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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처럼 음악처럼 사라진 형… 남은 건 색소폰과 ‘의혹’들 [사라진 이등병의 편지]

긴 글/인터뷰와 현장기사

by 최규화21 2024. 5. 10.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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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소리 들리면 떠오르는 모습/ 달처럼 탐스런 하얀 얼굴/ 우연히 만났다 말없이 가버린/ 긴 머리 소녀야/ 눈먼 아이처럼/ 귀 먼 아이처럼/ 조심조심 징검다리 건너던/ 개울 건너 작은 집의/ 긴 머리 소녀야(‘긴 머리 소녀’ 노랫말 중, 둘다섯, 1974년 발표)

 

형은 마을의 ‘연예인’이었다. 텔레비전도 흔치 않던 그 시절, 작은 시골 마을 사람들에게 형의 색소폰 연주는 언제나 최고의 인기 공연이었다. 찬송가부터 대중가요까지 레퍼토리도 다양했다. ‘긴 머리 소녀’도 그중 하나. 그 노랫말처럼 “말없이 가버린” 형은 “빗소리 들리면 떠오르는 모습”으로 동생 강순구(67세)의 마음속에 아직도 남아 있다.

 

그와의 인터뷰는 지난 4월 11일 대전 서구 월평동에서 이뤄졌다. 첫 질문부터 잠깐, 강순구의 눈이 젖는다. 그에게 ‘형’이라는 단어는 그렇게 아프고, 시리고, 무거운 말이었다.

 

강순구의 하나뿐인 형 강의구(1955년생)는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두 살 터울의 바로 아래 동생이 강순구다. 그들이 나고 자란 곳은 전남 광산군 동곡면 유계리(지금의 광주 광산구 유계동). 군청 공무원이었던 아버지 덕분에, 부족함을 모르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저희 작은아버지들이 양계장을 했어요. 닭 사료로 주려고, 형하고 개구리나 메뚜기 같은 걸 많이 잡으러 다녔어요. 형하고 같이 들판으로 돌아다니던 생각이 많이 납니다. 그런 걸 잡아서 오면 작은아버지들이 잘했다고 운동화도 사주셨어요. (다른 친구들은) 고무신도 떨어진 것 신고 다니던 시절이었는데, 덕분에 운동화도 신고 다니고 재미있었죠.(웃음)”

 

그 시절 형제 많은 집 장남들은 꼭 아버지처럼 엄하게 동생들을 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의구는 쾌활하고, 정 많고, 든든한 모습으로 동생 강순구의 기억에 남아 있다. 특히 강순구와 형의 사이는 더 각별했다. 강순구가 바로 아래 동생이라 더 가깝게 지내기도 했고, 중학교 이후부터는 둘이서 방을 얻어 같이 자취를 하며 광주에 있는 학교를 다니기도 했다.

“주변에 친구들도 많고, 성격도 참 정이 많았어요. 동생들한테도 애틋하게 잘해주고, 동네에서 놀다가 친구들하고 싸움이 나면 형이 와서 혼내주고.(웃음) (장남이라고) 엄하게 대하지 않았어요. 모르겠어요. 나중에 그렇게 빨리 가려고 그랬는지, 동생들한테 참 잘해줬어요.”


장남인 강의구에게 집안 어른들은 큰 기대를 걸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이름을 날리고 출세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가 타고난 재주는 따로 있었다. 바로 ‘음악’이었다.

 

강의구는 어릴 때부터 기타나 퉁소 같은 악기들을 곧잘 다뤘다. 그러다 마침 밴드부가 있는 중학교로 진학하게 됐다. 그에게 운명처럼 찾아온 기회. 그렇게 밴드부의 일원이 돼서 음악을 시작했다. 고등학생이 돼서도 밴드부 활동은 계속 이어졌다. 이때 색소폰을 본격적으로 배워서 연주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는 지휘도 맡아서 했다.

“할머니 회갑 때인가 학교 밴드부가 다 같이 와서 연주를 해줬어요. 시골에는 명절 때가 되면 콩쿠르 대회라고 장기자랑을 합니다. 항상 거기 와서 반주를 해줬어요. 찬송가도 많이 연주하고, 유행가는 그 시절에 인기 있던 ‘긴 머리 소녀’ 이런 것도 들려주고요.”

 

처음에는 음악 활동을 반대하시던 부모님도 강의구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 하지 않나. 지금이나 그때나 악기는 그 값이 만만치 않다. 하지만 강의구의 의지가 워낙 강하다 보니, 나중에 부모님은 비싼 수입 악기까지 사주며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다.

“제가 보기에도 굉장히 잘했던 것 같아요. 형이 색소폰을 이렇게 들고 연주할 때 보면 정말 멋져요. 그러면서 저한테 ‘너는 절대 이거 만지지 마라, 너는 공부해야지’ 그러셨어요. 지금이야 예술가라 부르지만 옛날에는 ‘딴따라’라고 했잖아요. 저는 악기를 절대 만지지도 못하게 해서, 저는 (형과 달리) 음악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고 자랐어요.”

 

강의구는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업적인 연주자의 길을 걸었다. 전남 목포에 있는 클럽에서 색소폰 연주자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당시에는 미군부대나 클럽 등에서 활동하다가 정식 데뷔의 기회를 얻게 되는 연주자와 가수들이 많았다.

 

그렇게 2년의 시간을 보내고, 강의구는 피할 수 없는 시간을 맞이했다. 바로 군 입대였다. 1976년 1월 5일 강순구는 기차역에서 입영열차를 타는 형을 배웅했다. 동생은 열차 밖에서, 형은 열차 안에서 서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게 마지막 인사인 줄도 모르고.

 


그해 3월 3일 강의구는 서울 노원구에 있는 육군사관학교 근무부대 군악대에 색소폰 연주병으로 전입했다. 육사 안에는 생도들뿐만 아니라 다른 근무부대 병사들도 많이 있었다. 군악대는 대표적으로 육사 입학식과 졸업식 등 각종 행사에서 연주하는 일을 했다. 자신이 무엇보다 좋아하는 일을 맡게 됐으니 잘 적응할 수 있을 거라 가족들은 마음을 놓았다.

 

하지만 불과 두 달 남짓 지난 5월 18일. 강순구가 평생 잊을 수 없는 그날이 모두의 운명을 뒤흔들어 놓았다. 우산 없이 집에 오던 날. 인생의 우산 하나가 사라진 날이었다.

“그때 저는 대학교 1학년이었어요. 학교 끝나고 집에 오는데, 그날 비가 엄청나게 왔어요. 큰 도로에서 차를 내려서 집까지 가려면 한 20분은 걸어야 돼요. 우산을 못 가지고 와서 비를 추적추적 맞고 걸어갔는데, 동네 앞에서 아버지하고 작은아버지하고 집안 당숙 한 분하고 이렇게 세 분이 나오시더라고요. 길에서 마주쳐서, 어디 가시냐 여쭤봤더니 아버지는 아무 말씀을 안 하세요. 그러다가 당숙께서, 형이 죽었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형이 죽어요?’ 그렇게 되물으면서 순간 까무러쳤어요. 저는 그거밖에 생각이 안 나요.”


정신을 차려보니 그는 집에 누워 있었다. 누군가 그를 업고 집까지 옮긴 모양이었다. 아버지와 집안 남자 어른들은 서울로 황급히 길을 떠났다. 어머니 혼자 집에 남아 눈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고모 집에 가 계시던 할머니도 소식을 듣고 집으로 오셨다. 정말인가. 정말 형이 죽었나. 강순구는 믿을 수 없었고, 또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1976년 5월 18일 오후 2시경, 강의구는 부대 안 창고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오후 1시부터 군악대 합주 연습을 하고 잠시 쉬는 시간이 있었는데, 쉬는 시간이 끝나도 강의구가 연주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작업도구를 정리하러 창고에 들어간 동료들이 그를 발견한 것.

 

당시 헌병대는 매화장보고서, 사망확인서 등을 근거로 ‘단순 자살’ 사건으로 수사를 종결했다. 그의 죽음은 ‘단순 복무염증으로 인한 자해사망’으로 기록됐다. 그걸로 끝이었다.

어떤 지휘관이 시신 처리를 빨리 안 한다고 짜증을 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화가 나서 ‘사람이 죽었는데 그게 할 소리냐’라며 말다툼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망인(강의구)의 시신을 확인한 날 바로 화장처리 하였고, 18일에 사망하였는데 19일에 서울시립화장장에서 화장했습니다.(당숙 강○○, 군사망사고규명위 진술 중)

 

매화장보고서(1976. 5. 26.)에는 당시 시신에서 “전투복 상하, 훈련화, 전투모, 런닝구, 빤스, 백색 도복끈, 현금 3000원, 개인수첩, 인식표 및 줄”이 발견됐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가족들은 아무 유품도 가져오지 못했다. 죽은 지 하루 만에 화장한 형의 유골을 육사 뒷산에 뿌렸다.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입을 굳게 닫았다. 집안이 온통 침묵의 바다가 됐다.

 

슬픔은 가슴에 묻고 원망은 속으로 삭이는 수밖에 없었다. 형이 남들처럼 모질지를 못해서, 너무 착하기만 해서 그랬을 거라 막연히 짐작할 뿐이었다. 군대 가서 죽으면 개죽음이다, 죽은 사람만 억울하다, 하는 생각들이 흔하던 때였다. 서슬 퍼런 권력 앞에 개인의 존엄은 손쉽게 무시되던 시대.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었고 뭐라 항의할 힘도 없었다.

“어머니가 하도 많이 울고 넋 나간 사람처럼 계서서, 제가 앞으로 잘 모실 테니까 걱정 마시라고 계속 말씀드렸어요. 이미 엎질러진 물이잖아요. 형만 살아서 돌아온다면 제가 정말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그렇지만 이미 세상 떠난 사람을 다시 살릴 방법이 없으니까, 부모님을 챙기기 위해서라도 (삭이고) 살아야 했어요. 저까지 ‘이거 억울해서 되겠습니까? 어디라도 찾아가 봅시다’ 이렇게 나갔으면 부모님은 더 많이 힘드셨을 수도 있겠죠.”

 

속으로 삭이겠다 마음먹었다고,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사람 하나를 마음에서 지우는 일인데. 입영열차에 올라 잘 다녀오마 손 흔들던 모습이 생생한데, 죽은 형의 모습을 보지도, 형의 뼛가루 한 줌 만지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그 죽음을 믿을 수 있을까.

“형이 항상 꿈에 살아 있는, 살아 있는 모습으로 이렇게 와요. 그래서 형이 살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만나서 ‘형 언제 왔어?’ 하고 옛날처럼 재밌게 놀다가 깨보면 꿈이고…. 한 20년 정도는 계속 그런 꿈을 꿨어요. 형이 꼭 살아 있을 것 같고, 오늘 돌아올 것도 같고 그랬어요. (형의 죽음을) 제가 눈으로 직접 확인 못해서 더 그런 것 같아요.” 

 

동생의 마음이 이랬는데, 어머니의 마음은 또 오죽했을까. 그 뒤로 어머니는 눈에 띄게 건강이 나빠지셨다. 그 충격 때문일까. 어머니의 몸에는 암이 생겼고, 큰 수술도 겪어야 했다. 가슴에 묻은 자식을 그리워하며 40여 년을 보내다, 2019년 영영 눈을 감으셨다.

 

사회인이 된 강순구는 한때 서울에 자리를 잡고 산 적도 있었다. 그 시절 육사 가까운 곳을 지나다닐 때마다 ‘아, 우리 형이 여기 어디쯤에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 ‘육사’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속에서 형의 얼굴이 불쑥불쑥 고개를 들었다.

“텔레비전에서 색소폰 부는 사람이 나오잖아요? 그걸 보면 정말 채널을 돌리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그래도 아무한테도 얘기를 못하고 그냥 혼자 남몰래 다른 데 쳐다보고…. 지금도 유튜브 같은 걸 보다가 색소폰 연주 음악이 나오면 눈물이 저절로 나요.”

 

40년이 넘는 세월이 그렇게 흘렀다. 스무 살 대학교 신입생이던 강순구의 인생도 봄, 여름을 지나 가을의 시간으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2019년 가을. 우연히 본 신문 기사 한 꼭지 때문에 강순구의 마음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라는 긴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애써 잊으려, 잊으려 했던 그 말, ‘진실’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2018년에 (군사망사고규명위가) 출범했을 때는 몰랐죠. 그 뒤에 뉴스에 한번씩 나오는 걸 듣고도 그냥 넘어갔었어요. (진정을 넣으면) 괜히 아픈 기억만 되살아나는 거고…. 근데 한 1년 정도 지났을 것 같은데요, 추석 때 고향 집에 다녀와서 신문을 봤는데, 구타나 가혹행위에 의한 죽음도 진상을 밝혔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때 ‘형 사건도 입대 후 불과 몇 개월 만에 일어났는데, 구타도 없이 그런 일이 일어났겠나’ 하는 의심이 들었어요.”

 

형이 죽은 이유가 ‘단순 복무염증’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입한 지 두 달 정도밖에 안 된 신병이 스스로 목숨을 버릴 정도로 ‘가혹한 일’들이 있지는 않았을까.

 

진정을 넣겠다 하니 아버지는 오히려 강순구를 말리셨다. 아들이 괜한 헛고생만 하게 될까 걱정하셨다. 옛날에는 군대에서 그런 사건이 있었다는 것 자체도 쉬쉬하며 살아야 했지만, 이제 국가가 직접 조사기관을 만들어서 진상을 밝힌다고 하지 않나. 강순구 역시 반신반의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그래도 되든 안 되든 한번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진정을 접수했다.

사랑하는 자식과 가족을 잃은 슬픔도 컸지만 어디에도 하소연할 곳이 없었다는 현실이 더 원망스러웠습니다. (...) 자살이라는 사실만 알려줄 뿐 왜 자살하였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원인이나 사정을 제대로 듣지 못했으며, 당시 동료들에게는 접근조차 할 수 없어 아무런 말 한마디 물어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강순구 군사망사고규명위 진정서 중)

 

2019년 10월 24일 강순구의 진정을 접수한 군사망사고규명위는 이듬해 1월 20일 조사개시를 결정했다. 국방부와 병무청 등에 남아 있는 기록물들을 입수하고, 강의구의 죽음에 대해 작은 기억이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수소문해, 부대 동료 등 15명의 진술을 확보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400여 쪽의 조사기록을 통해, 스물두 살 강의구가 살아서 보낸 마지막 ‘두 달’의 시간을 재구성했다. 2021년 1월과 6월 두 차례 조사기간을 연장한 끝에, 2022년 6월 27일에야 조사보고서는 완성됐다. 강순구가 진정을 접수한 지 2년 8개월 만이었다.

 

강순구가 의심했던 구타와 가혹행위. 당시 강의구와 같은 부대에서 생활했던 많은 이들은 그 의심이 ‘사실’이었다고 입을 모아 증언했다. 군악대는 육사 근무부대 중에서도 군기가 세기로 손꼽혔다. 육사는 행사가 많았고, 그중에는 대통령이 참석하는 행사도 있었다. 긴장이 풀리면 연주 중에 실수를 한다는 이유 때문에 연습 때부터 구타와 단체기합이 많았다.

신병교육 때 선임들이 정말 많이 때렸습니다. 저도 철조망을 붙잡고 탈영할까 말까 고민을 심하게 했을 정도로 정말 심하게 했습니다.(선임병 민○○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 진술 중)
기합이나 가혹행위는 자주 있었고, 제가 알던 고참은 너무 많이 때려서 병사들을 몇 명 군병원으로 후송시킨 경우도 있었습니다.(선임병 홍○○ 군사망사고규명위 진술 중)
구타도 많이 당하고, 뺑뺑이도 많이 당했습니다. (…) 연습시킬 때 많이 때렸고, 악기들이 틀리면 그날은 아주 끝장이 나는 날이었습니다.(하사관 전○○ 군사망사고규명위 진술 중)
육군사관학교 군악대는 군기가 매우 셌고, 대통령이 참석하는 행사도 자주 했습니다. (…) 실수를 하면 군악대 전체가 아주 박살이 났습니다.(선임병 곽○○ 군사망사고규명위 진술 중)

 

구타와 가혹행위 말고도 이들을 괴롭힌 것이 또 있었다. 바로 과도한 업무량. 군악대는 각종 행사에 동원되는 일이 많았고, 그만큼 악보 암기와 의복 및 장비 관리 업무도 과중했다.

대통령 행사에 필요한 곡이 60여 곡 되는데 군악대는 이걸 모두 외웠어야 했습니다. (…) 또 스트레스를 받았던 게 행사 워커가 있고 일반 신사화가 있었는데 그 둘을 모두 반짝반짝하게 닦아 놨어야 했습니다. 그걸 병기계가 복장검사라고 하는데 아주 빡빡했고, 그게 제대로 안 되면 기합도 주고 구타, 가혹행위가 꽤 있었습니다. (…) 장교 정복, 행사 정복 등등 저희가 관리해야 하는 옷이 많았습니다. 졸병들은 선임들의 구두를 대신 닦거나 선임들의 옷을 다려주거나 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선임병 홍○○ 군사망사고규명위 진술 중)

 

군악대의 본래 업무와 상관이 없는 일에도 일상적으로 동원됐다. ▲휴일 태릉골프장 수색(VIP 이용 대비) ▲육사 생도 승마훈련 후 도로 위 말똥 치우기 ▲연병장 잡초 뽑기 ▲영내 수목 관리(해충 박멸) 등에도 동원되면서, 일과시간 후와 휴일까지 과도한 업무에 시달렸다.

 

그러는 동안 강의구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 있었다. 가족들이 기억하는 쾌활하고 다정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부대원들은 강의구를 “우울한 친구”, “조용한 사람”으로 기억했다. 그리고 “대화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고, “웃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덧붙였다.

 

군사망사고규명위는 이 같은 조사 결과를 근거 삼아, “(강의구는) 구타․가혹행위가 상당한 군악대 분위기로 인해 상당한 심리적 압박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며, “거기에 더해 과도한 업무에 노출된 채 피로가 가중된 상태에서 이러한 고통이 남은 군 복무기간 반복될 수 있다는 불안감 및 부담감으로 인해 자해 사망하기에 이른 것”이라 판단했다.

군 복무 중 군악대에서 강도 높은 신병교육 중 행해진 구타 및 가혹행위와 과도한 업무가 주된 원인이 되어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고 인정한다. 국방부장관에게 망(亡) 강의구의 사망 구분에 관한 사항을 순직으로 재심사할 것을 요청한다.(군사망사고규명위 결정문 중)

 

 

대체 무엇이 형을 생(生)의 낭떠러지로 내몰았는지, 46년 만에 알게 된 진실. 지금이라도 밝혀냈다는 것에 다행스러운 마음이 드는 한편, 형이 겪었을 고통을 떠올리면 다시 한번 가슴이 미어진다. 얼마나 아팠을까. 가슴에 품은 꿈을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하고 떠난 형.

 

강순구가 애통하게 여기는 것은 또 있다. 2022년 11월 4일 국방부는 재심사를 거쳐 강의구를 ‘일반사망자’에서 ‘순직자’로 변경했다. 군인으로서 직무를 수행하다 숨진 사람. 대한민국의 공식 기록으로 그의 명예를 회복해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딱 석 달만 빨랐더라면…. 이미 너무 오랜 세월 기다려온 아버지에겐 그 석 달도 너무 길었다.

“(순직 재심사) 결과가 나오기까지 (진정 접수로부터) 3년 이상 걸렸어요.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다 보니까, 결과를 들어보지도 못하고 아버지는 돌아가셨어요. 작년(2022년) 8월에 돌아가셨는데, 11월에 결과가 나왔더라고요. 그게 너무 안타깝더라고요. 기왕이면 조금만 빨리 했었으면, 석 달만 빨리 됐었으면 아버님도 한을 풀고 가실 수 있었을 텐데….”

 

국방부가 ‘순직’으로 다시 결정함에 따라, 그의 위패를 현충원에 모실 수 있게 됐다. 현충원 이야기가 나오니, 강순구의 표정이 한결 밝아진다. 홀가분한 감정이 얼굴에 보인다.

“(형의 위패를 현충원에 모시면) 그때는 나도 마음의 짐을 좀 걷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 세대마저 가고 나면 누가 형을 기억이나 해줄까 싶었거든요. 그렇지만 이제는 국가에서, 국가가 있는 한 계속 기억해준다는 게, 마음이 다 편해요. 대전현충원은 원래 둘레길이 잘돼 있어서 가끔 갔는데요, 이제 현충원에 가면 찾아가 볼 데가 또 생겼네요.”

 

인터뷰 막바지 강순구는 세상에 하고 싶은 말들을 꺼내놓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다시는 군대에서 억울하게 죽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는 것. 국가를 위해 군대에 간 사람들은 국가의 관리 아래 복무를 다 하고 나올 수 있어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자신처럼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진실을 모른 채 한을 품고 살지 않도록, 군사망사고의 진상을 규명하고 명예회복을 돕는 조사기구가 ‘상설화’돼야 한다는 바람이었다. 2018년 출범한 군사망사고규명위는 5년간의 활동을 마치고 2023년 9월 문을 닫는다. “평생 멍에를 지고서” 살아온 당사자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차분하고도 무거웠다.

“군대 가서 이렇게 억울하게 죽는 사람이 없어야죠. 자신도 억울하고, 또 그 부모와 가족들은 평생 멍에를, 멍에를 지고서 산다고요…. 군대라는 게 폐쇄된 조직이라 (내부를) 아무도 모르잖아요. 이런 일을 당하는 입장에서는 어디다 하소연이라도 해볼 수 있는 기관이 있어야 돼요. (앞으로) 또 다른 피해가 생길 수도 있잖아요. 누구나 당사자가 될 수 있는 거예요. (군사망사고규명위가) 이제 없어진다고 하는데, 저는 이런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위패 봉안식이 언제 열릴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어떤 방식으로 치러지는지 알 수 없지만, 강순구에게는 소망이 하나 있다. 47년 전 형의 마지막 부탁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품이 하나도 없어요. 옛날에 큰 물난리가 나서 시골집이 침수됐어요. 그래서 집을 새로 지으면서 물건들이 다 없어졌어요. 형이 입대하기 전에 굉장히 좋은 구두하고, 색소폰 마우스피스 아주 좋은 걸 저한테 맡기면서 ‘네가 좀 가지고 있어라’ 했는데, 그걸 제대로 간수를 못했어요. 요즘 보니 색소폰 마우스피스는 팔대요. (봉안식 할 때) 그런 것도 넣어줄 수 있는가 한번 물어보고 싶어요. 음악을 제일 좋아하니까 그거(색소폰 마우스피스)라도 하나 사서, 고향 시골에 있는 흙 조금 하고 안에 넣어줄 수 있을까…. 괜찮은지 모르겠어요.”

 

강의구와 비슷한 시기 육사 군악대에서 복무한 사람 중에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한 포크 가수도 있다. 강의구 역시 군 복무를 무사히 마치고 계속 연주자의 꿈을 이어갔다면, 우리는 그의 이름을 다른 곳에서 마주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텔레비전에서 멋진 색소폰 연주자를 볼 때마다, 동생 강순구의 가슴은 그래서 더 먹먹해졌다.

 

강의구는 영원한 스물두 살로 남았다. 음악을 너무나 사랑했고, 또 음악으로 그 사랑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꿈 많은 청년. 인터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긴 머리 소녀’를 다시 듣는다. 노랫말 마지막 소절이 전에 없이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한 청년의 피우지 못한 꿈을 생각하면서, 내 마음도 ‘기도’처럼 고요해졌다.

빗소리 들리면 떠오르는 모습/ 달처럼 탐스런 하얀 얼굴/ 우연히 만났다 말없이 가버린/ 긴 머리 소녀야/ 눈먼 아이처럼/ 귀 먼 아이처럼/ 조심조심 징검다리 건너던/ 개울 건너 작은 집의/ 긴 머리 소녀야/ 눈감고 두 손 모아/ 널 위해 기도하리라(‘긴 머리 소녀’ 노랫말)

 


- <대통령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5년 종합활동보고서 피해사례집>(2023.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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