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이라는 단어는 김진국(80)의 자랑이었다. 마당에 차를 대고, 현관을 들어서기도 전부터 “우리 집안이 참 군대하고는 인연이 굉장히 깊습니다”라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 형제가 칠형제인데 넷째 하나 빼고는 전부 다 군에 갔다 왔습니다. 하나가 군에 안 간 건 여섯 살 때 뇌염을 앓아서 장애가 있어서 못 갔습니다. 고 한 명 빼놓고는 여섯 형제가 다 나라를 위해서 몸 바친 사람들입니다. 참 우리 가족만큼 이런 집안도 드물 거야.”
형제들만이 아니다. 김진국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그 유명한 군함도에 수용됐던 강제동원 피해자다. 죽을 고생을 하고, 해방이 되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아버지는 식민지 시절 일본에, 아들들은 해방된 뒤 대한민국에 청춘을 바쳤다. 강제동원 노동자와 군인이란 차이는 있지만, 이들에게 헌신을 요구한 대상은 모두 같은 ‘국가’였다.
부산 기장군 장안읍에 있는 김진국의 집. 고향집 터에 새로 빨간 벽돌집을 지어올렸다. 거실에서 김진국과 마주 앉았다. 그의 머리 뒤편으로, 벽에 걸린 ‘훈장증’이 한눈에 들어온다. 보국훈장 광복장. 그가 35년간 군무원으로 일하고, 2000년 퇴직하면서 받은 것이다.
그가 손목에 차고 있는 ‘청와대’ 시계 역시 그때 받은 것. 김진국의 자부심은 괜히 생긴 게 아니다. 군이란 단어에는 그의 일생과 형제들의 헌신이 모두 압축돼 있었다.
“얘는 너무 온순했습니다. 너무 온순해서 친구들하고 싸우는 일도 별로 없었고, 형제가 일곱이나 있지만 얘는 다른 형제들하고 다투는 일도 없었어요.”
여섯째인 김진현(1959년생)을 생각하면 제일 먼저 그 ‘온순함’이 떠오른다. 김진국은 칠형제 중 맏이. 김진현보다 열다섯 살이나 많은 큰형 김진국은 마치 아버지 같은 형이었다. 김진국의 부인 역시 형수라기보다는 어머니에 가까운 존재였다.
“시집왔을 때 막내(일곱째)가 대여섯 살밖에 안 됐고, 시동생들이 어렸어요. 옛날엔 작은 기와집에 있었거든요. 방 두 개 중에 어른들(시부모) 한 방 쓰시면 방이 하나밖에 없어요. 어린 시동생들하고 우리 방에 같이 자고 그랬죠. (나중에 분가해서도) 우리 집에서 학교 댕기고 직장 댕기고, 내가 도시락 싸주고 빨래 해주고 완전히 내가 키웠지.”(김진국의 부인)
김진현은 고향인 기장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부산 시내에서 분가해 지내던 큰형 김진국의 집에서 함께 살았다. 김진현은 2년 정도 공장에서 일했다.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오면 늘 어린 조카들을 데리고 놀아주는 것이 그의 일과였다.
그러다 스물한 살이 되던 1979년. 군대를 빨리 갔다 와서 제대로 돈을 벌어야겠다던 김진현은 군에 입대했다. 제대하고 열심히 돈을 모아서 송아지 한 마리 사는 게 그의 꿈이었다.
“집사람도 고생 많이 했지만, 지금은 우리 애들도 다 크고, 밥 먹고 사는 건 되니까 괜찮은데, 억울하게 간 동생 생각하면은 참… 나는 너무… 너무너무 애통해요. 너무 애통해.”
“일곱 형제 중에서도 제일 착했다”는 김진현에게, 송아지 한 마리라는 소박한 꿈도 허락되지 않았다. 1980년 1월 3일 새벽, 그는 시신으로 발견됐다. 입대한 지 겨우 66일 만이었다.
처음 연락을 받은 사람은 김진국이었다. 군무원으로 일하던 그의 직장으로 전화가 왔다. 수화기 건너편에 있는 사람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동생이 죽었다니.
정신이 아득해지는 와중에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당시 논산훈련소에서 헌병 대위로 있던 고종사촌 동생이었다. 전화를 걸었더니 선뜻 동행해주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통화를 마치자마자 김진국은 어머니를 모시고 부대로 출발했다. 부산에서 강원도 명주군(1995년 강릉시에 통합)까지, 꼬박 하루를 길 위에서 보내고 밤늦게 도착했다.
“사고 난 장소를 보여줬어요. 뭐 벌써 청소를 다 해놨죠. 외관상 보기는 깨끗하더라고. 동생 시신도 염을 다 해놨어요. 거기(부대 측)서는 총기 오발사고다, 이렇게 얘기하더라고요.”
초소 위병근무 중 총기 오발사고로 사망했다고 하더군요. (…) “어떤 미친 사람이, 자기 머리에 총구를 향한 채 (총을) 다루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당시 부대에 따졌지만 졸다가 방아쇠에 손이 놓여져서 그런 것 같다는 무책임한 답변밖에 (…) 아무리 따지고 악을 써봤자 더 이상 아무런 답변이나 조치는 없었습니다. 이제 그만 하시고 장례 잘 치러주라는 말만 하더군요. -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에 제출한 김진국의 진정서 중(2020. 9. 10.)
현직 헌병 대위였던 고종사촌은 김진현이 지내던 내무반에 들어가봤다. 김진현의 관물대를 열었다. 그가 남긴 물건 중에 죽음의 이유를 밝힐 만한 것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수첩도, 편지도, 메모지 한 장도 들어 있지 않았다.
물어보고 싶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헌병 대위라고 해도, 다른 부대에서 일어난 사건까지 개입할 수는 없었다. 고종사촌은 이틀 밤을 지내고 먼저 돌아왔다.
김진국은 부대에서 동생의 시신이 화장장에 들어가는 것을 지켜봤다. 21년간 ‘현아’라고 부르던 한 사람을, 이제는 한 줌의 재로 변해버린 동생을, 돌아오는 길 이름 모를 산에 뿌렸다. 1980년 1월 7일. 이해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시간이 나흘간 흘러 있었다.
“산에 뿌려주고 왔습니다. 나무 밑에…. 같이 피를 나눈 형제인데 건강한 놈이 군에 가서 그런 사고를 당하고, 장례도 못 치르고 산에 뿌리고 왔으니까 그 마음은, 허탈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형인 내 마음하고, 부모 마음하고 또 다릅니다. 그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고향집에 돌아와 보니까) 아버님은 아무것도 드시지도 못하고 완전히 폐인이 돼 계시더라고. 얼마나 속이 쓰리고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그때 그 마음은 말을 다 못합니다.”
한동안 질문 없이 김진국의 입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한곳에 시선을 멈춰두고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옆에 있던 아들 김정연이 대신 입을 열었다. 김진현이 큰형 김진국의 집에서 공장에 다니던 시절, 퇴근 후 놀아주던 꼬맹이 조카가 바로 김정연이다.
“삼촌 돌아가셨을 때 제가 아홉 살이었요.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되게 많이 울었던 기억이 있어요. 온 집안이 울음바다죠. 그 분위기가 적어도 1년은 간 것 같아요.”(김정연)
가족들은 영혼결혼식도 치렀다. 매년 음력 9월 9일에는 제사를 지냈다. 자손 없이 돌아가신 조상이나, 제삿날을 모르는 조상에게 9월 9일 중양절에 제사를 올리는 풍습 때문이다.
화목했던 집안에는 말이 사라졌다. 아무리 ‘왜’라고 물어도 대답해줄 사람이 없었다. 죽은 사람을 원망할 수는 없으니, 산 사람은 자신을 원망했다. 상처는 시간이 흐른다고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 깊은 곳으로 점점 더 가라앉았다. 그 상처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모두 말을 아꼈다. 가족들은 그 아슬아슬한 시절을 침묵으로 힘겹게 건너왔다.
“어제도 또 잠이 안 왔습니다. 오늘 (인터뷰를) 오신다 했는데, 틀림없이 과거에 어떻게 됐는가 물어보실 건데…. 참… 그 이렇게 어렵게 살아온 이야기를 다시 내 입으로 꺼내려고 하니까 내 자신이… 마음이 어딘가 죄책감이 들어서 잠이 안 왔습니다.”
부모님만은 이따금 죽은 아들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참아도, 숨겨도, 뜻대로 되지 않는 그리움이 목구멍을 넘어 나왔다. 살아 있으면 지금 몇 살일 텐데, 결혼을 했으면 애들도 있었을 텐데. 그럴 때마다 “안 잊어버리면 마음에 병만 됩니다, 영혼결혼식도 시켜줬으니까 저승에서라도 잘 살 겁니다”라고 부모님을 위로하는 것은 장남 김진국의 몫이었다.
가족들은 기억하기에도 잊어버리기에도 너무 어려웠던 그 이름을 군은 몇 장의 서류만으로 쉽게 지워버렸다. 기록에 남아 있는 김진현의 사인은 “두부관통총상”. 그리고 “사망자(김진현)는 내성적인 성격으로 (…) 고된 작업 등으로 생소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자 군복무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자살을 결심”(<사망확인조서> 1980. 1. 3.)했다는 설명이 붙었다.
‘자살’이라니. 그날 김진국과 가족들은 분명 총기 오발사고라는 말밖에 듣지 못했다. 하지만 군에서는 이미 서류에 자살이라고 적어두고서, 가족들에는 사고사라고 말한 거였다. 김진현의 병적기록부에도 사인은 ‘자살’이라고 기록돼 있었다.
“나라 탓을 해야 되나, 누구 탓을 해야 되나, (그동안) 하소연할 데가 없는 거야. 형이 돼가지고 동생 뒷바라지도 못해주고 명예회복도 못해주고, 내 나이 지금 80인데, 내 생이 벌써 다 됐는데, 이렇게 가고 말 건가…. 내 마음 이런 복잡한 걸 말을 다 못합니다.”
동생의 죽음에 대해 김진국이 알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일까. 그날 텅 비어 있던 관물대 안에, 김진현은 원래 무엇을 남겨뒀을까. 진실을 찾아가는 길은 2020년 여름에 시작됐다. 군무원 출신인 김진국은 국방홍보원이 발행하는 신문인 국방일보를 여전히 구독하고 있었다. 우연히 본 기사 하나에 그의 시선이 꽂혔다.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가 2018년에 생겼죠? 그때 알았더라면 일찍 좀 진정을 했을 건데, 못 보고 있다가 2020년 7월인가 국방일보에서 기사를 봤어요. 그걸 보고 내가 (동생 사건을) 진정 서류를 접수했습니다. (이제는 진실을 밝힐 수 있겠다는) 기대를 했습니다.”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는 2020년 12월 김진현 사망 사건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사건 이후 40년 만에 시작된 조사. 1년 반의 시간이 흐르고, 800쪽이 넘는 조사 기록이 새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드디어 ‘진실’이 고개를 들었다. 1980년 당시 부대의 지휘관들은 김진현의 가족들만 속인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증인을 조작해 사건 보고서까지 거짓으로 꾸며냈다.
당시 보고된 ‘최초 목격자’는 김진현과 같은 초소 근무조였던 병장 송정호(가명). 하지만 그는 실제로는 내무반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사건은 김진현 혼자 초소에서 근무하던 도중에 일어났고, 숨진 그를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은 다음 번 근무자인 일병 함의형(가명)이었다.
저는 당시 망인(김진현)의 시신을 발견한 최초 목격자가 틀림없으나 당시 헌병대 수사관에게 진술서, 진술조서, 구두 조사를 받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 당시 송정호(가명) 병장이 망인과 같은 위병소 근무자였으나 당시 망인과 함께 근무를 나가지 않았고, 제가 근무교대를 하면서 최초로 망인의 사망사실을 목격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 일병 함의형(가명) 진술
당시 부대에는 고참들이 근무를 서지 않고 후임병들에게만 연달아 근무를 서게 하는 ‘말뚝근무’가 관행처럼 행해졌다. 그래서 지휘관들은 최초 목격자를 함의형에서 송정호로 바꿔치기 했다. 사실대로 보고했다가는 송정호가 근무를 서지 않은 것이 들통나기 때문이다.
지휘관들은 병장 송정호에게 ‘김진현과 같은 시간대의 근무자니까 근무를 나가서 총을 위병소 바깥에 걸어놓고 소변을 본 것으로 하라’고 지시했다. 사건 당시 헌병 수사관들은 그 말에 모두 속아 넘어갔다. 지휘관들은 증인을 조작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증거까지 인멸했다. 그들은 죽은 김진현의 관물대에 무엇이 남아 있었는지 알고 있었다.
당시 망인(김진현)이 집에 안부편지를 보내려고 써놓았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차호남(가명) 중사와 정○ 준위가 사고현장을 조작해놓고 망인의 수첩, 편지 등은 임의로 소각하였다고 기억한다. (…) 부대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통신선을 임의로 절단해놓고 상급부대와 헌병대에는 ‘통신선이 절단되어 보고가 늦었다’고 변명을 하려고 하였고, 그 이전에 (…) 말을 맞추었다. 이건 100% 맞는 이야기다. - 병장 조규민(가명) 진술
김진현의 죽음으로 부대 내 부조리가 드러날 위기에 처하자, 지휘관들은 증인을 조작하고 증거를 인멸했다. 김진현이 사망한 시각은 오전 2시 40분경. 하지만 최초 보고는 약 세 시간 뒤인 오전 5시 30분경에 이뤄졌다. 그들은 치밀하고 기민했다. 사건을 조작하느라 보고가 늦어진 것에 대한 명분을 만들기 위해 통신선까지 일부러 절단하는 주도면밀한 모습을 보였다.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는 김진현의 사망 원인을 ‘자살’로 결론 내렸다. 현장 상황이나 시신의 상태, 당시 부대원들의 진술 등에서 타살이나 사고사의 개연성을 찾지 못했다.
망인(김진현)이 실탄을 장전하여 근무를 서야 했던 정황과 방아쇠 안전장치가 임의로 작동하여 총구가 망인의 좌측 귀 상부에서 발사되었을 상황을 상정하여나 하나 그러한 사고현장의 상황이나 망인의 두부관통총창상의 상태 등은 발견되지 않아 망인의 총기 오발 사고에 의한 사망은 어렵다고 추정됨. -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보고서 중
그럼 김진현은 왜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을까. 무엇이 그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을까. 그가 논산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 부대로 전입한 것은 1979년 12월 15일. 그가 소속된 부대는 탄약을 취급하는 부대였다. 마침 그 시기에 105mm 포탄 등 탄약류 58량이 강릉역에 도착해, 전 병력이 동원된 고된 주야간 작업이 12월 22일부터 31일까지 열흘간 계속됐다.
고된 노동을 하는 와중에 가혹행위도 일상적으로 일어났다. 선임병들은 구타, 얼차려, 욕설, 괴롭힘 등을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했다. 특히, 병장급 선임병들은 야간 위병소 근무에 나가지 않고, 후임병들에게만 말뚝근무를 강요했다. 사망 당일, 신병인 김진현이 혼자서 위병소 근무를 서야 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기합, 욕설, 갈굼 등 가혹행위가 자주 있었다. (…) 후임병들을 집합시켜 놓고 ‘개새끼, 씹새끼, 씨팔놈’ 등 심한 욕설을 하면서 주먹이나 군홧발, 곡괭이 자루 등으로 구타를 가하거나 괴롭힘을 가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당시 망인(김진현) 등에게 군기를 잡기 위해 병장들이 ‘군기를 잡아라’라고 하면 밑에 군번들이 알아서 군기를 잡았다. - 병장 송정호(가명) 진술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는 대구대학교 심리학과 박중규 교수에게 김진현에 대한 심리 부검을 의뢰했다. 그 결과 “망인(김진현)은 체력적으로, 또한 정신적․심리적으로 심한 압박감과 큰 부담감을 일거에 느꼈을 것”이라며, “강한 급성스트레스는 무력감과 자기조절(자기통제)감의 상실, 극도의 두려움 등을 야기할 수 있다”는 소견이 돌아왔다.
죽음의 원인에는 과도한 업무와 가혹행위가 있었다. 하지만 부대는 이를 관리하거나 개선하지 못했다. 심지어 사망 이후에 은폐와 조작으로 진실을 감췄다. 하지만 당시에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차호남(가명) 중사가 징계위에 회부됐으나 처벌 없이 사건은 묻혔다.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는 2022년 6월 이와 같은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국방부에 ▲김진현의 사망 구분을 ‘순직’으로 변경할 것 ▲국가유공자 또는 보훈보상대상자 등록 신청을 하게 할 것을 요청했다. 김진현이 죽은 지 42년 5개월이 지난 뒤였다.
“이걸(조사결과 보고서를) 딱 받고 나니까, 제일 먼저 어머니 아버지 생각이 나더라고. 살아계실 때 (진실을) 알았더라면 원통함이 좀 풀렸을 텐데. 이걸 내가 이걸 보고 다음 날 아침에 어디 밖에를 못 나가겠데요. 눈이 부어서. 눈물이 나서 도저히 밤에 잠을 못 이뤘어요. (동생이) 이렇게 죽을 고생을 하고 고달픈 생활을 했는데, 형이 돼서 면회 한번 못 가봤다는 게 죄책감이 드는 거라. 마음만 있었으면 어떻게든 갔다 올 수 있었는데,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는가 모르겠어요.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는가…. (군대에) 있을 때 한 번이라도 보고 왔으면 마음이 좀 덜 아플 텐데…. 엊그제도, 세 번째 읽으면서 또 울었어요.”
2013년에 어머니가 먼저, 2015년에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다. 10년만 일찍 진실을 알게 됐다면, 부모님 가시는 길이 조금은 편하셨을까. 형 김진국도 그사이 팔십 노인이 됐다.
그래도 고마웠다. 40년 전 사건의 관계자들을 수소문하며 전국을 다닌 조사관의 수고에 몇 번이나 고마움을 표했다. 죽은 동생도 이제 억울함을 조금 내려놓지 않았을까. 다행스러웠다. 그리고… 미안했다. 가슴에 사무치게. 복잡한 마음은 또 김진국을 잠 못 들게 했다.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으면 유품이라도 남겨둘 걸. 그걸 보면 또 생각이 나니까, 또 마음이 아프니까, 가족들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몇 년 전에 동생의 물건과 사진을 모두 태웠다. 그렇게 마음에서도 떠나보내려 했다. 이제 동생을 추억할 수 있는 물건은 오직 사진 한 장뿐.
“2020년에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에) 진정서 넣을 때, 서류하고 같이 보내려고 동생 사진을 찾아봤어요. 집 안 온 데 다 찾아도 없었는데, 이게 딱 하나 있더라고. 자기(김진현) 혼자 찍은 사진이 아니고 우리 애하고 찍은 사진이 하나 딱 있더라고.”(김진국)
“삼촌(김진현)이 저를 데리고 놀러를 많이 다녔어요. 해운대도 갔고, 용두산공원도 갔던 기억이 있어요. (이 사진은) 내 사진이라고 남겨놓은 거예요. 삼촌 사진이 아니라.”(김정연)
국방부는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따라, 김진현의 사망 구분을 ‘일반사망자’에서 ‘순직자’로 변경했다. 대한민국은 이제 그를, 군인으로서 "직무수행이나 교육훈련 중 사망한 사람”으로 기억하게 됐다.
지난 3월 9일 김진국에게 배달된 ‘순직확인서’. 봉투 안에는 ‘군인 사망보상금 청구 안내서’와 ‘유가족 보훈 안내서’가 같이 들어 있었다. 김진국은 이제 순직이 확인됐으니 뒤따르는 문제들은 국방부가 알아서 해줄 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유족들이 직접 나서야 했다. 이런저런 서류들을 만들어서 관청을 찾아다니는 일이 또 시작됐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김진국 가족들에게 지급될 사망보상금은 ‘0원’이었다. 현재 사망보상금 지급 대상 유족의 범위가 배우자, 자녀, 부모, 손자녀 및 조부모로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 직계친족이 없는 군인이 사망할 경우 그 누구도 사망보상금을 지급받지 못하는 것.
과거에는 순직 군인의 ‘형제자매’도 사망보상금을 받을 수 있게 돼 있었지만, 베트남전쟁 파병 후인 1974년부터 연금을 받는 유족의 범위에서 형제자매가 빠졌다.
20대 초반 군대에서 사망했다면 배우자나 자녀가 있는 경우는 드물다. 또 세월이 오래 지나 순직이 인정됐다면 그 사이 부모 또한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 ▲1974년 이후 순직 ▲배우자․자녀 없음 ▲부모 사망, 김진현은 이 세 가지에 모두 해당된다.
최초 사망시 일반사망으로 분류되었다가 추후 전사․순직 등으로 재분류되는 경우, 그 과정에서 상당한 시차가 발생하였고, 전사․순직으로 재분류되더라도 거의 유일한 수급권자인 직계존속이 고령 등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현재에 이르러서는 상당수를 차지한다. (…) 순직 군인의 형제자매를 유족의 범위에 포함함으로써 수급권자를 확대하여, (…) 전사․순직자의 유족이 합당한 보상을 받도록 제도를 정비할 필요가 있다. - <순직군인 형제자매 보상에 관한 연구>(책임연구원 하주희, 2021. 2. 24.) 중
이런 규정 때문에 보상의 길이 막힌 사례는 김진현만이 아니었다. 지난해 12월 국회에는 이 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군인 재해보상법 일부개정법률안’(설훈 국회의원 대표발의)이 발의됐다. 해당 법안은 지난 2월 국회 국방위원회에 상정된 상태다.
“순직이 확인되면 군에서 다 알아서 해주는가 했더니, 그게 아닌 거라. 해당도 안 되는데 (사망보상금 청구 안내서는) 왜 보냈을까? 속만 더 상하게…. 동생을 잃고 43년 동안 슬픔 속에 이렇게 있었는데… 좀 안타깝습니다. 마음이 안 좋네요. 참… 너무 무심합니다.”
진실이 밝혀진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진 않는다. 슬픔과 고통 속에 보낸 유족들의 시간이 다시 돌아오지도 않는다. 진심 어린 사과와 책임 있는 보상은, 진실을 밝힌 뒤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다. 하지만 기대만큼 큰 허탈함이 되돌아왔다.
1980년 사건 당시 군의 ‘중요사건보고’에는 “유족 여비 3만 원 전달”이라는 기록이 있다. 김진국은 기억하지도 못하는 그 3만 원이 지금까지 국가가 준 보상의 전부다.
43년이 지나는 동안 아무도 사과하지 않았다. 김진현을 죽음까지 몰아붙이고, 증인을 바꿔치기하고, 편지와 수첩을 불태우고, 가족들에게 거짓말까지 했던 이들. 그리고 모든 군인이 건강하게 맡은 바 임무를 다하도록 관리해야 할 책임이 있던 군과 국가, 어느 누구도.
누구를 원망해야 할지 몰라 자신만을 책망하며 보낸 세월. 아무도 김진국에게, 그 가족들에게, 죽은 김진현에게 사과한 사람이 없었다. 그것은 진실이 밝혀진 지금도 마찬가지다.
“직접 찾아오진 않더라도 최소한 문서상이라도, 이런 일들로 인해서 귀댁의 가족이 겪었을 슬픔에 대해 사과 말씀 드립니다, 최소한 그 정도라도 있어야 되지 않을까요?”(김정연)
‘군’이라는 단어는 김진국의 자랑이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집을 나서는 길. 김진국이 대문 밖까지 나와 배웅을 한다. 여전히 텅 빈 마음은 억지 미소로도 감출 수가 없다. 그가 손을 흔든다. 마른 손목에 채워진 ‘청와대’ 시계가 저무는 저녁 해를 받아 반짝거렸다.
- <대통령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5년 종합활동보고서 피해사례집>(2023.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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