그중 <빨간 약>은 “날아가는 새도 ‘종북’ 하면 떨어뜨리던” 박근혜 정권 당시, “우리가 정말 ‘빨간’ 만화 하나 해보자”하는 생각으로 의기투합해 만든 책이다. 책이 나오고 나서 어떤 이는 “이 시대 가장 용감한 예술가는 만화가다”라는 평을 남겼다.
“저는 솔직히 잡혀갈 생각을 했어요. 이 책은 일부러 내가 (대표로) 저자 인사말을 쓰겠다고 했어요. 잡혀도 나 혼자 잡혀야지. 저는 어차피 ‘경험’도 있고…….(웃음)”
여기서 말하는 ‘경험’이란, 그가 학생운동을 하다 잡혀서 1997년 8개월간 영등포구치소 ‘강력누범방’에서 지낸 일을 가리킨다. 그 경험은 만화 <좁은 방>(2018)의 바탕이 됐다.
“전 세계적으로 따져봐도, 만화가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빵’(감방) 생활 한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어요? ‘오케이, 재밌겠네!’ 하고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 게 2009년이에요.”
시작은 호기로웠으나 과정은 순탄치 못했다. 큰 수술도 겪었고, 연재하던 만화잡지가 갑자기 폐간되기도 했다. 종이책은 2018년에야 나왔으니, 거의 10년이 걸린 셈이다.
“주인공 이름을 ‘용민’으로 했죠. 제 이름을 쓰면 너무 개인사 느낌이 날 것 같았어요. 제 얘기에서 출발하긴 했지만, 같은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보편성도 갖고 싶었거든요.”
‘용민’은 ‘좁은 방’에 갇혀 있으면서도 늘 개구쟁이 같은 매력을 잃지 않는다. 하지만, 김 작가가 겪은 현실은 만화에 묘사된 것보다 훨씬 더 무겁고 무서웠다. 1990년대 후반,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을 표적으로 한 학생운동 탄압은 극에 달했다.
김 작가 역시 감옥에 갇혔을 때, 마음 한쪽에서부터 “무너져 내리는 느낌”을 피할 수 없었다. 그를 다잡아준 힘은 ‘사람들’로부터 나왔다. 매일 “편지 읽는 낙으로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응원과 지지를 받으면서 김 작가는 자신을 추스를 수 있었다.
구속된 학생들을 상대로 ‘공작’도 활발했다. 한총련 ‘탈퇴서’나 반성문을 쓰면 무거운 처벌을 피할 수 있다며 양심을 시험했다. 김 작가 역시 고민을 피해갈 수 없었다. 하지만 매일 편지를 보내주는 후배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힘들게 학생운동의 깃발을 지키고 있는 후배들을 볼 낯이 없었다. “내가 먼저 무너지면 안 되니까” 반성문을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문제는 아버지였다. 부모라면 당연히, 자식이 반성문을 쓰고 감옥에서 나오길 바라지 않겠나. 면회를 오신 아버지께, 반성문을 안 쓰겠다고, 끝까지 싸우겠다고 말씀드려야 했다.
“반성문 안 쓰겠다 말씀드리는 거, 그게 제일 힘들거든요. 근데 아버지가 딱 그러셨어요. ‘네가 뭘 잘못했다고 반성문 쓰냐? 쓰지 마라.’ 교도관이 받아 적다가 깜짝 놀랄 정도였죠. 그런 부모님이 없거든요. 아버지가 정말 대단하시죠. 그 말씀이 많이 힘이 됐어요.”
아버지께는 ‘비밀’이 있었다. 김 작가가 나고 자란 곳은 경기 연천. 말 그대로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이었다. 아버지는 ‘과거’ 얘기는 좀처럼 하지 않으셨다. 전남 순천에서 손꼽히는 부잣집이었다는 얘기만 스치듯 들었을 뿐. 보증을 잘못 서서 망한 줄로만 알았다.
김 작가가 삼수 끝에 홍익대 미술대학에 입학했을 때, 아버지는 뜻밖의 이야기를 하셨다.
“홍모야, 너 순천 본가 한번 가볼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찾아간 아버지의 ‘옛집’은 그야말로 고래등처럼 으리으리했다. 아버지는 보증을 잘못 서서 망하신 게 아니었다. 아버지에게도 신념을 위해 청춘을 바치던 시절이 있었다. 꼭 김홍모 작가의 젊은 날이 그랬던 것처럼. 남쪽 끝 순천에서 북쪽 끝 연천까지 도망치듯 떠나온 데는 어떤 ‘정치적’ 이유가 있었음을 나중에야 알게 됐다.
“제가 태어났을 때 어머니 젖이 안 나왔어요. 분유 살 돈이 없어서 동냥젖을 먹고 자랐거든요. 형들은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서 다 살아봤는데, 막내인 저만 비 오면 물 새는 집에서 태어나서 엄마 젖도 못 먹고 자랐으니, 그래서 형제들이 저를 좀 안쓰러워했던 것 같아요.”
어린 시절, 가난에 상처받는 일은 많았지만 가난에 짓눌려 살진 않았다. 그에겐 ‘히어로’가 있었다. 그보다 먼저 만화가의 길을 걸었던 큰형, 김하늘(본명 김홍익) 화백이다.
김하늘 화백은 10대 후반부터 ‘독고탁’으로 유명한 이상무 화백의 문하생으로 만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상무 화백 작품의 작화를 전담하기도 했고, 1983년 데뷔한 뒤로는 <아픔을 겪는 시절> 등 주로 가난한 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가슴 따뜻한 작품들을 발표했다.
“어릴 때 ‘형이 만화가다’, 이건 엄청난 자랑이죠. 초등학교 때부터 가난 때문에 받은 상처들이 꽤 컸어요. 근데 집에 와서 <달려라 꼴찌> 이런 만화를 보면 정말 많이 위로가 됐어요. 그런데 우리 형이 그런 만화를 그려! 저한테는 히어로였죠. 형이 정말 멋있었어요.”
그때부터 자신도 만화가가 되겠다 마음먹었다. 그 시절 큰형의 작업실은 김홍모 작가에게 ‘보물섬’이었다. 일 때문에 서울을 오가는 일이 많았던 큰형이 작업실을 비우면, 몰래 문을 따고 들어가 보기도 했다. 그러다 호기심을 못 참고 ‘사고’를 치고 말았다.
“초등학교 5학년쯤 됐을 땐가, 형 (만화) 원고를 너무 해보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형 없을 때 제가 펜터치를 해버렸어요. 나중에 엄청 혼났죠. 그런데 혼내고 나서, 형이 알바를 시켜줬어요. 지우개질부터 시작해서 까만색 칠하는 것도 하고. 한 장에 10원인가 돈도 받았어요. 저는 몰랐는데, 문하생으로 있던 사람들한테 제 자랑을 그렇게 하셨대요.”
열여덟 살 터울이 지는 아버지 같은 큰형의 애틋했던 막내 사랑은, 애석하게도 세상을 떠난 뒤에야 동료들의 입을 통해 동생에게 전해졌다. 김하늘 화백은 2011년 별세했다.
가난한 어린 시절 행복하게 보낼 수 있었던 건 형님의 만화 덕분이었죠. 제가 만화가가 된 것도……. 지금은 ‘김하늘’(김홍익)이라는 만화가를 기억하는 이가 거의 없지만 제겐 형님의 작품이 최고였습니다.(김홍모 작가가 쓴 부고 일부)
김홍모 작가는 2012년 제주도로 이주했다. 제주도 동쪽 시골 풍경은 연천 고향 마을과 비슷했다. 산이 낯익고, 물이 닮고, 돌담이 친근한 곳으로 마음도 몸도 향했다.
제주도에 살면서 자연스레 이곳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관심이 자랐다. 제주 신화 이야기를 담은 어린이 만화 <심마>(2018)에 글 작가로 함께한 데 이어, 일제강점기 해녀항쟁과 해방 이후의 4․3항쟁, 그리고 오늘날의 강정마을 투쟁으로 이어지는 ‘항쟁 3부작’을 기획했다.
그중 첫 번째는 4․3항쟁을 소재로 한 <빗창>(2020)이다. 김홍모 작가는 4․3이 ‘사건’으로 불리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단순히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당한 사건”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민중들의 항쟁”으로 기록돼야 한다는 마음을 <빗창>에 담아냈다.
<빗창>은 동백작은학교 청소년들에 의해 뮤지컬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새로운 세대들이 그들만의 방식으로 4․3항쟁을 해석하고 기억하는 데, <빗창>은 훌륭한 길잡이 역할을 해냈다.
김홍모 작가는 지난해 말, 항쟁 3부작 중 두 번째인 <소요>를 선보였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제주에서는 238차례의 시위로 이어지는 해녀들의 항일투쟁이 있었다. 참가 연인원이 1만 7000여 명에 이르는 대규모 항쟁이었다. 한국사뿐 아니라 세계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여성 대항쟁’. 하지만 오늘날 그 역사를 입에 올리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와 민주주의 역사, 여성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지점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멋진 여성의 역사가 존재했다는 걸 알면, 후손들의 심장이 뜨거워지지 않을까요? 이런 책은 모든 학교에 배포가 돼야 되는데…….(웃음)”
김홍모 작가는 울기도 잘 울고, 웃기도 잘 웃는 사람이다. 그의 작품에서 ‘웃음’은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너무 진지하고 무거운 이야기가 이어진다 싶은 순간, 어김없이 팡 하고 터지는 웃음. 그의 말이나 글에서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세월호 참사 생존자 김동수 씨 가족의 고통을 이야기하는 와중에도 그는 웃음이 필요한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이렇게.
첫째 딸 예람 씨는 언론과 인터뷰를 절대 하지 않았는데, 다행히 나와의 인터뷰는 허락을 해줬다. 아마도 내가 인상 좋고 잘생긴 만화가여서가 아닐까 싶다.(2022년 작은책 생활글 공모 ‘작은책상’ 수상작, 김홍모 작가의 <다정한 시> 중)
그가 웃음의 힘을 새삼 확인한 때가 있었다. 용산참사 유가족들을 인터뷰할 때였다. 유가족 중 한 사람, 유독 많이 웃는 사람이 있었다. 김 작가가 조심스레 그 이유를 물었다.
“그분 말씀이……, 좀 눈물이 날 것 같은데……, ‘웃으니까 힘이 난다. 웃지 않으면 못 싸운다’ 하는 말씀이 확 와닿았어요. ‘아, 이분들은 살기 위해서, 투쟁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웃는구나.’ (가슴 아픈 이야기를) 만화로 그리는 저도 당연히 힘들죠. 그래도 웃는 장면을 넣고 싶은 거예요. ‘그렇지만 힘내자, 힘내서 앞으로 나아가자.’ 이런 이유죠.”
만화가로 살아온 22년의 세월. 그는 지난 시간을 잠시 돌아보며 “다정한 사람들”의 존재를 떠올렸다. 그가 지금까지 만화가로 살 수 있던 건 그의 만화를 봐주고 함께해준 “한 분 한 분의 지지와 연결 없이는 불가능”했던 “기적처럼 감사한 일”이라는 말이다.
만화를 통해 어른과 어린이를 잇고, 시대와 진실을 잇고, 역사와 사람을 이어준 김홍모 작가. 앞으로도 그와 “다정한 사람들”이 만들어갈 기적 같은 이야기들을 기대한다.
- 월간 <작은책> 2024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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