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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가서 이렇게 싸워 보겠어?

긴 글/인터뷰와 현장기사

by 최규화21 2011. 2. 18.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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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 가서 이렇게 싸워 보겠어?
   최규화/ <작은책> 편집부

 


  최근 홍익대 청소․경비 노동자들의 투쟁이 세상의 관심을 끌고 있다. 그런데 그네들이 파업에 들어간 1월 3일, 똑같이 파업에 들어간 노동자들이 있었다. 한 달 파업 끝에 임금 인상과 휴가 보장 등을 약속받아 현장으로 돌아간 반가운 소식의 주인공은 경기도 포천에 있는 차(茶) 생산 업체 ‘담터’의 노동자들이다.
  1983년 설립된 담터는 10년 전만 해도 기계 네 대가 전부였지만 지금은 연 매출 3백억 원대의 회사로 성장했다. 공장은 두 군데가 됐고 최근에 또 새 공장 부지를 사들였다. 회사가 그렇게 크는 동안 노동자들의 마음속에는 어떤 이야기가 쌓였을까. 2월 10일 경기도 포천의 한 음식점에서 담터의 노동자들을 만났다.
  “처음 들어왔을 때는 한 라인에 다섯이 있었어. 좀 지나니까 넷을 앉히더라고. 그러다 둘이 되더니 공장을 하나 또 사고 나서는 혼자 받게 하는 거야. 얼마나 바빠. 한 시간만 일하면 팔이 떨어져나가는 것 같아.”
  11년째 일하고 있는 황인순 씨의 말이다. 황인순 씨가 처음 회사에 들어왔을 때는 최저 임금도 받지 못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노동부에 진정을 하는 바람에 회사는 상여금을 없애고 임금을 최저 임금으로 올렸다.
  “회사가 해마다 근로 계약서에 사인을 새로 하라는 거예요. 뭔지도 모르고 했죠. 그래서 저는 제가 1년 계약직인 줄 알았어요.”
  원료 공정에서 일하는 이성애 씨의 말을 들으니 황당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회사는 매년 최저 임금 오를 때마다 그만큼씩 돈을 올려서 근로 계약서를 새로 쓰게 한 거였다. 그런데 그럼 한 달에 90만 원도 안 되는 돈으로 어떻게 살까?
  “생활할 수가 없어. 내가 잔업을 한 달에 100시간까지 해 봤어. 여성들은 최고 120~130시간. 설 전에 선물세트 할 때는 매일 10시까지 하고 일요일도 한 달에 세 번은 잔업하고. 그러면 60만 원 더 받는 거야.”
  최근태 씨가 대답했다. 이들은 한 달에 평균 50시간의 잔업을 하고 110만 원 정도 받았다. 어떻게 한 달에 하루만 쉬면서 일할 수 있을까. 주5일 근무는커녕 연차 휴가도 없었다. 회사는 설날과 추석 연휴, 어린이날 등 공휴일을 연차 휴가로 대체해서 무급으로 쉬게 했다. 회사의 실질적인 대표가 서울 강남 어느 교회의 장로라는데, 성탄절까지 무급으로 쉬게 했다는 얘기에서는 헛웃음만 터져 나왔다.
  “제가 교회를 다녀서 일요일에 특근 빼달라고 하면 관리자라는 사람이 ‘아줌마 하나님이 밥 먹여 줘요?’ 이러고, 서너 달에 한 번 잔업 빼달라고 하면 ‘아줌마 밥하러 가요?’ 그래요.”
  “그건 아무것도 아냐. 나한테는 ‘아줌마 내일 그만둘 거야? 내일 그만둘 거야?’ 이런 식이야.”
  상자 포장 일을 하는 송옥선 씨의 말에 황인순 씨가 한마디 덧붙였다. 그러면서 현장 관리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됐다.
  “기계 보는 조장들이 있는데, 우리하고 일하다 마찰이 생기면 욕을 하면서 물건을 막 집어던지고, 나이가 우리보다 어린데도 ‘씨팔’ 소리를 입에 달고 살아요. 심지어는 멱살도 잡고 ‘몸 파는 여자’라는 소리까지 나와요. 그런데 싸움이 나도 관리자들은 말리지도 않고 팔짱 끼고 보고만 있다가, 그런 날은 일 끝나면 자기네들끼리 회식 가요. 그래서 노조를 만들면 조장들부터 쫓아내는 게 목표라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송옥선 씨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다들 가슴에 쌓인 이야기들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쏟아 냈다. 조장들이 이렇게 라인의 노동자들을 ‘관리’하면서 받는 수당은 한 달에 십만 원. 그 대목에서는 정말 비참한 기분까지 들었다. 십만 원을 더 받는 노동자들과 십만 원을 덜 받는 노동자들이 서로를 관리하고 관리당하면서 옥신각신하는 것을 보고, 회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러던 가운데 지난해 봄부터 노조를 만든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견딜 수 없이 쌓였던 것들이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8월 28일, 금속노조 담터분회를 만들었을 때 조합원 수는 63명. 현장 노동자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노조에 가입했다. 황인순 씨는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었단다.
  노조가 만들어지자 회사는 노조의 비대위원 여섯 명을 전환 배치해서 격리시켰다. 주임으로 일하던 최근태 씨한테 상자 정리와 풀 뽑기, 공장 청소 같은 허드렛일을 시키기도 했다. 1년에 한두 번씩 하던 조 편성을 3, 4주에 한 번씩 하면서 노조 활동에 열성적인 사람들을 일하기 힘든 자리로 옮겼다.
  그리고 관리자들을 중심으로 기업별 노조를 만들게 했다. 새 노조와 좋은 조건으로 단체 협약에 합의했다면서, 노동자들한테 금속노조를 탈퇴해서 새 노조에 가입하라고 설득했다. 또 관리자들은 과일 상자를 들고 노동자들의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부인이 회사에 큰 잘못을 했는데 없던 일로 해 줄 테니 노조를 탈퇴하도록 설득해 달라”고 가족들을 만나기도 했다.
  “10월에는 관광버스 빌려서 야유회도 갔어요. 회사 창립 이래 처음이래요. 그런데 버스에 앉는 자리를 회사가 다 짜 놨어요. 노조에 핵심적인 사람들은 한 차에 다 몰아서 회사 간부들하고 같이 앉게 한 거죠.”
  “우리를 회유하려고 그런 거예요. 부사장이 나보다 한 살 어린데, 술 마시면서 ‘인순이 누님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 해. 그럼 누님은 좋을 텐데’ 그래요. 그래서 난 ‘그렇게는 절대 못하지’ 그랬죠.”
  송옥선 씨와 황인순 씨의 이야기다. 그 뒤로 노사는 단체 협약을 위해 여덟 번의 교섭을 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도리어 회사는 노조 교섭대표한테 단체 협약 내용에 대해 조합원 찬반 투표를 하지 않고 직권 조인 해 줄 것을 각서로 요구하기도 하고, 정년을 60세에서 55세로 단축하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또 파업을 대비해 미리 아르바이트 학생들을 고용하기도 했다.
  그래서 노조는 11월 26일부터 잔업 거부에 들어갔고, 올해 1월 3일부터 전면 파업에 들어갔다. 노조는 회사가 주로 물건을 납품하는 이마트 등 대형 할인점 앞에서 매일 1인 시위를 하고, 공장 앞과 본사 앞 등에서 집회를 하며 한 달 동안 파업을 이어 간 끝에, 1월 31일 회사와 단체 협약을 맺고 현장으로 복귀했다. 파업을 함께 시작했던 노동자들 가운데 단 한 명을 빼고는 모두 끝까지 함께했다.
  “정말 순수하고 순진한 아줌마들이었어요. 처음에 1인 시위 할 때는 무서워서 어떻게 하냐고 해서 첫날에는 1인 시위도 못했어요. 그런데 나중에는 국회에도 들어가고 백화점 안내 데스크 앞에서 밥도 먹고 그렇게 된 거야. 정말 깜짝 놀랐어요.”
  최근태 씨의 말이다. 이들이 그렇게 싸워서 회사와 합의한 내용은 임금 6퍼센트 인상, 상여금 50퍼센트 신설, 일시금 30만 원 지급, 연차 휴가 보장, 주5일 근무제 실시, 노조 사무실 제공 등이다. 올해 최저 임금이 5.1퍼센트 올랐으니 6퍼센트라는 임금 인상률은 조금 아쉬울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관리자들의 횡포를 막기 위한 조치가 빠져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파업하는 동안 월급을 못 받았잖아요. 여성 가장들도 많고 명절도 있는데. 돈 때문에 흔들리는 사람들 때문에 걱정을 많이 했죠. (아쉬움은 있지만) 한 사람이라도 더 같이 가야 한다는 게 더 중요한 거예요.”
  “제일 크게 얻은 건 우리가 단합이 됐다는 거. 서로 아껴 주고 너그러워졌다는 거, 그거야. 파업까지 해 보고 다시 들어와서 좋아. 한번 폭발시켜 보지도 못했으면 해결이 됐다 하더라도 속이 상했을 것 같아. 우리 나이의 아줌마들이 어디 가서 이렇게 싸워 보겠어.”
  이성애 씨와 황인순 씨의 말을 들으니 이들이 노조를 만들고 파업까지 한 까닭을 알 수 있었다. 그네들을 정말로 힘들게 한 것은 ‘최저 임금’이라는 돈의 액수보다 ‘최저 임금’으로 상징되는, 그네들의 노동을 향한 세상의 무시와 폄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최저’ 임금을 받는다고 자신의 노동과 자신의 존엄성마저 ‘최저’로 여기는 세상을 향해 자신의 노동은 ‘최고’의 노동이라고 당당히 외친 것이다.
  가까이는 홍익대에서, 또 수많은 최저 임금 노동자들의 현장에서 그 외침이 더 크게 들려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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