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구는 짧은 봄을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들로 왁자하다. 코로나19가 삼킨 겨울과 봄. 긴 터널의 끝을 조심스레 기대할 수 있게 되면서, 포구의 저녁도 모처럼 기지개를 켠다. 여전히 마스크는 잊지 않은 이들이 삼삼오오 바닷가 전망대에 오르거나, 파라솔 아래에서 해산물 한 접시를 앞에 두고 소주잔을 기울인다.
충남 당진시 송악읍 한진포구. 지금은 횟집과 잘 닦여진 해안 산책로를 찾는 사람들로 북적대는 관광지. 나는 그곳에 서서, 아마도 90년 전쯤 박동혁과 채영신이 함께 지새운 그날 밤을 생각한다.
영신의 두 손을 꼭 잡고 으스러지도록 힘을 준다.
“3년 아니라 30년이래도…… 이 목숨이 끊…….” 하는데 별안간 영신의 입술은 말끝을 맺을 자유를 잃었다.
지새려는 봄밤, 잠 깊이 든 바다의 얼굴을 휩쓰는 쌀쌀한 바람이, 쏴아 하고 또 쏴아 하고 타는 듯한 두 사람의 가슴에 벅차게 안긴다.(<상록수> 가운데)
지난 5월 2일 충남 당진시로 심훈(1901~1936)과 <상록수>의 길을 찾아 나섰다. 1935년 발표된 소설 <상록수>. 1930년대 농민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문단에서는 ‘카프(KAPF)’를 앞세운 사회주의 문학 운동이 태동하고, 농촌에서는 민중 계몽운동인 ‘브 나로드’(Vnarod) 운동이 전개되고 있을 때였다.
<상록수>는 당시의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다. 특히 농촌 ‘계몽’ 운동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 극복을 전망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식민지 시대의 민족해방운동과 연결된다. 또 ‘현장문학’적 성격도 강하게 띄고 있는데, 이는 소설의 남녀 주인공이 실제 모델을 두고 창작됐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여자 주인공 채영신의 모델은 실제로 경기 수원군 반월면 샘골(지금의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에서 농촌운동에 헌신한 독립운동가 최용신(1909~1935)이다. 남자 주인공 박동혁은 충남 당진군 부곡리(지금의 당진시 송악읍)에서 공동경작회로 활동한, 심훈의 조카 심재영(1912~1995)을 모델로 했다고 알려져 있다.
심훈과 <상록수>의 길은 필경사(筆耕舍, 충청남도 기념물 107호)에서 시작했다. ‘붓으로 밭을 가는 집’. 심훈은 1934년 소설 <직녀성>의 고료로 손수 설계한 이 집을 짓고, 여기서 <상록수>를 집필했다.
현재 필경사 옆에는 상록수문화관과 심훈기념관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2014년 건립된 심훈기념관에는 심훈의 3남인 심재호 씨가 기증한 육필 원고와 유품 전사본 4000여 점과 유족 심천보 씨가 기증한 유물 800점이 전시돼 있다. 하지만 내가 찾아갔을 때는 코로나19 사태로 실내 관람은 제한된 상태였다.
심훈의 육필 원고를 직접 보지 못한 아쉬움은 컸다. 특히 심훈의 원고에 남아 있는 ‘검열’의 흔적을 직접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심훈기념관에는 시집 <그날이 오면>의 검열본이 전시돼 있기 때문이다.
심훈은 ‘검열’과 악연이 깊다. 그는 1930년 소설 <동방의 애인>을 조선일보에 연재했다. 공산주의 운동과 혁명가의 애정 갈등을 그린 이 작품은 일제의 검열로 중단됐다. 또 타락한 지배계층과 남녀 노동운동가의 세계를 그린 소설 <불사조>의 연재를 시도했지만, 이 역시 일제의 검열에 의해 중단되고 말았다.
필경사와 심훈기념관의 야외에는 ‘상록수’를 상징하는 여러 조형물들이 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종을 울리며 선 남녀 주인공의 모습. 소설 속에서 ‘종’은 기대와 희망의 소리로 등장하기도 하고, 반대로 주인공의 슬픔을 배가하는 소재로 등장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종’은 두 사람의 애정과 의지와 약속의 상징이었다.
이 돈을 저 한 몸의 영양을 위해서는 쓸 수가 없습니다. 꼭 저금해 두었다가 가을에 지으려는 학원 마당 앞에 종을 사서 달겠습니다. 아침 저녁 저의 손으로 치는 종소리는, 저의 가슴뿐 아니라, 이곳 주민들의 귀와, 혼몽히 든 잠을 깨워 주고 이 ‘청석골’의 산천 초목까지도 울리겠지요.(<상록수> 가운데)
필경사에서 한진포구까지는 약 3킬로미터 거리. 그 사이에도 심훈과 <상록수>와 인연이 있는 장소들이 있다. 먼저 가본 곳은 심재영 고택. 소설 속 박동혁의 실제 인물로 알려진 심재영이 평생을 산 집이다.
특히 심재영 고택에서는 “그날이 오면”이라는 액자가 걸린 방 앞을 그냥 지나치지 말아야 한다. 심훈은 1932년부터 1934년 필경사를 짓기 전까지 그 방에 머물며, <직녀성>과 <영원의 미소>를 집필했다고 한다.
하지만 심재영이 소설 속 박동혁의 모델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2018년 윤성의 심훈기념관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은 ‘심재영의 실제 행적이 소설 속 박동혁의 활동과 맞지 않는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2001년 류양선 가톨릭대 명예교수의 논문과 1985년 백승구의 책 <심훈의 재발견>도 같은 주장을 담고 있다.
2018년과 2019년 <오마이뉴스>와 <당진시대>는 이러한 주장을 몇 차례 보도한 바 있다. 심훈의 첫째 형이자 심재영의 아버지인 심우섭이 잘 알려진 친일 언론인이라는 사실 또한 여기에 힘을 보태는 듯하다.
심재영 고택 입구에서 보이는 교회는 상록수교회다. 심훈의 둘째 형 심명섭 목사가 1950년 한국전쟁 중 납북된 뒤, 심훈가 가족을 중심으로 일부 지역 주민들과 함께 1951년 필경사에서 첫 예배를 드렸다. 이후 21년간 필경사는 교회당으로 사용됐고, 그 뒤를 이은 것이 바로 지금의 상록수교회다.
심명섭은 해방 후 심훈의 유고를 모아 시집 <그 날이 오면>을 펴낸 인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맏형 심우섭과 마찬가지로, 심명섭 역시 개신교계의 대표적인 친일 인사다. 심훈은 200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지만 두 형은 모두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렸다니, 입맛이 씁쓸하다.
심훈과 <상록수>의 길이 끝나는 곳은 한진포구다. 선착장 뒤로 보이는 큰 섬이 행담도다. 섬이 양 날개를 쭉 편 것 마냥 좌우로 뻗은 것이 서해대교. 1935년 심훈이 ‘7월의 바다’라는 산문에서 “저길서 사람이 살다니 무얼 먹고 살까?”라고 걱정했던 ‘가치내’ 섬은 지금 사시사철 관광객으로 붐비는 휴게소로 변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없지만, 그럴수록 ‘변해서는 안 될 것’을 기억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을까. 포구에 잠시 서서, 오늘도 어느 현장 어느 공간에 변하지 않는 ‘상록수’ 한 그루 심는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동리 어귀로 들어서자, 맨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불그스름하게 물들은 저녁 하늘을 배경 삼고 언덕 위에 우뚝우뚝 서 있는 전나무와 소나무와 향나무들이었다. (줄임) 상록수들이 키돋움을 하며 동혁을 반기듯, “오오, 너희들은 기나긴 겨울에 그 눈바람을 맞고도 싱싱하구나! 저렇게 시푸르구!”(<상록수> 가운데)
- 월간 작은책 2020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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