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당신은 마르지 않는 ‘이야기’의 샘물입니다
[서평] 신현락 산문집 <고맙습니다, 아버지>
솔직히 식상했다. ‘아버지’라는 말에 ‘고맙습니다’가 붙었으니 제목만 봐도 어떤 책인지 뻔한 것 아닌가. 보나마나다 싶어서 책을 내려놓으려다 ‘그래도 한번’ 하는 생각으로 아무데나 책장을 넘겨봤다. 그렇게 우연히 펼쳐 읽은 글의 제목이 ‘똥봉투’. 채변검사 날, 초등학교 교사가 된 아들이 학생들의 똥을 보고 “네 똥 참 예쁘구나” 하고 말한다. 그런데 그 말투가 “우리 아들 똥 색깔 참 예쁘네” 하던 아버지의 말투와 닮아 있었다는 얘기. 우연히 읽은 이야기가 참 재미있었다. 나는 책의 맨 앞으로 돌아와 읽기 시작했다.
<고맙습니다, 아버지>는 신현락 시인이 쓴 산문집이다. 아버지를 주제로 쓴 50여 편의 산문이 묶여 있다.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지만 아버지의 삶을 일대기적으로 옮겨 쓴 글은 아니다. 한 편 한 편의 완결된 글 속에 아버지와 저자가 쌓은 추억이 한 장면씩 독립적으로 담겨 있다. 제목이 주는 식상함을 깨뜨릴 수 있었던 것은 그런 구성 덕분이다. ‘아버지와 나’를 주인공으로 한 옴니버스 영화를 보는 느낌이랄까? 50여 편의 다른 에피소드들로 채워져 있지만,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그리움이 전체를 하나로 엮는다.
내가 이 책 읽기를 망설인 이유는 또 있었다. 나는 시인의 산문을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 혼자만의 정서를 지겹도록 파고 들어가거나 지나치게 관념적인 말들을 남발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니면 말도 안 되게 배배 꼬인 문장으로 독자들의 집중력을 시험하기나 하는 경우를 너무 많이 봐왔다.
하지만 신현락 시인의 문장은 독자를 괴롭히지 않으면서도 말의 아름다움을 맛보게 한다. 그리고 혼자만의 감상에 빠지기보다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구체적인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저자는 저자의 아버지를 그려놓았지만, 독자들은 마음속으로 저마다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려보며 같이 울고 웃고 그리워할 수 있을 것 같다. 모두 다른 아버지, 모두 다른 경험을 가진 독자들이 하나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것은, 저자가 감상을 내세우지 않고 이야기를 충실히 보여주려 노력한 덕분일 게다.
1~3장에는 저자의 출생부터 아버지의 죽음까지 30여 년 아버지와 저자가 쌓은 추억들이 담겨 있다. 그 추억에 빠져 함께 걷다보면 4장, 저자가 교사로 일하며 본 ‘학생들의 아버지’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그렇게 외부로 확장된 ‘아버지’ 이야기는 5장에 가서 독자 자신의 이야기로 집중된다. 돌아가신 아버지을 향해 남긴 그리움의 말들을 따라 읽다보면 어느새 그 슬픔의 조각을 자신의 가슴에 대어보게 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아버지를 “살아 숨 쉬는 경전”(152쪽), “마르지 않는 행복의 샘물”(261쪽)이라 표현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세상의 모든 아버지는 ‘살아 숨 쉬는 역사’, ‘마르지 않는 이야기의 샘물’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나도 아버지와 나 사이에 살아 숨 쉬는 그 숱한 이야기들을 글로 옮겨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아마도 이 책은 나와 아버지를 마주 앉게 해준 고마운 책으로 내 기억에 남을 것 같다.
* <고맙습니다 아버지> 신현락 씀, 지식의숲 펴냄, 2013년 9월, 272쪽, 1만3000원
* <삶이보이는창> 2013년 11-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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