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이게 다 사람의 뼈라니. 수십 미터 길이의 구덩이 안에 이리저리 얽히고 겹겹이 쌓여 있던 뼈들. 마치 공룡처럼 거대한 동물의 화석 같기도 했다. 한 발짝 다가가서 자세히 살펴봤다. 허벅지뼈, 두개골, 고무신…. 끔직한 학살의 증거였다.
2021년 8월 대전 산내 ‘골령골’ 유해발굴 현장에서 받은 충격은 내 마음에 깊이, 그리고 오래 남았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군경은 국민보도연맹원과 대전형무소 재소자 등 민간인들을 이곳에서 학살했다. 그 수는 최소 1800명에서 최대 7000명으로 조사됐다.
한국전쟁 전후 군경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의 수는 전국적으로 최대 100만 명까지 추정된다. 전국 곳곳에서 일어난 학살 사건들 중에서도, 골령골은 희생 규모가 압도적이다.
산세가 용의 모습을 닮아 곤룡재라 부르던 곳. 학살 이후 사람들은 ‘뼈가 산처럼 쌓인 골짜기’라는 뜻으로 골령(骨嶺)이라 불렀다. 그리고 지금은 희생자의 영혼이 깃들어 있는 골짜기란 뜻으로 한자를 바꿔, 골령(骨靈)골이라 부른다. 학살을 위해 판 구덩이들을 모두 이으면 그 길이가 1킬로미터에 이르는 까닭에,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 부르기도 한다.
전쟁과 학살을 기억하는 것으로 평화와 인권의 의미를 되새기려는 사람들이 골령골을 찾는다. 그리고 그들을 맞이하는 한 사람. 임재근(46)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교육연구소장이다. 그는 2015년부터 골령골 현장을 해설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2022년 35회, 2023년에는 33회의 해설을 진행했으니, 한여름과 한겨울을 빼면 거의 매주 골령골 방문객들을 맞은 셈이다.
골령골의 기억의 지키고 나누는 그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1월 3일 대전 봉명동에 있는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에서 임 소장을 만났다. 그가 골령골과 처음 인연을 맺은 건 언제일까.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요. (지역 통일운동 단체 활동을 하면서) 그냥 매년 위령제에 가서 돕는 일부터 했죠. 우리 지역 사건이지만 정작 골령골 사건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어요. 나중에서야 ‘민간인 학살은 분단과 전쟁으로 인해서 발생한 사건인데, 통일운동 활동가의 역할이 위령제 가서 설거지하고 음식 나르는 것밖에 없는가’ 하는 반성을 했어요.”
그래서 임 소장은 대전충청 오마이뉴스에서 일하는 심규상 기자에게 부탁했다. 심 기자는 1990년대부터 골령골의 진실을 밝혀내고 알리기 위해 애써온 사람. 임 소장은 심 기자와 함께 현장을 답사하며 골령골의 역사를 제대로 알게 됐다. 그때가 2011년이었다.
시간이 흘러 2015년,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 골령골에서 민간 차원의 유해발굴을 시작했다. 대전 지역 시민사회 단체들도 ‘유해발굴 공동대책위원회’를 꾸려 지원에 나섰다. 임 소장은 이때를 “숙명”처럼 찾아온 시간이라 표현했다.
“때마침 제가 지금 활동하는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가 창립된 직후였어요.(2014년 10월 창립) ‘우리 단체는 평화통일 교육을 목적으로 설립됐고, 골령골 사건이야말로 평화통일 교육에서 가장 상징적이고 핵심적인 사건 아닐까.’ 거의 숙명적으로 참여하게 된 거죠.”
공대위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현장 해설. 그리고 두 번째 역할은 기록. 지금껏 이어가고 있는 교육과 기록 활동의 본격적인 시작점이 바로 그때였다.
그렇게 2015년 2월 유해발굴 개토제(땅을 처음 팔 때 산신이나 토지신에게 지내는 제사)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골령골 해설사로 데뷔(?)했다. 임 소장은 “그때 어떤 얘기를 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되게 어수룩하고 부족했던 것 같아요”라고 말하며 웃었다.
하지만 그 부족함을 반복하면서 조금씩 성장했다. 그 뒤로 지금까지 ‘기록된 것만’ 129회의 현장 해설을 진행했다. 특별히 기억에 오래 남은 방문객들도 많다.
“한신대 학생 한 명이 연락이 왔어요. 골령골을 답사하고 보고서를 쓰고 싶다고. 그래서 그 학생 한 명을 위해서 현장 해설을 한 적이 있어요. 나중에 A+ 받았다고 연락도 왔어요.(웃음) 그렇게 귀한 마음을 내고 찾아오실 때, 인원이 많든 적든 대단히 감사하죠.”
학창시절 그의 꿈은 물리학자였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 서점에서 우연히 집어든 책 한 권이 그에게 충격을 줬다. <KAIST 괴짜들의 행진 - 놀며 공부하기>라는 책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카이스트(KAIST, 한국과학기술원)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어요. 근데 고3을 앞둔 학생에게 ‘놀며 공부하기’라는 제목이 정말 도발적이었어요.”
카이스트 학생들이 “모범생이지만 각자 취향에 따라 시와 그림, 운동 등 창조적인 활동을 펼치며 자신의 앞날을 자신 있게 이끌어 가는 모습을 보여준”(출판사 책 소개 인용) 책. 임 소장은 그 책을 읽고 카이스트라는 대학에 매력을 느꼈다.
임 소장은 1997년 카이스트에 입학했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학과 공부에만 있지 않았다. 마치 그가 읽은 <놀며 공부하기> 책 속에 등장하는 학생들처럼, 이곳저곳에 눈길을 돌렸다.
“학생운동을 하게 된 건, 전부터 내재돼 있던 사회에 대한 시선들이 영향을 미친 것 같아요. 그리고 동아리 선배들 영향도 있죠. 고등학교 때부터 봉사활동을 했기 때문에 대학교에서도 자연스럽게 봉사 동아리에 들어갔는데, 봉사 동아리 성향이 두 부류였던 거예요. 그냥 복지시설에 가서 봉사하는 동아리도 있고, ‘진정한 봉사는 사회를 변혁하는 일이다’라고 생각하는 동아리도 있었던 거죠. 저는 후자로 가면서 학생운동에 참여하게 됐죠.”
5년 만에 대학을 졸업했다. 그 뒤에는 회사에서 산업기능요원으로 3년간 일하며 군복무를 대신했다. 처음에는 월급을 받으니 좋았다. 가난한 대학생 시절에는 사지 못한 카메라도 사고, 평범한 “소시민의 삶”에 대해 생각했던 때였다. 하지만 프로그래머라는 이름과는 걸맞지 않게 ‘막노동’에 가까운 단순 작업을 밤새 반복하는 건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평생 이렇게 사는 게 맞나’ 고민하게 됐어요. ‘더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래서 벤다이어그램을 그려봤어요. 원을 세 개 그리고 ‘하고 싶은 일’, ‘해야만 하는 일’, ‘잘할 수 있는 일’을 써봤어요. 가장 좋은 일은 그 세 가지의 교집합 아닐까 생각한 거예요. 그 교집합에 있던 게 통일운동과 환경운동이었어요.”
임 소장이 이야기를 멈추더니 갑자기 나한테 물었다.
“그때 제가 뭘 선택했을 것 같아요?”
“통일운동 아니었나요?”
땡! 틀렸다. 20대 중반 그의 선택은 환경운동이었다. 임 소장은 그때 환경운동을 선택한, 아니 정확히 말하면 ‘통일운동을 선택하지 못한 이유’를 솔직하게 말했다.
“통일운동 하면 감옥에 잡혀갈 것 같고 굶어죽을 것 같고 겁이 났어요. 그래서 환경운동을 하겠다고 환경대학원 진학을 준비하고 있었죠. 책도 사보고 재학생들 조언도 듣고. 그런데 그 찰나에 통일운동 단체에 있는 선배가 일손이 부족하다고 잠깐만 도와달라고 하더라고요. 잠깐만 도와주면 된다고 했는데… ‘잠깐만’ 했던 게 지금 20년째 하고 있어요.(웃음)”
하지만 어떻게든 대학원을 갈 운명이었나 보다. 임 소장은 통일운동 단체 활동가로 살면서, 2013년 대학원에 진학했다. 이번에는 환경대학원은 아니고, 북한대학원대학교였다.
골령골과의 “숙명적인” 인연은 대학원에서도 이어진다. 2015년 유해발굴이 진행되던 그때가, 임 소장이 석사 논문을 써야 할 때였다. 하지만 아직 주제를 못 잡고 방황하고 있었다.
“수업을 들어보니, 흡수통일을 전제로 북의 지하자원과 노동력을 식민지화 하려는 논리가 대부분이었거든요. 내가 거기에 반박하는 논문을 쓸 역량도 안 되고, 그렇다고 그 흐름에 편승하는 건 옳은 방향이 아니죠. 그때 심규상 기자가 골령골을 주제로 써보라고 권했어요. 마침 제가 맡고 있던 교육과 기록이라는 역할도 있었으니까 논문 주제를 골령골로 정했어요.”
그렇게 2016년 석사 논문 <한국전쟁 시기 대전지역 민간인 학살 연구>를 썼다. 그리고 2020년 <한국전쟁기 대전전투에 대한 전쟁기억 재현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논문을 쓰면서 기록의 중요성을 다시금 절감했다. 국회도서관에서 마이크로필름을 “눈이 빠지게” 뒤지고, 해외 경매 사이트를 훑고, 외국의 아카이브를 들락거리면서 하나하나 자료를 모았다. 임 소장은 그런 과정들이 모두 “저를 성장시키는 과정”이었다고 평가했다.
영국 기자 앨런 위닝턴(Alan Winnington)은 골령골 학살 직후 현장을 취재하고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I saw the truth in Korea)”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아무리 찾아도 구할 수 없었던 기사 원본 팜플렛을 해외 경매 사이트에서 ‘기적적으로’ 구하기도 했다.
“(기사 원본을) 하나만 갖고 있지 않습니다. 경매 사이트에 뜰 때마다 구입했습니다. 지금 갖고 있는 게 세 부예요. 하나는 골령골 현장 해설할 때 쓰고, 또 하나는 사무실에, 마지막 하나는 집에 보관해놨어요. 누군가 이걸 보관하지 않으면 언젠가 자료가 소멸될 거니까요.”
1999년 이도영 박사가 미국 기록관리청(NARA)에서 찾아낸 18장의 골령골 학살 현장 사진은 진실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임 소장은 그 사진들 역시 어렵게 직접 입수했다.
“그러다 보니까 제가 현재의 활동을 기록하는 데 더 집착하게 됐어요. 당시 사람들이 더 많은 기록을 남겼더라면 후대 사람들이 더 많은 진실을 알 수 있었을 텐데. 그래서 매일 블로그에 기록하는 게 일이 됐어요. 기록되지 않으면 그 순간을 다시 찾을 수 없잖아요.”
그의 블로그 이름은 “통일로 가는 기록주의자”다. 블로그에는 그가 활동하며 직접 찍은 사진들이 ‘매일같이’ 올라온다. 오마이뉴스와 통일뉴스에도 직접 기사를 써서 기고한다.
사실 일선 활동가 입장에서, 행사를 준비하고, 진행하고, 정리하고, 또 기사까지 쓰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오지 않는 기자들을 마냥 기다리는 것보다, 직접 기사를 써서 알리는 게 훨씬 효율적이었다. 그런 노력들이 반복되니 동료 활동가들의 인정도 받게 됐다. “그 사이 통일뉴스에서는 통신원에서 객원기자로 신분을 격상해줬다”고 웃으며 말했다.
사진에 대한 관심은 대학생 때부터 있었다. 그러다 2007년쯤 처음 DSLR을 접하면서 본격적으로 사진에 빠졌다. 어딜 가든 카메라를 놓지 않았다. 장비도 사고 동호회 활동도 했다.
현장을 사진으로 담기 시작한 것은 2008년 이른바 ‘광우병 촛불’ 때였다. 집회 현장을 돌아다니며 신나게 사진을 찍었다. 처음에는 활동가 선배들한테 핀잔을 듣기도 했다.
“‘야 지금 사진 찍고 다닐 때냐? 집회 준비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하는 거죠. 그때는 사진 기록에 대한 관심이 좀 덜했어요. 약간 서운하기도 했죠. 그래도 그때부터 집회든 행사든 뭐든 카메라에 담는 게 일상이 됐어요. 정식으로 배우진 않고 그냥 막 찍으면서.(웃음) 지금은 어디 가서 제가 사진을 안 찍고 있으면, ‘왜 안 찍어?’ 할 정도로 바뀌었어요.”
그의 블로그에서는 놀라운 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그날 찍은 사진을 다음 날 올리는 법이 없다. 스마트폰으로 찍어서 바로 올리는 것도 아니다. DSLR 카메라로 찍고, 사진을 고르고, 크기를 조절하고, 짤막한 글까지 올린다. 이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해본 사람은 안다.
“욕도 먹죠. 같이 식당 가서는 혼자 사진 정리하고 있으니까. ‘밥상 앞에서 뭐하냐!’(웃음) 그렇게 안 하면 다음 일정들을 소화할 수가 없어요. ‘나중에’ 하고 묵혀뒀다가 세상에 내놓지 못한 사진들도 있었기 때문에, 그날 찍은 건 그날 올리자는 원칙을 세웠어요.”
그 ‘원칙’ 때문에 심지어 가정의 평화가 위태로워(?)지기도 한다.
“며칠 전에 아내하고 싸웠어요. 12월 31일 날 가족모임을 했는데, 일몰이 너무 멋있어서 사진을 찍었어요. 그런데 사진을 바로 올려야 되니까…. 제가 잘못했죠. 그날이 아내 생일이었는데…. ‘가족모임 와서도 왜 저러나’ 하고 혼나고. 그런 부작용도 있죠.(웃음)”
부작용(?)을 감수하고 원칙을 지켜온 덕분에 ‘기록자’로서 여러 이력이 더해졌다. 2017년에는 사진집 <대전대전(大田大戰) - 봄으로 간 촛불>을 펴냈고, 2019년에는 사진특별전 ‘콘크리트 기억’을 개최했다. 같은 해 대전충남민주언론시민연합의 민주언론상을 받기도 했다.
골령골에서는 2007년과 2015년, 그리고 2020년부터 2022년까지 다섯 차례 유해발굴이 진행됐다. 그 결과 발굴된 유해의 수가 무려 1441구. 전국에서 가장 많다. 앞으로 이곳에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전국단위 위령시설(진실과 화해의 숲)’이 들어설 예정이다.
임 소장은 지금도 대전산내골령골대책회의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다. 유해발굴 대책위의 뒤를 이어 세워진 단체다. 그가 해설하는 평화기행 현장은 골령골만이 아니다. 노근리사건, 제주 4.3항쟁, 여순항쟁 등 분단과 전쟁의 상처를 간직한 현장으로 사람들을 이끈다.
대전현충원을 둘러보며 현대사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항일의 역사와 분단, 전쟁, 학살로 이어지는 역사의 과정은 원인이 결과가 되고, 결과가 또 원인이 되며 서로 연결돼 있다.
결국 골령골의 역사 이야기는 오늘날의 ‘평화’ 이야기로 이어진다. 임 소장은 늘 “전쟁에서 이기려 하지 말자”고 말한다. 물론 전쟁에서 져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일단 전쟁을 시작해야만 해요. 전쟁을 해서 이긴들 누가 이기는 것이며, 이겼을 때 뭐가 남을 것이며, 전쟁으로 피해를 보는 건 누구일까 생각해보자는 거죠.”
누군가를 죽여야만 내가 사는 것. 전쟁이란 그런 것이다. 심지어 자기가 지켜야 할 국민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는 것이 바로 전쟁이다. 골령골의 역사가 그것을 말하고 있다.
“역사를 알고 보면 보이는 거죠. 전쟁을 막는 것이 평화를 지키는 길이고, 통일의 수단이며 방법이자 목표입니다.”
임 소장은 끝으로, <작은책>을 읽는 ‘작은 사람들’에게 연대와 응원의 말을 보탰다. 사회의 ‘작은 존재’들이 모여서 만드는 큰 변화의 힘을 믿는 사람들, 자신의 자리에서 작은 노력이라도 그치지 않고 해나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신뢰의 인사였다.
“<작은책>은 이름처럼 책도 작잖아요. 그리고 우리 하나하나는 작은 존재잖아요. 이 작은 책을 보시는 분들, 우리 사회의 작은 존재들이 결국 그 힘들을 모아서 세상을 진전시켜 나가는 것 아닌가 해요. 세상의 작은 것들이야말로 가장 위대하고 감사한 존재입니다.”
- 월간 <작은책> 2024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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