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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건빵'을 나눠주지 않았더라면

긴 글/칼럼

by 최규화21 2022. 6. 27.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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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건빵'을 나눠주지 않았더라면

[사물의 과거사 1] 건빵과 서산개척단 사건

 

 


“건빵이 문제죠, 건빵. 배고픈 게. (…) 내가 (서산개척)단본부를 찾아가 내 건빵을 달라고 안 했으면 우리 아버지가 그 많은, 수백명에게 몽둥이로 안 맞고 결국은 안 돌아가셨을 텐데, 내가 죽일 놈이지. 내가 죽인 거야, 아버지를.”(대전 MBC 〈모월리의 진실〉 2020. 11. 28)

화면 속 송순표씨의 눈이 젖는다. 55년 세월이 흘렀지만, 어제 일처럼 선명한 기억. 그날 이후로 ‘건빵’은 그에게 씻을 수 없는 후회와 원한으로 남았다.

송순표씨와 아버지의 비극은 1962년 시작됐다. 아홉 살 순표는 아버지와 함께 대전역에 갔다. 경찰 제복을 입고 어깨에 카빈총을 멘 두 사람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조사할 것이 있다며 파출소로 데려간 그들은, 순표 부자를 부랑인 수용시설로 보내버렸다.

◇ 영문도 모른 채 서산개척단으로

“새까만 천이 둘러쳐진 버스에 실려서 먼저 대전갱생원으로 갔어요. 거기서 2~3일 묵고 또 같은 버스에 실려서 몇시간을 달려간 곳이 바로, 지금은 입에도 꺼내기도 싫은 서산개척단입니다.”(송순표 증언, 비마이너, 〈‘납치·강제노역으로 일군 농토, 국가 빼앗았다’ 서산개척단원들의 절규〉, 하금철 기자, 2018. 3. 22)

1961년 11월 박정희 정권은 충남 서산에 ‘대한청소년개척단’을 설립했다. 사람들은 그곳을 주로 ‘서산개척단’이라 불렀다. 정권은 ‘사회정화’를 명분 삼아 경찰과 군인을 동원해 전국에서 고아와 부랑인으로 ‘의심되는’ 이들을 잡아들였다. 그렇게 서산개척단에 강제수용된 인원이 1700여명. 순표 부자도 그들 틈에 섞여 있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일은 폐염전을 농토로 개간하는 것. 맨손으로 돌을 날라 둑을 만들고 집을 지었다. 24시간 감시 속에 새벽부터 저녁까지 하루 12시간 고된 노동이 이어졌다. 간부들이 몽둥이를 들고 단원들의 뒤를 따라다니는 것이 어린 순표의 눈에도 보였다. 아이들이라고 강제노역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순표도 돌을 들어 나르거나 손수레를 밀며 일했다.

행여나 도망치다 잡히거나, 간부들의 명령을 제대로 따르지 못한 사람들은 곡괭이 자루로 ‘죽을 만큼’ 매를 맞았다. 강제노역과 감금 그리고 폭행이 매일같이 반복됐다. 밥이라고 제대로 줬을 리가 있겠나. 굶주림에 지친 단원들은 산에서 뱀과 개구리를 잡아먹으며 버텼다.

순표 부자가 끔찍한 날들을 견디는 동안 세 해가 지났다. 어느 날 순표가 잠시 없는 사이 단원들에게 건빵이 배급됐다. 지긋지긋한 굶주림에 시달리던 단원들에게 그보다 반가운 일이 또 있을까. 하지만 그 반가운 ‘건빵’이 순표 부자의 운명을 영영 갈라놨다.

“아이들이 건빵을 먹고 있었어. 내 건 어디 있냐고 했더니 ‘니 아버지가 가지고 갔다’ 하는 거야. 그래서 왜 내 걸 아버지에게 주냐고 소리를 질렀어. 그러자 성인 남성들이 아버지를 데리고 와서는 ‘왜 아들 걸 먹었냐’고 다그치며 때리는 거야. (…)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개 패듯이 팼어. 그 기억은 나. 결국 실신해 의무반으로 가셨는데 그 이후로 못 봤어.”(송순표 증언, 〈서산개척단 사건 피해상황 실태조사 최종보고서〉 서산시, 2019)

아버지를 찾는 순표에게 간부들은 아버지가 아파서 일을 못 하니 귀향 조치를 시켰다고 했다. 여기서 착실히 일하고 있으면 언젠가 아버지가 찾으러 올 거라고도 했다. 순표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살았다. 아버지도, 아버지의 편지 한장도 순표에게 오지 않았다.

아버지의 소식을 다시 들은 건 50여년이 지난 2017년쯤. 서산개척단 행정반에서 일했던 단원의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아버지가 그날 죽어서 공동묘지에 묻혔다고 했다.

맞아 죽고, 병들어 죽고, 일하다 사고로 죽었다.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지만 약 250명이 죽었다는 증언도 있다. 단원들이 죽으면 장례도 없이 가마니에 싸서 공동묘지에 묻었다. 1978년 서산시는 관내 무연고 묘지와 서산개척단 단원들이 묻힌 공동묘지를 개장해 ‘무연총’으로 합장했다. 송순표씨도 뒤늦게 무연총을 찾아가 절을 올리고 50년 묵은 울음을 토해냈다.

“아버지가 (꿈에) 딱 나타나는데 여기서(머리)부터 여기까지 피를 철철 흘리고 나타나는 거야. 그리고 말이 없어. (…) 그런 꿈을 꿨어, 계속. 그럴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라 잠도 못 자고. 그 고통을 누구한테 말해요.”(송순표 증언, 대전 MBC 특집 다큐멘터리 〈모월리의 진실〉, 2020. 11. 28)

 61년 만에 진실 밝혔지만…

1966년 9월 서산개척단은 ‘공식적으로’ 해체됐다. 많은 이들이 떠나갔지만 어떤 이들은 ‘땅’에 남았다. 처음부터 정부가 약속한 게 있었기 때문이다. ‘개간으로 만들어진 농토를 단원들에게 나눠주겠다’는 것. 그 모진 날들을 버티고 견딘 것은 모두 그 ‘약속’ 때문이었다.

그러나 땅 한평 손에 쥐어본 사람은 결국 아무도 없었다. 토지 무상분배에 대한 내용을 담은 ‘자활지도사업에 관한 임시조치법’이, 시행령도 만들어지지 못한 채 1982년 폐지됐기 때문이다. 60년 전의 폐염전은 지금 황금 들판으로 바뀌었지만, 그 땅은 모두 국유지가 돼버렸다. 서산개척단 단원들의 지난 세월은 맨손으로 시작해 빈손으로 끝났다.

지난 5월 10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서산개척단 사건을 ‘위법한 공권력에 의한 중대한 인권침해’로 보고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강제수용과 강제노역, 폭력과 사망, 강제결혼 등 인권침해에 대해 국가의 사과와 함께 피해구제 및 명예회복 조치를 권고했다. 토지 무상분배에 대해서도 보상 및 특별법 제정 등 조치를 취하라고 권고했다.

61년 만에 비로소 국가가 서산개척단 사건의 진실을 밝혔지만, 이 소식은 송순표씨에게 닿지 못했다. 그는 지금 폐암으로 투병 중이다. 이미 세상을 떠난 피해자들도 많다. 진실은 너무 더디게 왔다. 정의 또한 이들을 오래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이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원한의 시간을 멈추고 정의의 시계가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

“지금 순표 아우가 병원에서 생사가 왔다 갔다 하는데 치료비가 없어가지고. (…) 한사람이라도 더 상하기 전에 빨리 보상이 돼서, 우리 순표 아우 치료비라도 보태줬으면 하는 마음이야.”(정영철 서산개척단진상규명대책위원회 위원장, 진실화해위원회 소식지 ‘진실화해’ 6호, 2022. 6. 17)

※ 서산개척단 사건 : 1960년대 정부는 충남 서산에 개척단을 설립해 전국에서 고아, 부랑인 등을 적법 절차 없이 단속해 강제 수용했다. 단원들은 폐염전 개간에 강제로 동원됐고 폭행, 사망, 강제결혼 등도 일어났다. 강제노역의 대가로 제시된 토지분배 약속은 결국 지켜지지 않았다.

 

 

- <주간경향> 1484호(2022.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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