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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인권, 교문 밖의 어른들을 위한 ‘의미의 다툼’

긴 글/리뷰

by 최규화21 2011. 7. 17.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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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생인권, 교문 밖의 어른들을 위한 ‘의미의 다툼’
   [서평] <인권, 교문을 넘다>

 

 

  고등학교 1학년 수학 시간. 선생님이 칠판에 문제를 몇 개 써놓고 학생들을 불러내서 풀게 했는데, 재수 없게 내가 걸렸다. 내 수학 점수는 20점대. 풀 수 있을 리 없었다. 잠깐 고민하다가 “모르겠는데요” 했다.
  “이 새끼, 이런 것도 모르나? 손바닥 대!”
  지각을 하거나 땡땡이를 치거나 교칙을 어겨서 맞는 건 그렇다 쳐도, 답을 ‘모른다고’ 맞는 건 이해가 안 됐다. 손바닥을 맞는다고 모르던 답을 알게 되는 것도 아닌데……. 못 맞겠다고 했다. “죽고 싶냐”고 다그치는 선생님한테 “모르는 게 죄는 아니잖아요” 했다. 선생님은 ‘두고 보자’는 표정으로, 나보고 교실 뒤에 가서 ‘엎드려 뻗쳐’ 있으라고 했다. 수업이 끝나자 선생님이 나한테 물었다.
  “아직도 니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나?”
  당연히 모르지. 선생님이 어떤 대답을 원하는지는 알았지만 내가 뭘 잘못했는지는 정말 알 수 없었다. 결국 나는 그 자리에서 ‘학생의 본분’과 ‘입시의 중요성’에 대한 길고 긴 훈화 말씀을 들어야 했다.
  그때 나는 인권이라는 말도 몰랐다. 청소년에게 그런 걸 알려주는 책이 있었다면, 선생님 훈화 말씀을 그저 듣고만 있지는 않았을 거다. <인권, 교문을 넘다>와 같은 책이 그때도 있었다면 말이다. “학생인권쟁점탐구”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2003년에 나온 <인권은 교문 앞에서 멈춘다>의 속편쯤 된다. 그 책이 학생인권 침해의 실태를 세상에 고발했다면, <인권, 교문을 넘다>는 한 발 더 나아가 학생인권을 ‘쟁취’하기 위해 필요한 논리들을 조목조목 정리해놓았다.
  1부에서는 학생인권에 대한 문제의식을 던져주고, 2부에서는 두발 자유, 체벌, 휴대전화 단속, 복장 단속, 집회의 자유 등 학생인권을 둘러싼 논쟁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주제들에 대해 세부적으로 따져본다. 그리고 3부에서는 앞서 살펴본 내용들을 관통하는 논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준다. 구성이 이러니, 바쁜 사람들은 3부만 읽고 이 책을 다 읽었다고 말하는 ‘꼼수’를 부릴 수도 있을 것도 같다.
  교사들이 함께 만든 책이라 그런지 딱 교과서식 구성으로 이뤄져 있다. 특히 한 단원(?)이 시작할 때마다 ‘학습목표’를 던져주고, 끝날 때마다 재미있는 일러스트와 함께 ‘토론거리’를 던져주는 부분에서는 정말 다시 학생으로 돌아가 교과서를 보며 공부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가? 300쪽 정도밖에 안 될 뿐더러 다양한 일러스트와 사진으로 학습의욕을 북돋아주는 이 책 한 권을 읽는 데 한 달이나 걸렸다. 물론 앞서 고백한 내 수학 성적이 말해주듯 내 학습능력에도 문제가 있지만, 한마디 한마디 철저히 복습하고 곱씹어야만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게 만드는 이 책의 흡입력 때문이었다. 특히 2부를 읽을 때는, <100분 토론> 뺨치는 속 시원한 ‘말빨’에 빠져 혼자 무릎을 치기도 했다.
  예를 하나만 살펴보자. 경기도 학생인권조례 가운데 가장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그 때문에 최종적으로는 조례에서 누락돼야 했던 ‘집회의 자유’에 대한 부분이다. 선도부가 교문 앞에서 “지각을 하지 말자”는 팻말을 들고 있는 것은 칭찬을 듣지만, 그 팻말의 구호가 “두발 자유 실시하라”로 바뀌는 순간 징계를 받게 되는 모순을 두고 이 책은 이렇게 결론 내린다.

 

  결국, 학교가 금지하고 싶은 것은 집회나 집단행동이 아니라 학생의 자유다. 학생들이 자기 의견을 갖는 것, 학교나 정부에 의문을 품기 시작하는 것, (줄임) 바로 그 자유를 불편해 하는 것이다. 요즘 학생들은 너무 개인주의적이다, (줄임) 혀를 끌끌 차지만, 정작 학생들이 모이고 공동의 의견을 형성할라치면 공부에 방해된다, 정치화된다며 막을 구실을 찾기 시작한다. 원자적 개인으로 흩어 놓기 위해 안달하면서 개인주의를 탓하는 것은 모순 아닌가?      
    
  그래도 집회라는 말만 들어도 뒷걸음질 치는 사람들에게는 역사적인 증거까지 덧붙여 설명한다.

 

  ‘학생독립운동 기념일’로 지정되어 있는 11월 3일은 1929년 광주에서 중 ․ 고등학생들이 일본의 식민지 교육에 저항하여 대규모 집회를 열고 동맹휴학이라는 집단행동을 벌였던 날이다. (줄임) 3 ․ 1운동의 상징인 유관순 씨도 당시 청소년의 나이였다.

 

  그렇다. 달력에 버젓이 ‘학생의날’이라고 표시돼 있는 11월 3일은 그런 날이었다. 그리고 국경일에 국가공휴일로 지정해 태극기도 달고 해마다 정부에서 기념식까지 하는 삼일절도 청소년들이 당당히 거리로 나서서 ‘집회’를 한 날이었다. 이 책은 그밖에도 1960년 4 ․ 19혁명과 1980년 5 ․ 18광주민주화운동, 1980년대 말 민주화운동 때도 청소년들은 교문 밖으로 나와 민주주의의 전진을 이끌었다는 사실을 덧붙이고 있다.
  그런데도 “학생에게 정치적 자유를 주면 정치인들에게 이용당할 수 있다”는 사람들에게는 친절한 예를 들어 반문한다.
 
  60대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관광을 보내 준 후보를 찍는 일이 일어난다고 해서 60대 전체의 투표권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학생이 정치에 이용당할까 봐 걱정한다면 더더욱 세상에 대해, 정치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반론에 반론을 거듭하는 이야기들을 따라가다보니, 이 책은 ‘학생의 인권을 위한 책’이 아니라 ‘어른의 인권을 위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학생인권 문제는 학생 문제가 아니라 인권 문제이기 때문이다. 학생인권 문제는 단순히 ‘학생들이 불쌍하니까 숨 쉴 틈을 좀 주자’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가치를 어디에 둘 것이냐’ 하는 차원의 문제인 거다.
  선도부의 캠페인은 괜찮고 두발자유 피켓시위는 안 된다는 논리는 월드컵 응원 때 거리로 나오는 건 괜찮지만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을 위해 희망버스를 타고 거리로 나오는 건 안 된다는 논리와 같다. 학교가 일방적으로 만든 교칙이라도 학생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논리는 국가가 국민의 행복에 반하는 법을 만들더라도 국민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논리와 같다. 그리고 교사가 몽둥이를 휘둘러서라도 학생의 기강을 잡아야 한다는 논리는 독재자가 총칼을 휘둘러서라도 국민을 통제해야 한다는 논리와 같다.
  또 청소년기는 미래를 위해 행복을 유예하고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시기라는 논리는, 20대 때는 대기업 취업을 위해, 30대 때는 결혼과 인사고과를 위해, 40대 때는 내 집 마련과 자식교육을 위해, 50대 때는 노후대비를 위해 행복을 유예한 채 평생 일만 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는 논리와 섬뜩하게도 닮았다. 
  학생은 인권은 몰라도 국영수만 잘 알면 된다는 논리가 유효한 것은 지금 우리 사회가 수능 잘 쳐서 명문대만 가면 인권 따위 몰라도 잘살 수 있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제 아무리 국영수를 잘해서 명문대를 나와도 인권을 모르고는 제대로 살 수 없는 사회라면 학생들은 당연히 인권을 배우고 경험하려고 ‘인권학원’도 다니고 ‘인권캠프’도 갈 거다.
  그래서 이 책은 학생인권을 둘러싼 논쟁을 “의미의 다툼”이라 정의한다. 인권을 몰라도 잘 먹고 잘살 수 있는 지금의 세상을 쭉 고수하겠다는 이들과 타인의 인권을 보장하는 방법을 알아야만 제대로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사람들이 ‘의미’를 놓고 다투고 있는 거다. 학생인권 문제는 이렇게 우리 사회 전반의 ‘의미 문제’와 결부시켜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다음 부분에서도 엿볼 수 있다.

 

  부모에게 얹혀사는 주제에 권리나 주장한다고 비난하기보다는, 부모는 자식 때문에 자기를 희생하고 자식은 부모 때문에 자신의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바꿔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지금 학생들이 겪고 있는 ‘인권의 박탈’을 먼저 경험한 이들이 누구인가를 떠올려보면 학생인권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답을 가늠할 수 있다. 고대의 노예들이나 근대 이전의 여성들이 그랬다. ‘말을 알아듣는 동물’이나 ‘남성의 부속물’ 정도였던 그들이 인간으로서 권리를 보장받게 되는 과정에는 언제나 그들의 저항과 실천, 그리고 사회의 구조적 변화가 함께했다.
  성에 안 차는 수준이기는 하지만 경기도에서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됐고, 서울시를 비롯한 다른 지역에서도 그런 움직임이 일어나는 것을 그 변화의 시작이라고 봐도 좋겠다. 이 책을 준비하기 시작한 2010년 5월은 지방선거를 앞두고 무상급식과 학생인권조례 때문에 온 나라가 시끌시끌하던 때다. 그 뒤로 1년이 조금 지난 2011년 6월에 이 책이 나왔으니 1년이 넘게 준비한 셈이다.
  그동안의 노력이 확실히 느껴질 정도로 ‘알이 꽉 찬’ 책인 것은 틀림없지만, 한두 달만 더 일찍 나왔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도 있다. 특히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주민발의로 추진하는 과정에서 서명 수가 모자라 최근까지 고생했다고 하니 더 그렇다.
  예전에 누가 술자리에서 나한테 “넌 학생인권조례 찬성이지? 현실을 모르네. 그거 하면 학교 개판 돼” 하고 따진 적이 있다. 그때 내가 어물어물 뻔한 소리만 해대고 뭐라 딱 부러지게 반박해주지 못해서 정말 창피했다. 이제 무려 한 달에 걸쳐 ‘학생인권 교과서’를 독파했으니, 자신 있게 그 사람한테 다시 술을 마시자고 연락해야겠다. 나처럼 어디서 말 못하고 답답했던 분들, 아직도 늦지 않았다. 이 교과서로 하는 공부는 성적 나쁘다고 손바닥 맞는 그런 공부가 아니니, 오늘이라도 교과서를 사서 부담 없이 공부를 시작하시길.

 


인권 교문을 넘다

저자
공현 지음
출판사
출판사 | 2011-06-07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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