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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미군문화 답사기>와 효순미선평화공원

긴 글/인터뷰와 현장기사

by 최규화21 2021. 12. 30.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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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어느 날, 집으로 “효순미선20020613”이라는 문구가 적힌 팔찌가 배달됐다. 추모 머그잔과 시화 엽서 카드도 함께. 효순미선평화공원 조성 모금운동에 참여했더니 그 답례로 선물을 보내온 것이다.

 

2002년 6월 13일 경기 양주시에서, 중학생 신효순․심미선 양은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던 56톤 미군 장갑차에 깔려 숨졌다. 효순미선평화공원조성위원회는 2017년부터 국민 모금을 통해 평화공원 조성을 추진해왔고, 18주기를 맞은 2020년 6월 13일 효순미선평화공원은 드디어 완공식을 열게 됐다.

 


효순미선평화공원의 모습을 보러 가기 전에 책 한 권을 찾아 읽었다. 기록문학 작가집단인 다큐인포(Docuinfo)가 쓴 <부끄러운 미군문화 답사기>(북이즈, 2004년). 이들은 전국의 미군기지와 양민학살 현장, 일본 오키나와 등을 직접 답사해, 미군 주둔으로 황폐화된 땅과 상처받은 국민들의 삶을 기록했다.

 

경기 양주시 광적면 효촌리 543-3. 효순미선평화공원은 두 중학생이 숨진 사고 현장과 바로 접해 있다. 8월 4일 그곳을 찾아가는 길에는 이은혜 전 민중당 대변인이 동행했다. 이 전 대변인은 현재 주한미군 범죄의 현장을 찾아 그 참상을 알리는 유튜브 ‘자주자주TV-미군없는 내고향’ 진행자로 활동하고 있다.

 

 

2002 월드컵의 흥분과 열기로 온 나라가 들떠 있던 그때, 사건은 국민들의 관심사가 되지 못했다. 그대로 잊힐 뻔한 억울한 죽음. 효순이 미선이 또래의 경기북부 지역 청소년들이 먼저 나섰다. 교복을 입고 거리에 서서 친구들의 한을 풀어달라 외쳤고, 이들의 목소리는 전 국민적인 촛불시위의 씨앗이 됐다.

 

하지만 사고를 일으킨 미군들을 처벌받지 않았다. 미군은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을 근거로 재판권 이양을 거부했고, 미 군사법정은 과실치사 혐의로 기소된 장갑차 운전병과 관제병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 죽은 자는 있으나 죽인 자는 없는 사건. 분노한 국민들은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였다.

 

 

“(대한민국은) 두 여중생 압사사건에서 처음으로 재판권 포기를 요청했지만, 미군당국은 재판권을 포기하지 않고 미군사법정에서 재판하였다. (…) 그간 주한미군지위협정이 미국에 유리하게 적용되었을 뿐, 평등한 한미관계를 이루는 기반이 되지 못했다는 점을 말해준다.”(<부끄러운 미군문화 답사기> 452~453쪽)

 

장대비를 뚫고 효순미선평화공원으로 차를 몰았다. 왕복 2차선 길로 접어드니, 이 전 대변인이 “당시 미군 장갑차들이 부대에서 훈련장까지 이 길로 오갔을 거예요”라고 말한다. 가슴에서 쿵쿵 소리가 났다. 이 긴장이 억수같이 내리는 비 때문인지, 사건의 현장을 직접 보게 된다는 이유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효순미선평화공원은 사건 현장에 남겨져 있던 운동화 모양을 본따 만들어졌다. 아담한 공원 안에는 시민추모비와 상징벽화를 중심으로, 사건 경과 안내물, 명칭 조형물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촛불시위 현장을 기록한 벽화 앞을 천천히 걸으며, 18년 전 그 자리에 있었던 나와 사람들의 모습을 잠시 떠올렸다.

 

공원 옆 구석진 곳에는 사고 후 약 석 달 뒤인 2002년 9월에 미 2사단이 세운 추모비가 있다. 누군가 “미 2사단”이라는 글씨를 마구 쪼아둔 흔적이 있었다. 공원 아래로는 사고 당시에는 없었던 보행로가 생겼다. 보행로를 따라 몇 걸음을 옮기니, 이곳이 사고 현장임을 알리는 작은 동판이 보인다. 아. 이곳이구나.

 

 

단체로 이곳을 찾은 이들이 걸어두고 간 현수막이 보였다. 현수막에는 그들이 손글씨로 남긴 다짐의 말들이 가득했다. 누군가는 “10살이던 제가 28살이 되어도 사진 속 언니들은 계속 15살이라는 게 너무 가슴 아파요.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라고 썼다. 내가 쓰고 싶은 말을 먼저 써줘서 괜히 고마웠다.

 

“효순이 미선이 사망 후 주한미군은 안전요원 배치, 훈련 시 마을 주민들에게 사전 통보 등 재발방지 노력을 약속했지만, 이는 전혀 지켜지지 않았고 그 뒤로도 많은 주민들이 미군 차량에 치이고 깔려 목숨을 잃었습니다. 우리 국민의 삶의 터전과 목숨까지 바쳐가면서 유지해온 주한미군, 과연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걸까요.”(이은혜 전 민중당 대변인, 유튜브 ‘미군없는 내고향’ 4편, 2020년 7월 28일)

 

 

효순미선평화공원을 떠나 동두천시를 향했다. ‘기지촌 1번지’로 불린 도시. 1992년 10월 28일 이곳에서는 또 하나의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주한미군 케네스 마클이 기지촌 여성 윤금이를 잔혹하게 살해한 것. 끔찍한 죽음 이후 사건 조사 과정에서 불평등한 한미관계의 문제점이 불거지면서 국민들의 분노를 샀다.

 

“무슨 잘못이 네게 있어/ 이 슬픔 모두 남겨두고/ 무슨 잘못이 네게 있어/ 그렇게 아프게 떠나갔니/ 보산리 그 겨울에/ 남겨둔 상처가 너무 많아/ 그 추운 겨울 지나/ 봄을 찾아 떠나갔니/ 너 떠나간 이 빈 거리에/ 늦은 별빛이 떨어지면/ 지워져도 잊을 수 없는/ 우리들 슬픔 그림자.”(이지상 노래 ‘보산리 그 겨울’ 중)


그동안 외면당해온 기지촌 여성과 주한미군 범죄의 심각성을 보여준 사건. 윤금이 씨 살해사건은 우리 사회가 기지촌에 주목하게 되는 계기가 됐고,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의 결성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줬다.

 

 

지금의 보산동은 ‘캠프 보산(CAMP BOSAN)’이란 이름으로 외국인관광특구가 됐다. 미군들을 상대로 영업하던 클럽과 가게, 음식점 등은 여전하지만, 길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다양해졌다. <부끄러운 미군문화 답사기>에서 “과거에는 대부분의 여성이 한국인이었으나 최근에는 필리핀, 러시아 여성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한국 여성은 20% 미만으로 줄어들었다고 한다”(152쪽)라고 설명한 대목이 떠올랐다.


보산동 외국인관광특구에는 ‘캠프보산 월드 푸드 스트리트’가 조성돼 있고, 건물마다 거대한 벽화들이 그려져 있다. 2015년부터 동두천시가 도심재생사업으로 진행한 ‘캠프보산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결과다. 케네스 마클이 윤금이를 살해하기 전 들러서 술을 마셨다는 클럽에도 큰 벽화가 그려져 있다.

 

 

“상가 임대”라고 써 붙여둔 점포들이 즐비한 쓸쓸한 거리를 지나, 윤금이가 살았고, 또 죽은 곳으로 짐작되는 집터에 섰다. 거미줄처럼 얽힌 좁은 골목길에서는 지금도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1992년 그날, 이 골목길을 걸어간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그들은 어떤 이름으로 어떤 꿈을 간직하고 살았을까.

 

“효순이 미선이, 그리고 윤금이를 각자의 방식으로 알게 되고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이 삶의 마지막 날 걸었던 길을 직접 걸어보는 것은 설명하기 힘든 차원의 엄청난 느낌을 주죠.”(이은혜)


효순이 미선이가, 그리고 윤금이가 마지막으로 걸어간 길을 우리도 걸었다. 너무 가슴 아픈 기억들이지만, 답사를 마치고 난 기분은 뜻밖에도 그리 무겁지 않았다. 어쩌면 이곳에서 만난 것은 효순이 미선이나 윤금이가 아니라, 그들의 이름을 외치며 함께 거리에 서던 그때, 그날의 내 자신이 아니었을까.

 


- 월간 작은책 2020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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