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마조마 눈치 보며 쓰는 글, 이것도 행복이다
얼렁뚱땅 아빠 되기 3
“최호진 생년월일 2014. 03. 03. 급여개시유효일 2014. 03. 03.”
내 건강보험증에 새로운 이름이 올랐다. 드디어 호진이, 아니 아직은 홈런이라는 태명이 더 익숙한 내 첫 아이가 태어난 것이다. 홈런이가 태어난 지 벌써 다섯 주가 지났다니, 어째 시간이 이렇게 빠른 건가 정말 믿기지 않는다. 3.2킬로그램, 48센티미터로 태어난 홈런이는 그새 5.2킬로그램, 53센티미터로 자랐다. 어디 아픈 곳 없이, 잘 먹고, 잘 자고, 잘 자라고 있는 홈런이를 보는 게 요즘 내 가장 큰 행복이다.
아내는 오랜 시간 홈런이를 ‘자연출산’으로 낳기 위해 애를 써왔다. 의료적 개입 없이 산모와 아이의 힘만으로, 병원에 가지 않고 조산원에서 조산사의 최소한의 도움만으로 아이를 낳고자 했다. 그래서 몇 달 전부터 운동도 하고 공부도 하면서 열심히 준비를 해왔는데, 홈런이를 낳는 날 아내의 노력이 물거품이 될 위기가 있었다. 진통이 오기 전에 양수가 먼저 새기 시작한 거였다.
전날 밤부터 양수가 샜다. 조산원에 전화했더니 진통 기다리면서 잠도 좀 자고 아침에 오라고 했다. 아침에 갔더니 내진을 해보고는, 아직 양수 양은 괜찮으니까 집에 가서 편하게 진통을 더 하다 오란다. 그래서 집에 와서 진통을 하며 점심도 먹고 오후 1시쯤 다시 조산원에 갔다. 그때 진통 주기는 3~4분 정도였다. 양수는 여전히 조금씩 새는 상황. 양수가 너무 적어지면 아이가 위험하다.
“지금은 다행히 맥도 정상이고 자연출산을 시도해볼 수 있는데, 양수가 너무 적어지고 태변 양이 많아지거나 태동이 줄어들거나 하면 위험해요. 그때는 병원 가서 수술해야 하니까 미리 알고 계시라고요. 우리가 계속 태동하고 맥하고 체크할 테니까 걱정은 하지 마시고요.”
조산사 선생님이 이렇게 말했다. 홈런이가 태변까지 눈 모양이었다. 자연출산을 못하고 수술을 하게 된다면 아내는 얼마나 실망할까. 빨리 진통을 더 해서 양수가 더 줄어들기 전에 아이를 낳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아이 낳는 방’으로 들어가서 진통을 부르는 체조와 마사지를 열심히 했다. 아내의 고통이 눈에 보였다. 하지만 아내는 이를 악물고 진통을 촉진하는 체조를 계속 더 했다. 아내는 이미 엄마였다.
아내는 원래 손목과 손가락이 좋지 않아서 물건 같은 것도 잘 못 집고 보호대를 하고 지낸다. 그런데 진통을 하며 내 팔을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두꺼운 겨울 옷 안으로 손톱자국이 날 정도였다. 놀라운 건 그렇게 ‘제정신 아닌’ 고통을 겪으면서도 홈런이를 생각해서 계속 진통이 오게 마사지를 해달라고 한 거였다. 철없는 초등학생 꼬마 같다고 내가 만날 놀리던 아내였는데, 그때는 정말 우리 엄마처럼 크게 보였다.
오후 4시 46분. 그렇게 홈런이는 태어났다. 홈런이가 나오자마자 아내는 누운 채로 가슴 위에 홈런이를 안았고, 그동안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로 활짝 웃었다. 지금도 그 얼굴이 생생하다. 그냥 예쁘다, 아름답다 하는 말로는 감히 표현할 수 없는 평온함, 행복, 사랑 같은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홈런이는 울지도 않았다. 나는 아내의 얼굴 옆에 내 얼굴을 대고, 휴대전화로 우리 세 식구의 첫 가족사진을 찍었다.
그 뒤로 5일은 조산원에서 지냈다. 홈런이를 낳은 바로 그 방에서. 사실 나는 이 기회(?)에 일을 좀 쉬고 싶어서 경조휴가 3일에 연차 2일을 더 써서 쉰 거였는데, 아내는 그걸 참 고마워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다른 남편들은 조산원에 그렇게 오래 있지 않았다. 미역국이 지겹다고 밖에서 밥을 따로 사먹는 남편들도 있었다. 난 5일 내내 아내와 같이 먹고 같이 잤다. 사실 남들도 다 그렇게 하는 줄 알고 그랬을 뿐이다.
원래는 조산원에서 일주일을 보내고 집으로 와서 산모도우미의 도움을 받으려고 했다. 차로 40분 정도 떨어진 곳에 계신 장모님은 장사를 하시기 때문에 산후조리를 해주실 수 없었다. 장모님은 처음부터 우리 세 식구 다 처가로 들어와서 한 달쯤 지내라고 했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게다가 처가에는 처조모님도 계셨다. 그래서 2주간 산모도우미를 쓰면서 우리 집에서 지내기로 하고 예약도 다 해뒀는데, 홈런이를 낳고 나니 상황이 또 달라졌다. 원래 좋지 않았던 아내의 손목이 훨씬 안 좋아진 거다.
장모님은 다시 한번 처가로 들어와 지내라는 말씀을 하셨다. 다행히 가게가 집에서 가까우니 왔다 갔다 하시면서 돌봐주시겠다는 거였다. 아내도 더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하지만 나까지 가서 짐을 무겁게 해드릴 수는 없어서 아내와 홈런이만 가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 집으로 부르려던 산모도우미를 취소하고 처가로 부르기로 했다. 원래는 예약을 취소했다 다시 하면 2주 이상 기다려야 사람이 다시 배정되는데, 운이 좋았는지 일주일만 기다리면 산모도우미가 올 수 있다 했다.
그렇게 3주 정도 아내와 홈런이는 처가에서 지냈다. 나는 처음에는 퇴근하고 잠깐씩 가서 아내와 홈런이 얼굴만 보고 왔다. 한밤중에 왕복 1시간 20분을 운전하고 오가면서 한 시간 남짓 얼굴만 보고 오려니 너무 아쉽고 몸도 피곤했다. 장인어른과 장모님도 출퇴근이 좀 힘들더라도 그냥 같이 지내자고 하셔서, 나중에는 한번 가면 이틀 정도씩 거기서 출퇴근을 하며 지냈다. 물론 주말에는 하루 종일 아내와 홈런이와 같이 지냈다. 주말이야 원래부터 반가운 날이었지만, 이때만큼 소중했던 적이 또 있었나 싶다.
이제 아내와 홈런이와 우리 집에서 셋이 함께 지낸 지 열흘쯤 됐다. 홈런이는 이제 잠도 잘 자고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아내는 아직 좀 걱정스러운 상태다. 손목이 계속 안 좋은데 모유수유 때문에 약을 먹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무조건 손목을 안 쓰는 것밖에 답이 없어서, 결국 양쪽 중에 조금 더 안 좋은 왼쪽 손목에 반깁스를 했다. 처가에 있으면 아내가 더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아내는 우리 집에 있는 게 더 마음이 편할 것 같다고 했다. 열흘 동안 지켜보니 확실히 그래 보였다.
손목이 안 좋은 아내는 홈런이를 안아 들거나 냄비 같은 걸 손으로 집어 들거나 할 수 없었다. 결국 대부분의 집안일은 내 몫. 아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서서 청소기를 돌리고, 빨래를 세탁기에 넣어놓는 일 정도였다. 장보고 밥하고 설거지하고 쓰레기 버리고 빨래하고 홈런이를 안아주고 목욕시키는 것은 내가 해야 했다. 어느 날은 7시 30분쯤 퇴근해서 집에 오면 8시 30분. 집에 와서 밥 차리고 밥 먹고 설거지하고 쓰레기 버리고 빨래 널고 홈런이 목욕시키고 안아서 재우고 나니 11시가 다 돼 있었다.
그제서야 처음으로 소파에 편하게 앉고 나서, 집안일의 ‘위엄’을 새삼 깨달았다. 매일 밥을 먹을 테니 설거지는 내일도 해야 하고, 홈런이의 똥기저귀는 내일도 쓰레기통에 가득 찰 것이며, 하루에도 몇 개씩 젖고 더러워지는 홈런이 손수건이나 옷이나 속싸개는 내일도 빨래통에 잔뜩 쌓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회사 일과 집안일을 몇 년씩 같이 하는 워킹맘들이 정말 존경스럽게 느껴졌다.
안 하던 일을 하려니 솔직히 몸은 힘들다. 하지만 내가 힘들게 회사 일을 하고 집에 와서 또 집안일에 홈런이 돌보는 것까지 낑낑거리며 할 때 아내가 늘 고맙다는 말을 해줘서 힘이 난다. 늘 나한테 미안해하면서, 내가 잠은 편히 잘 수 있도록 밤에 홈런이가 울면 다른 방에 데려가서 재우고 나를 배려해준다. 다른 아빠들은 애가 밤에 울어서 잠을 못 자는 게 힘들다는데, 나는 사실 그런 건 전혀 모르고 밤에 잘 잔다. 또 홈런이가 피로회복제 아닌가. 홈런이 얼굴을 보고 있으면 그냥 또 좋아서 낄낄 웃게 될 뿐이다.
이번 달에는 금요일마다 연차 휴가를 쓰기로 했다. 홈런이를 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기도 하고, 며칠간 먹을 국을 끓이거나 밀린 ‘어른 빨래’를 하거나, 덩치 큰 집안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평일 저녁에는 꿈도 못 꾸는, 이런 글 쓰는 일도 좀 하고. 금요일 오후, 아내는 손목에 침 맞으러 가고 홈런이가 잠든 틈에 글을 쓴다. 홈런이가 낑낑거릴 때마다 조마조마 눈치를 보며 자판을 두드리는 지금, 이 순간도 행복이다.
- <삶이보이는창> 2014년 5-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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