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그룹 막장드라마, 순환출자 끊는다고 개선 안 된다”
Q 롯데가 형제들의 경영권 분쟁이 세간의 화제였습니다. 덕분에 경제를 잘 모르는 사람들도 이제는 ‘순환출자’라는 말은 많이들 알게 됐습니다.
‘순환출자’는 재벌의 소유구조 문제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단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과장된 개념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환상형 순환출자’는 계열사 A → B → C로 출자가 이어지다가 다시 C → A로 한 바퀴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A, B, C의 자본금을, 새로운 돈을 들이지 않고도 계속 늘릴 수 있는 거죠. 외부 주주의 지분율을 희석시키면서, 총수 일가의 지배력을 강화할 수 있는 ’가공자본‘ 창출 효과가 있습니다. 실제로 소액주주에 불과한 총수 일가(롯데그룹 총수 일가의 지분율은 2.41%다 - 기자 주)가 그룹 전체를 황제처럼 지배할 수 있는 비밀이 여기 있다고 보통 이해되고 있거든요.
그런데 오해가 있어요. 가공자본 창출 효과, 또는 레버리지(지렛대) 효과는 환상형 순환출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계열사 출자에 다 있습니다. 모회사가 자회사의 지분을 100% 가지지 않는 한, A → B → C로 출자가 이어진 다음에 다시 C → A로 돌아오지 않더라도 가공자본 창출 효과는 발생하는 거죠. “총수 일가가 ‘순환출자를 통해서’ 그룹 전체를 지배한다”라고만 말하면 오해를 낳을 수 있는 겁니다. 롯데그룹의 경우 80개 국내 계열사 사이에 416개의 순환출자가 존재합니다. 우리나라 61개 재벌 중 환상형 순환출자가 있는 재벌은 11개이고, 그 순환출자 중 90%가 롯데그룹에 있습니다. 재벌 중에서도 굉장히 특이한 경우예요.
그런데 모든 순환출자가 총수 입장에서 중요한 건 아닙니다. 실제로 롯데그룹의 경우에는 지분율이 1%도 안 되는 고리들이 있어요. 놀라지 마십시오. 불과 2년 전만 하더라도 롯데그룹에는 순환출자가 9만5033개가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100주짜리도 있었어요. 그런 건 그날로 바로 끊을 수 있는 거죠. 그래서 2년 만에 9만5033개에서 416개로 줄어든 겁니다. 그렇게 순환출자는 엄청나게 줄었지만 롯데그룹의 소유구조가 더 투명해진 것도 아니고, 총수 일가의 지배력이 약화된 것도 아니라는 거죠.
순환출자가 문제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것만 끊는다고 재벌의 소유구조가 개선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된 겁니다. 그럼 롯데그룹의 소유구조 문제는 뭐냐? 바로 국내 계열사 80개 중 상장회사는 8개밖에 안 되고, 한국 롯데를 지배하는 일본 롯데가 다 비상장회사라는 점입니다. 외부 주주나 이해관계자들은 이 그룹의 의사결정구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알 수가 없는 거죠. 그런 게 오히려 더 중요한 문제죠.
Q 최근 언론에 ‘소액주주’라는 말도 참 많이 등장합니다. 바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사태 때였는데요, 결국 합병 쪽으로 정리가 됐습니다. 이 문제 역시 이건희-이재용으로 이어지는 경영권 문제라고 보는 사람이 많은데, 이 사태의 시사점을 어떻게 정리하면 좋을까요?
정말로 많은 문제점들이 있었습니다만, 물론 불법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삼성이 정말 착각했습니다. 법을 지켰다고 해서 시장과 사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주총 결과는 7:3이었습니다. 합병 찬성이 69.53%였는데, 합병과 같은 중요한 사안은 참석 주주의 2/3, 66.67% 이상의 찬성을 받아야 됩니다. 2% 정도 간신히 넘은 겁니다. 일부 언론들이 ‘삼성의 압승’이라고 표현한 것은 정말 터무니없는 오보입니다. 가까스로 이긴 겁니다. 수박과 빵 사들고 주주들을 가가호호 방문하는 전략이 아니었다면, 또는 자사주를 KCC에 넘기는 무리한 방법을 동원하지 않았다면 삼성이 이기지 못했을 겁니다.
삼성도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법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시장과 사회의 승인을 받는 방식으로 일을 해야만 된다’는 걸 깨닫게 됐을 겁니다. 이것이 삼성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중요한 힘이 되고 있어요. 그 과정에서 삼성은 배당을 올리고 거버넌스위원회 등 주주친화적 정책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과 두 달 전에는 상상도 못한 일입니다. 과거 어떤 국회의원도, 어떤 행정기관도 하지 못한 일입니다. 이게 바로 시장의 힘이고, 이 힘을 더욱 활성화하고 정상화하는 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지속가능한 개혁이라고 생각합니다.
Q 재벌개혁을 우리 사회 경제민주화의 출발점이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많은 문제들 중에 재벌개혁이 그 출발점에 서게 된 이유는 뭘까요?
재벌의 성장 과정은 특혜와 반칙으로 얼룩진 비정상적인 과정이었지만, 1960년대부터 30년 동안에는 성장의 성과가 빠르게 확산되는 시기였어요. 이른바 낙수효과죠. 그렇기 때문에 특혜와 반칙을 용인해줄 수 있었는데, 비정상적으로 성장한 재벌들이 자신들의 성장을 이끈 생태계를 파괴하기 시작했습니다. 시장의 힘을 억압하는 시스템을 유지하려고 함으로써, 정치-경제-시민사회의 보완관계를 파괴하는 ‘포식자’의 지위에 이른 것이죠. 낙수효과는 실종됐습니다. 그래서 재벌은 성장하지만 국민은 가난해지는 양극화를 낳았습니다. 선순환의 생태계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재벌의 힘이 오남용되는 것을 막는 게 무엇보다 시급합니다.
Q 1990년대 경제개혁연대의 전신인 참여연대 경제민주화위원회부터 재벌개혁운동이 시작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난 20여 년을 돌아볼 때 재벌개혁운동이 이뤄낸 최고 성과라고 할 만한 것은 무엇일까요?
장하성 교수님이 참여연대 경제민주화위원회를 만든 것이 1996년이니까, 내년이면 딱 20년 됩니다. 가장 중요한 성과라고 자부하는 것은 1999년에 이건희 회장을 비롯한 삼성전자의 10명의 이사들을 상대로 주주대표소송을 해서 6년간의 소송 끝에 2005년에 승소 판결을 받은 것이죠.(주주대표소송 : 경영진의 불법행위로 회사가 손해를 입었을 경우 주주들이 경영진을 상대로 회사에 배상할 것을 요구하는 공익소송. 2005년 대법원은 회사자금을 이용한 뇌물공여·주식 저가 매각 등으로 주주들에 의해 피소된 삼성전자 경영진들에게 190억 원을 배상하라는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내렸다. - 기자 주)
법원 판례의 힘은 대단합니다. ‘이것은 위법이다’라고 딱 쓰면, 그걸 반복할 바보 같은 기업인은 없다는 겁니다. 이후에도 불법정치자금 문제는 이슈가 됐지만, 그때마다 기업인들은 ‘회사 돈이 절대 아니다. 총수의 사재다. 그것을 주인도 모르게 머슴이 갖다줬다’라고 하잖아요. 그 돈이 회사 돈이라고 하는 순간 손해배상 해야 되고, 세금 내야 되고, 형사적으로도 문제가 되고, 모든 것에 걸려들게 되는 겁니다. 그게 다 삼성전자 주주대표소송에서 나온 겁니다. 기업들의 정치자금 관행을 혁명적으로 바꾼 판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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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에 메시아는 없다!’ 정치인들 고백해야”
Q 책에 ‘노무현 정권과 이명박 정권 모두 주요 지지층으로부터 실패한 정부로 평가받을 것’이라고 썼습니다. 박근혜 정권도 이제 ‘전반전’이 지났는데, 박근혜 정권은 지지자들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을까요?
또 하나의 ‘실패한 정부’가 예정돼 있죠. 진보개혁진영이 실망하는 것 못지않게 보수적인 분들도 실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경제의 문제점들은 10년, 20년 동안의 일관된 노력을 필요로 하는 장기적인 과제들입니다. 우리나라 대통령들은 장기적인 과제들을 자기 임기 5년 안에 다 해결하겠다고 공약을 해버려요. 그걸 믿고 싶어 하는 다수의 유권자들은 그 사람을 대통령으로 찍어줍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결하겠습니까?
더군다나 대통령 취임 첫해가 경제가 가장 안 좋습니다. 전임 대통령들이 경제를 망쳐놨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1, 2년 정도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덧 남은 임기가 별로 안 되는 겁니다. 실적에 대한 초조감에 몰린 대통령이 장기적인 과제를 포기해버리고 다시 한번 재벌과 타협함으로써 단기 성과를 끌어올리는 쪽으로 회귀하거든요. 이게 진보정부든 보수정부든 공히 실패하는 길이었습니다.
이 함정을 탈출하려면,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는 단기간에 해결할 수 없는 거라는 사실을 정치인들이 먼저 고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메시아와 같은 정치인은 존재할 수 없다는 걸 정치인들이 먼저 고백함으로써, 유권자들이 인내심을 가지도록 만들어줘야 합니다. 지금 정치인들은 모두 ‘내가 메시아가 될 수 있다’, ‘나에게 권력을 주면 내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겠다’라는 식으로 얘기하는데, 그게 유권자들의 인내심을 없애버리는 겁니다. 그런 악순환을 정치인들이 먼저 만들어가고 있는 겁니다.
Q 지금의 정치인들이 그런 고백을 쉽게 할 것 같지는 않은데요. 당장 눈앞의 선거에서 당선되기 위해서는 무조건 국민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부터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별로 기대는 안 합니다. 경제개혁연대가 하는 소액주주운동의 장점이 정부나 국회가 뭘 안 해줘도 자기가 직접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시민사회운동의 일반적인 방법은 국회를 찾아가서 입법을 요구하거나, 그 법을 행정기구가 집행하도록 압박하는 거죠. 그런데 소액주주운동은 자기가 직접 주주총회에 가서 발언을 하고 주주제안을 하고 대표소송을 합니다. 국회나 정부가 개혁에 무관심하더라도, 자기가 직접 법에서 부여한 권리를 가지고 현실 문제에 개입할 수 있고, 작지만 후퇴하지 않을 성과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게 소액주주운동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87년 정치민주화 이후 거의 3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경제민주화를 추구하는 방식이 87년의 사고 틀에 묶여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고 있어요. 저는 21세기 상황에서는 지금까지 ‘침묵하는 다수’로 있어온 국민들을 ‘행동하는 다수’로 만드는 것이 진정한 경제민주화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별 볼일 없는 개미들이 모여서 기업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성공의 경험을 보여줌으로써, 침묵해온 다수들도 자기 권리를 스스로 행사하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방법론을 보여주는 게 소액주주운동의 가장 큰 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Q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 재벌개혁으로 대표되는 경제민주화였습니다. 이제 임기 절반이 지났는데, 단순하게 학점으로 표현하자면 몇 점을 주시겠습니까?
F학점입니다. 2012년 대선 때는 경제개혁연대에서 저희가 회의하면서 이런 말도 했어요. “누가 대통령이 되든 곧 우리 팀은 해체해야 된다.” 저희가 이야기한 것들이 두 후보에 의해서 다 공약이 됐거든요. 하지만 역시 세상이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됐죠.(웃음)
하지만 사실 박근혜 대통령이 공정거래법에 대해 약속한 것들, 일감 몰아주기 규제, 신규 순환출자 금지, 공정위의 기소독점 완화, 하도급 완화 등은 거의 다 이뤄졌어요. 금융, 상법 쪽이 전혀 성과가 없어서 그렇지, 공정거래법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은 대부분 이행됐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점을 F로 매길 수밖에 없는 것은, 경제민주화라는 것이 정치지도자 한 사람의 말 한마디로 표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국민이 경제민주화를 냉소하게 만든 것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실패한 대통령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Q 한때는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소득주도 성장’ 정책을 들고 나오기도 했습니다. 보수진영의 구호로서는 좀 낯선 것이었는데요.
‘보수’라는 게 혁신과 개혁은 하지 않지만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 점에서 학습능력이 보수의 가장 큰 강점일 수도 있어요. 한국의 보수가 그 단계까지는 간 게 아닌가 생각해요.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의 경제민주화, 복지국가 공약, 다 진보의 어젠다였는데 자기의 대표상품으로 만들어버렸죠. 창조 이상의 모방능력을 보여줬죠. 최경환 부총리의 ‘초이노믹스’ 역시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의 대표 어젠다 중 하나였죠. 기업 이익을 임금으로든 주주 배당으로든 가계로 보낸다는 것 아닙니까? 한국의 보수는 진보의 어젠다도 자기 용어로 흡수하면서 유권자들의 마음을 얻는 학습능력을 갖춰가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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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식자 된 재벌, 자신의 성장 생태계 파괴했다”
Q 8월 6일에 박근혜 대통령이 이른바 ‘4대 개혁’에 관한 담화를 발표했습니다. 임금피크제와 노동시장 유연화를 대표로 하는 ‘노동개혁’을 주장했는데, ‘소득주도 성장’과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보입니다.
초이노믹스는 사실상 끝났다고 봐야죠. 작년 말, 올해 초까지만 하더라도 외국인 투자자들의 가장 큰 이슈는 ‘박근혜 정권이 진짜 배당정책을 강화할 것 같으냐’라는 거였어요. 한국에서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얘기니까요. 그만큼 기대가 있었어요.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그 방식은 이제 접고, 재벌 팔을 비틀어서 투자하고 고용하게 만드는 구래의 톱다운(Top-Down) 방식으로 돌아간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당연히 과거에도 그래왔듯이 재벌들은 거기에 화답하는 모습을 보이겠지만, 약속한 것 지키는 재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몇 년 안에 얼마 투자하고 얼마 고용하겠다’ 하지만, 그때 되면 대통령이 바뀌어 있을 거니까요.
이런 식이야말로 재벌개혁을 실패로 이끄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재벌들이 ‘이 흐름을 일탈하게 되면 내가 얻는 이익보다 비용이 더 크다’라고 믿게 만들어야 개혁이 성공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이 쓰는 방법은, 재벌들이 ‘국회의원이 뭐라 하고 시민사회가 뭐라 하든 대통령 찾아가서 그 앞에서 약속하고 방향을 바꿔버리면 그만이다’라고 생각하게 한다는 거죠. ‘사회가 만든 규칙을 따라가는 것보다 대통령한테 얘기해서 규칙을 바꿔버리는 게 더 유리하다’는 교훈을 준단 말이죠. 그런 점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경제 살리기 정책은, 단기적으로 경제를 살리지도 못할 뿐 아니라 장기적으로 개혁을 실패하게 만드는 길입니다.
Q 참 재미있는 것이, 8월 6일 박근혜 대통령의 담화가 있은 뒤에, 하루 뒤인 7일 롯데그룹이 즉각 청년고용 2만4000명을 약속했습니다. 7월 말에는 한화와 SK가 청년고용과 창업지원을 약속했는데, 공교롭게도 각각 경영권 분쟁과 총수 특별사면이라는 이슈가 있는 회사들이었습니다.
그 세 기업이 정말로 원래 계획에 없던 투자와 고용을 한다면 그거야말로 배임행위라고 생각합니다. 계획이라는 게, 현재 경제환경 속에서 기업에 최선의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정해놓은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총수의 특별사면과, 총수의 경영권 분쟁 승리를 위해서 대통령의 요구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회사와 주주의 ‘최선의 이익’을 해치는 결정이고, 그거야말로 주주대표소송으로 책임을 물어야 할 일이죠. 하지만 제가 소송을 하게 될 일은 없을 거예요. 그들은 약속한 대로 안 할 것이기 때문에. 과거에도 일시적인 ‘팔 비틀기’에 의한 약속은 실천된 적이 없습니다. 기업 스스로가 그것이 합리적인 길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어요.
Q 책에서 ‘개발독재 모델이 가지는 정치적 질서정연함과 경제적 효율성에 대한 향수로 박정희 신드롬이 나타난다’고 분석하신 바 있습니다.
재벌 성장의 초반 30년 동안에는 경제권력 위에 정치권력이 있었고, 그게 바로 박정희였습니다. 사회의 여러 세력을 폭력적인 방식으로 통합하고 그걸 통해서 희소한 자원을 가장 효율적인 데에 투입하는 방식으로 30년 동안 성장해왔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성장의 결과가 성장의 조건을 파괴했습니다. 더 이상 한국사회는 정치권력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이 절대 아니라는 거죠. 저는 박정희 신화에 대해 “박정희의 성공이 그 성공의 조건을 파괴했다”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박정희 시대를 그리워하고, 당시 재벌의 효율성을 지금도 유효한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시대착오라고 생각합니다.
Q 그렇다면 경제문제에 있어서 조정과 통합의 새로운 주체는 누가 돼야 할까요? 결국 또 대통령인가요?
나라마다 시장의 역할과 그 역할을 수행하는 방식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시장이 하지 못하는 일을 정부나 시민사회가 해야 되는데, 시장-정부-시민사회가 결합된 방식은 나라마다 다릅니다. 21세기 한국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조정과 통합의 방식은, 기본적으로 경제문제는 시장의 역할을 통해 해결하되 시장을 어떻게 구성할 것이며 정부와 시민사회가 시장과 어떻게 결합할 것인지는 정치에 의해서 결정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정치가 해야 할 역할은 결코 줄지 않았습니다.
10년도 더 된 일인 것 같다. TV 채널을 돌리다가 도올 김용옥 선생이 기자와 대담하는 걸 보게 되었는데, 솔직히 대담 주제가 뭐였는지는 기억도 안 난다. 하여튼, 주거니 받거니 신나게 이야기를 풀어가다가, 마지막에 기자가 “그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은 뭡니까?”라고 묻자, 도올 선생이 “너(언론)랑 나(지식인)만 잘하면 돼!”라고 답했다. 무릎을 탁 쳤다. 정말로 우문에 현답이다. - 2015. 8. 12. 김상조 교수의 경향신문 칼럼 <"너랑 나만 잘하면 돼">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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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신동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