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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인터뷰] 김민섭 “괴물의 손바닥 위에서 괴물의 욕망을 대리하는 사회”

긴 글/인터뷰와 현장기사

by 최규화21 2016. 12. 26.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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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인터뷰] 김민섭 “괴물의 손바닥 위에서 괴물의 욕망을 대리하는 사회”

※ 3단계의 점층적 형식으로 선보이는 ’프리즘 인터뷰’입니다. 삼각형의 틀을 통해 빛을 다채롭게 보여주는 프리즘처럼 작가와 책에 대한 이야기를 쉽고 다양하게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 기자 말

[프리즘①] 김민섭의 말, 말, 말

- “주인처럼 일해라, 하는 건 회사의 통제에 완벽하게 따르라는 것이에요. 열정착취보다 한 단계 더 진화한, 사람의 영혼까지도 회사에서 통제하는 영혼착취 아닌가 생각해요.”

- “‘나는 여기서 무엇으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은 모두는 ‘을의 앞을 막아서는 을’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구조를 바라보지 않고 개인만을 바라보기 때문에.”

- “박근혜를 ‘대리 대통령’이라고 표현하고 싶어요. 언제나 타인의 차를 운전해온 것 같고, 조수석에는 최순실이, 뒷좌석에는 재벌 총수들이 앉아 있었던 것 같아요.”

[프리즘②] ‘타인의 운전석’에서 읽은 대리사회의 진실


▷ 김민섭은 누구? : 2015년 ‘309동1201호’라는 필명으로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지방시)를 썼다. 그가 대학에서 연구자와 시간강사로 살아온 8년은 ‘유령의 시간’이었다. 자신의 노동을 증명할 수 없는 시간. 김민섭은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를 낸 뒤 대학을 그만뒀다. 자기가 겪은 걸 글로 썼을 뿐인데, 지금껏 아무도 그렇게 한 사람이 없던 탓에 ‘요란하게 대학을 나온 사람’이 됐다. 그가 택한 새로운 현장은 ‘타인의 운전석’이다. 대리운전기사로 일하며, 자신이 대학에서 보낸 시간은 ‘대리의 시간’이었다는 걸 새로 깨달았다. 이제는 김민섭이라는 본명으로 글을 쓴다.


▷ 어떤 책을 냈나 : 생계와 취재의 경계에 있었던 대리운전 노동. 그는 개인의 체험을 사회적 통찰로 옮기는 데 탁월한 재주를 가졌다. <대리사회>(와이즈베리/ 2016년)에서도 그 재주는 십분 발휘된다. 책에 실린 글 일부는 포털사이트 다음 ‘스토리펀딩’을 통해 먼저 독자를 만났다. 독자들은 1800만 원 이상의 후원금으로 작가를 응원했다.
소설가 장강명 작가가 추천사에 쓴, “독자를 반성하게 하면서도 분노와 증오의 감정은 일절 찾아볼 수 없는 선량한 문장을 존경한다”라는 문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사회에 대해서는 날카롭고 단호하지만, 사람에 대해서는 따뜻한 연대의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그의 문장. 그의 글은 마치 나쁜 사람들만 골라서 혼내주는 마음 약한 도깨비 같다.


▷ 인터뷰 뒷이야기 : “아 이거 술 한잔 해야 될 느낌인데요. 저녁 9시에 잡을걸.” 12월 15일 서울 서교동에서 김민섭 작가를 만났다. 시간은 오전 9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인터뷰 시간을 잘못 잡았다는 이야기가 김민섭 작가의 입에서 나왔다. 비슷한 나이에 비슷한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작가를 만난 것이 기자도 반가웠다. 가끔 인터뷰인지 술자리 방담인지 모를 이야기들도 격 없이 오고 갔다. 다음에는 정말 술잔을 앞에 놓고 만나자고 약속하는 것으로 인터뷰는 끝났다. 대리운전기사가 하루 일당을 포기하고 시간을 내준다면, 소주는 기자가 기분 좋게 한잔 사야겠다.

[프리즘③] 일문일답 들여다보기

Q 시간강사 생활을 그만두고 대학을 나와서 선택한 현장, 왜 대리운전이었습니까?


일단은, 저는 대학에서 논문만 읽고 썼잖아요. 쓰고 싶은 글들이 있었거든요. 한 1년 정도는 쓰고 싶은 글을 써보자고 생각했는데, 글로 먹고살기가 생각보다 힘들더라고요. 생계를 위해 노동이 필요했어요. 두 번째로, 저는 대학에서 보낸 시간을 유령의 시간으로 규정했어요. 그런데 대학을 나와서 보니까 자꾸 대리라는 단어가 제 주변을 떠돌더라고요. 주체라는 환상 속에서 타인의 욕망을 대리하면서 대학이라는 공간에 8년 동안 있었던 게 아닌가.


타인의 일을 대신한다는 것은 그만큼 주체성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이거든요. 대리는 노동의 본질일 거예요. 그런데 대리라는 단어가 붙은 노동이 대리운전밖에 없더라고요. 제가 지금까지 대학에서 보내온 대리의 시간을 규정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저를 다시 규정하기 위해 이 노동이 뭔가를 줄 거라는 기대감이 있었어요.

Q <대리사회>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체험을 바탕에 두고 있지만, 자신의 체험에서 한 발씩 물러나서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사유하고 있습니다. 특히 일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일에 매몰되기 마련인데, 그런 ‘거리두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저는 대학에서 ‘나는 여기서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한 번도 안 했거든요. 생계를 위한 공간으로 밀려나고서야 객관화를 해서 나를 바라보게 됐어요. 8년 만에 어렵게 배운 게, ‘한 발 스스로 물러나서 나의 공간을 바라보는 게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마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의 경험이 없었다면 대리운전을 하지 않았거나, 하더라도 거기에 함몰돼서 살았을 것 같아요.

Q 책에서 “호칭은 한 인간의 주체성을 대리하는 수단이 된다”는 이야기를 인상적으로 읽었습니다. 초면끼리 만나면 일단 호칭 정리부터 해야 되는 우리 특유의(?) 문화가 생각나기도 하고요.


대학에서 8년 동안 저는 ‘교수님’이었거든요. 그 외의 호칭은 들어본 적이 없어요. 대리운전 시작하고 첫 콜을 받아서 가는데 3분 만에 전화가 왔어요. “아저씨 왜 안 와요!” 아저씨라는 말을 들어본 게 처음이었어요. 그때만 해도 저는 대학에 몸이 반쯤 걸쳐져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 아저씨라는 호칭이 제 멱살을 잡고 거리로 저를 내팽개치더라고요. 내가 정말 대리기사가 됐구나 하는 걸 그때 몸으로 깨달았죠.


대학에서 저는 사실 4개월짜리 강의 아르바이트 노동자일 뿐이었어요. 그런데 강의실에서 ‘교수님’ 소리를 듣는 동안에는 주체로서 고양되는 거죠. 환상이 덧입혀지는 거고요. 그런 호칭이 저라는 사람을 규정하더라고요. 사회를 보면 호칭이 개인을 먹어치우는 일들이 너무 많아요. 그게 가장 심한 곳이 어딘지 아세요? 군대예요. 병장 누구누구, 상병 누구누구 하고 항상 자신이 어느 자리에 있는지 알게 하죠. 호칭에는 개인이 자신을 규정하고 싶어하는 욕망과 함께, 사회가 개인을 어느 자리에 놓고 통제하고 싶느냐 하는 욕망도 들어 있는 거죠.

Q 회사가 직원들에게 ‘회사의 주인’이라는 말로 환상을 덧입히는 것을 ‘영혼착취’라고 규정하신 부분 역시 인상적으로 읽었습니다. 용어가 강렬한데요, 조금만 더 설명해주시죠.


주인이라면 회사의 지분을 나눠줘야지.(웃음) 열정페이, 노오력, 이런 말들이 유행이었잖아요. 영혼착취는 열정착취보다 더 심한 것 같아요. 열정착취에서는 그래도 노력의 주체가 개인이거든요. 하지만 주인처럼 일해라, 주인처럼 사고해라, 하는 건 개인을 회사에 귀속시키는 것이고 회사의 통제에 완벽하게 따르라는 것이에요. 저는 그것을 열정착취보다 한 단계 더 진화한, 그 사람의 영혼까지도 회사에서 통제하는 영혼착취 아닌가 생각해요.

Q 하지만 회사의 이름으로 개인을 규정하는 것, 예를 들어 삼성맨이니 현대맨이니 하는 말로 자신을 규정하는 것에 오히려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개인이 회사의 욕망, 자본의 욕망, 경쟁의 욕망을 대리하는 대리인간이 되면서, 그 중심부로 나아가면 괴물이 되는 것 같아요. 타인들을 대리인간으로 만드는 괴물이죠. 경계에 있을 때는 어느 정도 조직의 균열들이 보이잖아요. ‘아 저 사람은 왜 저럴까’, ‘이건 잘못된 제도 같다’ 하는 것. 그런데 중심부로 나아가면 그 균열들이 보이지 않게 돼요. 괴물의 손바닥 위에서 괴물의 욕망을 대리하는 대리인간으로서, 경쟁에서 승리하는 사람은 완벽하게 괴물이 되어가는 거죠.

Q 갑의 욕망을 대리하며 같은 을들의 앞을 가로막는 또 다른 을들의 이야기, 읽으면서 참 속이 쓰렸습니다.


사실 그 글을 쓰면서 부끄러웠던 게 저도 을의 앞을 막아서는 을이었거든요. 괴물로서의 을, 대리인간으로서의 을이겠죠. 저 이전에도 대학을 나간 선후배들이 있었는데, 그때 저는 만나서 화도 내고,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거든요. ‘이 공간은 잘못한 게 없는데 저 사람은 참 나약하구나.’ 저는 그들을 막아설 준비가 돼 있었어요. 이 공간에서 한 발 물러서서 ‘나는 여기서 무엇으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은 모두는 을의 앞을 막아서는 을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구조를 바라보지 않고 개인만을 바라보기 때문에.

Q 어려운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이 책은 모두 26편의 글로 구성돼 있습니다. 독자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 글자 한 글자 다 읽어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보통은 그럴 여유가 없습니다. ‘그럼 이 글만 보면 된다’라고 내밀 만한 글, 책의 요지를 가장 잘 담고 있는 글은 어느 글인가요?


제일 애착이 가는 에피소드는 아홉 번째 글 ‘모든 인간은 주체로서 아파하고 주체로서 절망한다’예요. 제가 가장 아파하면서, 가슴으로 쓴 글이에요. 제가 울면서 쓴 글이라, 독자분들이 읽어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또 제일 머리로 쓴 글은 두 번째 글, ‘대리인간, 대리국민이 되다’예요. 이 글은 재미는 좀 없습니다만 핵심이에요.

Q 작가의 체험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시 대학 이야기가 많이 나오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의 속편 느낌도 납니다.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를 모르는 독자에게 이 책이 어떻게 이해될지 염려한 바 있으신가요?


많이 했죠. 다시 대학에 대한 글을 쓰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는 안 된다, 하는 고민을 했어요. <대리사회>에서는 대학 얘기를 많이 덜어내려고 노력했고, 굳이 맨 앞에 글 한 편을 넣기도 했어요. 그 첫 번째 글의 별지에는 제가 대학을 나오면서 쓴 ‘나는 오늘 대학을 그만둡니다’라는 꽤 긴 글을 넣었고요.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를 모르는 분들의 이해를 구하기 위한 거였어요.

Q 2016년 현재의 촛불집회는 정치의 주체가 되겠다는 시민들의 선언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대리사회’에 대한 저항이라 볼 수도 있을까요?


우리는 사회가 품고 있는 거대한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사유하는 주체가 됐을 때, 내가 지금 대리하는 욕망들과 마주할 수 있거든요. 그 욕망이 내가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나에게 모욕감을 주는 천박한 것인가 가려낼 수 있거든요. 지금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더 이상 천박한 욕망을 대리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사유하는 주체들이라 생각해요. 저도 그 광장에 참여했어요. 저는 앞으로도 계속 대리인간으로 살 겁니다. 하지만 어떤 욕망을 대리하는 인간으로 살아갈 것인지가 중요할 것 같아요. 그것이 결국 주체적인 것이고요.


저는 지금의 대통령을 ‘대리 대통령’이라고 표현하고 싶어요. 자신의 신체, 언어, 사유까지도 자신이 주인으로 살고 있지 못한 것 같아요. 촛불은 대리 대통령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선언이기도 한 거죠. 박근혜는 언제나 타인의 차를 운전해온 것 같고, 조수석에는 최순실이, 뒷좌석에는 재벌 총수들이 앉아 있었던 것 같아요. 박근혜가 대리사회의 괴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 역시도 자본의 욕망을 대리하는 대리인간으로 살아왔다는 걸 올 겨울의 광장을 보면서 느꼈어요.

Q 작가님에게 대리운전이라는 일은 취재와 생계의 경계에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겪어야만 했던 고민도 분명 컸을 텐데요, 그런데도 이런 문장을 쓰셨습니다. “지식과 노동을 계속 양손에 들고 교차 방문하는 삶을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건 의외로 대단히 멋진 삶이 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어째서 그렇게 확신하시나요?


어느 날 대리운전을 하고 운전석에서 내리는데, 되게 익숙한 거예요. 타인의 운전석에서 겪는 통제들이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사회의 어느 공간에서든 있었구나, 결국 이 사회는 거대한 타인의 운전석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 순간 ‘이걸 책으로 쓸 수 있겠구나’ 생각이 들면서 그때 온몸을 감싼 우주의 기운 같은 것들이 있었어요.(웃음) 그날 엄청난 고양감, 기쁨이 있었거든요. 그런 걸 계속 느껴보고 싶어요.


그리고 계속 공부하고 싶어요. 책상에서 계속 좋은 책을 읽고, 배운 것들을 거리에서 몸의 언어로 각인시키는 작업들을 하고, 그것들을 다시 한번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나 <대리사회>처럼 많은 분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글로 쓰고 싶다는 욕심이 있습니다.

Q 연구자에서 기록자로 삶이 바뀌었습니다. 대학에서 연구자로서 보낸 지난 8년의 경험이 지금 작가님의 글쓰기 작업에 주는 장점과 단점이 있을 텐데요.


연구자들은 엉덩이가 무거워야 되거든요. 책상 앞에 앉아서 많은 논문을 읽고 많은 논문을 쓰는 것이 미덕인데, 그건 버려야 됩니다. 책상 앞에 앉아서 쓴 한 편의 글보다 거리에서 문득 떠오른 한 줄의 문장이 더 마음에 들더라고요. 하지만 자료를 대하는 태도, 자료에서 무언가 이끌어내기 위해서 수십 번 읽는 훈련받은 눈이 사회를 바라보는 데도 도움이 돼요.


첫 논문을 어머니한테 보여드렸는데 어머니가 잘 썼다고 하시더라고요. “내가 하나도 못 알아먹는 걸 보니까 잘 쓴 거겠지.” 그 순간 나는 지금까지 뭘 했나 너무 부끄러웠거든요. 그때부터 제 글의 독자는 어머니가 됐어요. 내 어머니가 불편해 할 문장이라면 계속 고쳤거든요. 대학의 교문 안에서만 유통되는 글쓰기는 버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독자에 대한 공감이 없는 사람의 글은 절대 좋을 수가 없고, 자기도 모르는 얘기 할 때 어려운 글이 나오거든요.

Q 에필로그 나오는 이 문장을 읽고 참 든든했습니다. “제도권과 거리의 경계에서, 언제까지고 경계인으로만 존재하며 그 균열을 탐색하고 싶다. 그 세상의 틈을 통해, 계속 괴물과 마주할 것이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다음은 이 사회의 어떤 균열을 통해 괴물과 마주할 건가요?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로써 사회로 들어가는 문을 연 것 같고, <대리사회>로써 현관을 지나온 것 같아요. ‘대리사회’라는 괴물은 무엇으로 개인을 통제하는가. 저는 그게 언어라고 생각했어요. 사회의 검열과 통제는 ‘훈(訓)’의 언어를 통해 얘기할 수 있어요. 가훈, 사훈, 급훈, 교훈, 국훈. ‘훈의 언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괴물의 언어들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사진 : 남경호(스튜디오2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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