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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런아 얼른 태어나, 너 '디스'한 사람 알려줄게

긴 글/생활글

by 최규화21 2014. 3. 2.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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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런아 안녕? 나는 네 아빠야. 아빠는 방금 장어를 구워 먹고 네게 이렇게 편지를 쓴단다. 네 할머니가 네 엄마한테, 장어 먹고 힘내서 너를 잘 낳으라고 멀리서 보내주신 거야. 네가 나올 줄 알았던 ‘예정일’이 이틀 지난 오늘, 엄마 아빠는 아직 너를 기다리고 있단다.


좀 유치한 생각이라는 거 잘 알지만, ‘엄마 아빠’라고 쓰고 보니 좀 억울하구나. ‘가나다’순을 거스르면서까지 아빠보다 엄마를 먼저 쓰는 것이 보편화돼 있다는 사실이 말이야. 안 그래도 너는 지난 열 달 동안 엄마 배 속에서 24시간 엄마랑 붙어 지내고 있지 않니. 아빠가 회사에 가고 엄마랑 둘이 있을 때, 엄마가 태담을 핑계로 아빠에 대해 어떤 흑색선전을 할지 걱정이란다.


네가 세상에 나오고 아빠랑 좀 더 친하게 지내다보면, 아빠도 꽤 좋은 사람이란 걸 알게 될 거야. 지금도 가끔 엄마 배 위로 네 엉덩이를 사랑스럽게 톡톡 두드리거나, 발바닥을 간지럽히면서 유쾌하게 장난을 거는 사람이 있을 거야. 그게 바로 아빠란다. 엄마 배 밖으로 나오면 더 화끈하게(?) 놀아줄게. 지금 엄마랑 더 친한 건 다 이해할게. 하지만 나중에 엄마한테만 안기고, 아빠가 안았을 때 울고 그러면 안 돼.


네가 배가 고플 때 아빠를 버리고 엄마만 찾더라도 그건 이해할게. 다른 건 몰라도 네 ‘맘마’는 아빠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거니까. 엄마는 너한테 소젖이 아닌 엄마 젖만 먹이고 싶대. 아빠도 잘 모르고, 넌 아빠보다 더 모르겠지만, 그게 엄청 힘들고 운도 좋아야 하는 거래. 너 튼튼하게 키우려고 엄마가 큰 각오를 한 거야. 그러니 ‘맘마’ 부분에 있어서는 네가 아빠를 버린다 해도 이해하겠다는 거야.


말이 나와서 말인데, 요즘 네 엄마는 머릿속에 너를 잘 키우려는 생각밖에 없는 사람 같아. 명품 아기용품 같은 걸 사고 ‘돈지랄’ 하는 건 아니고, 네가 먹고 싸고 놀고 자랄 때 필요한 모든 것들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늘 공부하고 연구한단다. 너를 낳는 순간부터 그렇지. ‘남들 하는 것처럼’ 병원에서 낳지 않고, 네가 나오는 순간부터 존중받으며 나오기를 바라며 ‘자연주의 출산’이란 걸 선택했으니까. 엄마 젖으로만 너를 먹이고, 천기저귀를 쓰고, 플라스틱이 아닌 천과 나무로 직접 만든 장난감만 네게 주려 하는 것도 그래.


네가 나올 거라 예상한 날짜가 지나고도 네가 나오지 않아서 엄마는 좀 초조한 모양이야. 아빠도 많이 궁금하긴 하다. 네가 안에서 어떻게 있는지. 너무 시간이 지나면, 지금 네가 마시고 있는 양수가 부족해져서 네가 위험해질 수도 있대. 그리고 네가 너무 커지면 엄마 몸 밖으로 나올 때 엄마와 네가 너무 힘들어질 수도 있다 하고. 아, 너무 걱정해서 발을 동동 구르고 그런 건 아니니 너도 걱정하지 마.


다만 엄마가 그동안 너를 병원에서 낳지 않으려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애써온 건 알지? 네 힘으로 나올 수 없을 정도로 시간이 흘러서, 결국 병원에 가야 하는 일만 없었으면 좋겠어. 그럼 엄마가 많이 속상해할 거야. 엄마는 속상하면 막 울거든. 아빠가 너보다 먼저 엄마랑 살아봐서 아는데, 엄마가 울면 분위기가 되게 난처해져. 네가 태어나자마자 그런 상황을 겪지는 않도록, 눈치껏 오늘내일 나와준다면 참 좋을 거야.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앞으로도 엄마가 울지 않도록 착한 딸이 돼주기를 바라. 너도 나중에 차차 알게 되겠지만, 네 엄마는 아빠한테 애인이었거든. 아, 지금도 애인이지, 사랑하는 사람. 누가 엄마를 막 울리고 힘들게 하면 아빠는 되게 슬프고 마음이 아플 거야. 홈런이 너도 아빠가 사랑하는 네 엄마를 울리지 않도록 잘 협조해주길 바라. 엄마랑 한번 살아보면 알겠지만, 엄마가 웃어야 우리가 다 웃을 수 있어.


어떤 사람들은 네가 태어나면 ‘좋은 시절 끝나는 거’라고 너를 ‘디스’하던데, 네가 나오면 그 사람이 누군지 다 말해줄게. 울든 똥을 싸든 침을 흘리든, 네가 할 수 있는 복수를 나름대로 해보렴. 태어나지도 않은 딸에게 복수심을 가르치는 아빠란 놈의 정체가 궁금하지? 그럼 얼른 나와. 아빠 엄마는 장어도 먹고 ‘준비완료’야. 네가 튼튼하고 씩씩하게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을 누구보다 기뻐해줄게. 홈런아, 보고 싶어!



* 언론노조 오마이뉴스지부 노보 <소겨리>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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