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5일 0시부터 전국의 모든 산란계 농장, 계란 출하 정지.”
살충제 계란 사태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시작됐다. 시중에 유통되는 계란에서, 닭에 사용해서는 안 되는 맹독성 살충제 성분이 검출된 것이다. 이후 1200여 개 산란계 농장의 계란을 모두 조사해 54개 부적합 농장을 찾아냈다(9월 4일 기준). 부적합 판정을 받은 농가의 계란들은 회수·폐기됐다.
9월 초까지 텔레비전 메인 뉴스로 오르내리던 살충제 계란 소식은 어느새 뜸해졌다. 그럼 이제 안심하고 계란을 밥상에 올려도 좋은 걸까? 예전처럼 아이들 간식으로 계란 요리를 해줘도 괜찮을 걸까?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살충제 계란 사태가 우리에게 남긴 ‘숙제’들을 제대로 풀지 못한다면 그 찜찜하고 불편한 시간들은 더 길어질 수밖에 없다.
살충제 계란 사태가 남긴 첫 번째 숙제는 위험신호에 대처하는 정부의 ‘반사신경’이다. 지난해 여름 닭 진드기가 창궐했다. 닭들에게 가려움·불면증·스트레스를 유발해 산란율을 20%까지 떨어뜨리는 닭 진드기. 농촌진흥청 국립축산과학원은 국내 양계농가의 닭 진드기 감염률을 94%로 보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약이 없다는 것이다. 닭 진드기는 농식품부에서 지정한 14개의 살충제에 이미 내성이 생겼다.
산란계 농가들이 ‘농약’에 눈길을 준 것은 아마 그 때문일 게다. 이번에 문제가 된 살충제 중 피프로닐은 사람에게 두통이나 감각이상, 신장·간 등 장기의 손상을 일으킬 수 있는 유독물질이다. 이미 벼 진드기를 없애려는 목적으로 농촌에서 사용되고 있는 농약. 아마 지난해 여름, 무섭게 증식하는 닭 진드기를 잡기 위해 이런 농약들이 전국 곳곳의 양계농장에 뿌려졌을 것이다.
이 같은 정황은 지난해 8월 언론 보도를 통해 이미 알려졌고, 정부도 인지하고 있었다. 특히 두 달 뒤인 10월 국정감사에서 “계란농가에서 닭의 진드기 발생을 막기 위해 맹독성 농약을 닭과 계란에 살포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더불어민주당 기동민 국회의원). 당시 식약처장은 “이번 기회에 계란과 관련된 안전관리 수준을 한 단계 높이고자 노력을 하고 있다”고 답했지만, 올해 8월의 ‘사태’를 막진 못했다.
올해 4월에도 구체적인 경고의 메시지가 나온 바 있다. 한국소비자연맹이 개최한 ‘유통달걀 농약관리 방안 토론회’에 참석한 박용호 서울대 교수는 ‘지난해 양계농가의 61%가 닭 진드기에 농약을 사용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농약은 농산물에 사용하는 것으로 가축에 농약을 사용할 경우 매우 위험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까지 전했으나 정부는 그때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정부가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기 위해 나선 것은 유럽에서 살충제 계란 사태가 일어난 뒤. 그렇다면 ‘사태’가 현실화된 이후의 위기관리는 잘 됐을까? 살충제 계란 사태가 남긴 두 번째 숙제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정부의 ‘리스크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다.
살충제 계란 사태 이후 정부 입장에서는 할 수 있는 조치는 모두 취했다고도 일면 볼 수 있다. 산란계 농가에 대한 전수조사, 부적합 계란에 대한 판매중지와 회수, 그리고 위해성 평가까지. 하지만 그러한 조치들도 국민들을 안심시키지 못했다. 바로 ‘소통’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두 주무부서인 농식품부와 식약처의 발표는 손발이 안 맞았다. 사태 초기 살충제 검출 농장명과 DDT 검출 사실 등을 바로 공개하지 않은 것도 국민들의 의심을 샀다. 전문가 집단과 소통 없이 발표된 위해성 평가 결과에는 곧바로 반박이 뒤따랐다. 전문가들의 다양한 의견들이 사전에 신중하게 소통되지 못하고, 이 교수는 이 방송에서 이런 말을 하고, 저 박사는 저 신문에다 저런 말을 하는 상황이 빚어졌다.
정부는 ‘먹어도 안전하다’는 말을 반복했지만 국민들은 믿지 않았다. 그리고 각자 ‘믿을 만한 정보’를 찾아나섰다. 이런 경험들은 이번 사태를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동안 유사한 수많은 ‘사태’들을 겪으면서 국민들의 머리에 각인된 ‘국가 불신’의 결과다. 국민들은 ‘천연’, ‘친환경’, ‘자연’, ‘유기농’과 같은 말이 붙은 식품을 사기 위해 지갑을 연다.
그래서 그 결과 안전한 식품을 먹게 됐나? 아니다. 안전성을 확인받지 못하기는 매한가지인 식품들을 비싸게만 사먹고 있을 뿐이다. 정부의 반복되는 리스크 커뮤니케이션 실패와 국민들의 인식 속에 단단하게 쌓인 ‘불신’은 결국 국민 개개인에게 과도한 ‘안전 비용’으로 청구됐다.
살충제 계란 사태가 남긴 세 번째 숙제는 더 이상 ‘동물복지’를 미룰 수 없다는 것이다. 이번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다시 한번 언급된 것이 동물복지농장이다. 해마다 반복되는 AI나 구제역 등 ‘축산재앙’들 앞에서 늘 대안으로 등장했던 것이 동물복지농장이다. 대규모 공장식 축산을 동물복지 축산으로 전환하는 것. 단순히 농장의 형태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축산 시스템을 손보자는 이야기다.
정부 역시 동물복지농장을 중요한 대책으로 발표했다. 8월 18일 발표된 농식품부의 ‘국내산 계란 살충제 검사 결과 및 안전관리 강화 방안’에는 “케이지 사육 또는 평사 사육 등 농장 사육환경표시제도 도입, 동물복지 축산 확대 등 산란계 농장의 축사 환경을 개선”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8월 30일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된 ‘농림축산식품부·해양수산부 핵심정책토의’에서도 “밀식 사육에서 동물복지형으로 축산 패러다임을 전환”하기 위한 방법이 이야기됐다. ▲2018년부터 신규 농가에 EU 기준 사육밀도(0.075㎡/마리) 또는 동물복지형 축사 의무화 ▲2025년부터 기존 농가에도 전면 시행 ▲동물복지형 농장 확대 위해 직불금 시설 보조 등 인센티브 ▲기존 농가에 대해서는 개방형케이지 방식 전환 유도 등이 바로 그것이다.
농식품부는 2012년부터 ‘동물복지 축산농장 인증제’를 시행하고 있고, 2015년부터는 ‘동물복지 5개년 종합계획’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2013년 기준 동물복지 인증 축산물 비중은 단 1%. 정부의 목표대로 이 수치를 2019년 8%까지 올린다고 해도, ‘대안’이라 부르기는 민망한 수치다.
앞서 말한 것처럼 동물복지농장은 단순히 농장의 ‘형태’ 문제가 아니라 축산 ‘시스템’ 문제다. 무조건 싸게, 무조건 많이 생산하고 소비하는 시스템이 변화하는 데는 아직 더 많은 사회적 공감이 필요해 보인다.
살충제 계란이 남긴 마지막 네 번째 숙제는 바로 ‘농피아(농식품 공무원+마피아)’ 청산이다. 정부의 전수조사 결과 부적합 판정을 받은 산란계 농장의 약 60%가 ‘친환경 인증’을 받은 곳이었다. 이러한 부실 인증의 배경으로 지목된 것이 바로 농피아다.
농피아가 되는 과정은 이렇다. 친환경 인증을 담당하는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공무원들이 퇴직을 한다. 그리고 친환경 인증기관으로 지정된 민간 업체에 재취업한다. 관련 기관과의 ‘끈’을 바탕으로 검은 유착 관계를 형성해 부실 인증을 남발하는 농피아가 된다.
이낙연 국무총리도 농피아의 유착과 부실 인증에 대해 “충분히 가능성 있다”며 “국민 건강을 볼모로 한 매우 위험한 범죄”라고 강력히 비판한 바 있다. 그에 따라 농식품부는 농피아의 유착 의혹에 대해 감사에 착수하기로 했지만 국민들이 바라는 만큼 시원하게 그 뿌리가 뽑힐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10월, 문재인 정부의 첫 국정감사를 앞두고 ‘관전 포인트’를 예상하는 기사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살충제 계란 사태가 남긴 숙제들은 국정감사 현장에서 얼마나 중요한 이슈로 다뤄질까? 한바탕 비싼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알게 된 ‘소중한’ 과제들. 지금 풀지 않으면 다음날 새로운 ‘사태’로 돌아올 것은 분명해 보인다.
- 월간 작은책 2017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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