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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터뷰] 문명교류학 대가 정수일 “인간다움 지킨 건 실크로드 덕분”

긴 글/인터뷰와 현장기사

by 최규화21 2016. 11. 3.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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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파크도서 북DB

[저자인터뷰] 문명교류학 대가 정수일 “인간다움 지킨 건 실크로드 덕분”

<문명의 보고 라틴 아메리카를 가다>(정수일/ 창비/ 2016년) 책을 받아봤을 때 머릿속에 든 생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걸 언제 다 읽지?’라는 걱정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분이 그분이구나!’라는 놀라움이었다.

1, 2권으로 이뤄진 책. 합하면 1000쪽을 훌쩍 넘는다. 앞뒤 표지에 써 있는 ‘문명교류’니 ‘실크로드’니 하는 말들을 보고 어려운 책일 거라고 겁도 좀 먹었다. 그런데 웬걸? 막상 읽어보니 책장이 술술 잘 넘어간다. 학문적 답사 기록과 대중적 정보와 여정을 담은 여행서의 내용이 적절히 어울려 있다. 특히 저자가 연구자로서 분석과 해설만 하려 하지 않고, 자신의 정서와 생각을 진솔하게 드러낸 점이 책의 재미를 키웠다. 라틴아메리카판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읽는 기분이랄까.

사실 문명교류사에 대해 문외한이라 저자의 이름을 들어볼 일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다른 이름(?)을 듣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무하마드 깐수. 단국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1996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검거될 당시 그의 이름이었다. 4년 뒤인 2000년 그는 출소해 사면복권 됐고, 지금은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소장으로 활발한 연구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학계에서 그는 명실상부 ‘문명교류학의 대가’로 꼽힌다.

10월 21일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정수일 소장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문명의 보고 라틴 아메리카를 가다>의 성격을 한마디로 “탐방과 여행 실록의 겸행(兼行)”이라고 설명했다. 집필 당시 가장 신경을 쓴 부분도 그러한 책의 성격에 맞게 양쪽의 내용이 고루 섞이게 하는 것이었다. 지식과 재미의 두 마리 토끼. 내가 읽어본 바로는 그 목적은 나쁘지 않게 달성한 것 같다.

이 책은 <실크로드 문명기행>(한겨레출판/ 2006년)과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창비/ 2010년)에 이은 해상 실크로드 답사기(총3부)의 첫 번째 책이다. 그는 이 책을 위해 2012년 62일간, 2014년 18일간 두 차례에 걸쳐 중남미 해상 실크로드 탐방을 마쳤다. 모두 80일에 이르는 긴 시간 동안 답사를 했지만, 그런데도 그가 제일 신경 쓴 것은 “촉박한 시간 안에 필요한 유적 유물을 탐방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매일 탐방 내용을 현장에서 간단하게 메모했다가 당일 저녁에 기억을 더듬어 메모를 정리하는 일” 또한 철저하게 지켜야 했다.

정수일 소장은 1934년생, 우리 나이로 현재 83세다. 첫 번째 답사 당시에도 이미 여든을 코앞에 둔 고령이었다. 그런데도 과감히 멀고 먼 답사길에 오른 그의 열정이 놀라웠다. 정수일 소장은 “지구의 서반구에 있는 그 요원한 땅, 그 험난한 곳을 팔질(八耋, 여든)의 문턱에 다가선 이 나이에 굳이 찾아간 이유”에 대해 “오래도록 응어리로 간직해온 숙원, 그것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절박한 숙원 때문”이라고 책에 밝혔다. 대체 해상 실크로드가 무엇이길래?

“자고로 세계문명이 교류하고 소통하며 인류가 서로 왕래한 길을 통틀어 실크로드라고 하는데, 이 길에는 동서로 크게 유라시아(유럽과 아시아) 북방 초원지대의 초원 실크로드, 중간에 오아시스들을 연결하는 오아시스 실크로드, 남쪽에는 구대륙(유라시아)과 ‘신대륙’(아메리카대륙)을 잇는 해상 실크로드의 3대 간선이 병존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학교의 역사 수업 시간에는 주로 오아시스 실크로드만 가르쳤지, 초원 실크로드나 해상 실크로드는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실크로드 답사’ 하면, 고작 중국이나 중앙아시아 답사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멕시코 ‘태양의 피라미드’

이스터섬의 모아이 석상

“라틴아메리카는 문명의 보고… 인류가 공유해야 할 귀중한 유산”

책 제목에도 밝혔듯이, 그는 이번 답사를 통해서 라틴아메리카가 ‘문명의 보고’임을 확인했다. 그는 라틴아메리카가 문명의 보고인 이유는 “잉카문명이나 마야문명, 아스떼끄문명 같은 찬란한 고대문명은 인류가 공유해야 할 귀중한 문화유산”이라며, “그것이 인류문명사에 지대한 기여를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세계 농산물 절반의 원산지이고, 세계 어느 지역에 비해서도 월등한 황금문화와 도자기문화를 꽃피웠고, 풍부한 부존자원은 서구 산업화의 동력이었으며, 다양한 생태계는 <종의 기원>을 비롯해 여러 과학연구의 장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덧붙여 라틴아메리카 문명을 대표할 만한 것으로, 유형문화재로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자연복합유산으로 등재된 해발 2350m의 ‘공중도시’ 마추픽추, 마야문명의 고갱이인 멕시코 치첸이사유적군,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인공구조물인 아스떼끄문명의 정수인 ‘태양의 미라미드’(높이 65m), 약 900구에 달하는 이스터섬의 거석 모아이상”을 꼽았다. 또한 무형문화재로는 “전 라틴아메리카에 보급된 벽화문화와 탱고를 비롯한 다양한 악무”를 꼽았다.

기원 직후인 치무시대(Chimu, 100~700)부터 비꾸아시대(Vicua), 찬까이시대(Chancay, 1000~1200)에 이르기까지의 전기 잉카시대와 후기 잉카시대를 포함한 약 1,500년 동안의 황금문화시대의 유물들이다. 사상 전무후무한 황금문화다. 그래서 우리는 감히 라틴아메리카를 ‘문명의 보고’라고 하며, 늦었지만 오만과 독선을 털고 그 보장(寶藏)을 찾아 길을 떠난 것이다. 눈부신 황금문화 유물 앞에서 우리의 선택이 지당했다는 자부를 느낀다. - <문명의 보고 라틴 아메리카를 가다> 1권 349~350쪽

정수일 소장은 80일 동안 라틴아메리카 20개국을 답사했다. 여건상 한 나라밖에 갈 수 없다면 어느 나라를 먼저 가보면 좋을까? 정수일 소장은 “라틴아메리카 내에서도 문명의 보고 중 보고”인 멕시코를 추천했다. 그 이유는 “유구하고 찬란한 역사문화 전통을 지니고 있고 마야문명의 고갱이라고 할 수 있는 치첸이사유적군, 라틴아메리카 최대의 도시유적인 떼오디우깐유적, 문명의 보고인 국립인류학박물관 등이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고지대로 기후가 좋고, 각종 생태계가 병존하고 있으며, 칸쿤해안을 비롯한 명승지도 수두룩하다”라고 덧붙였다.

재미있는 것은 한민족문명과 유사한 흔적들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정수일 소장은 “옛 아스떼끄문명지대로서 한민족문명과 유사한, 내지는 일치한 문명요소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라며, “어떤 한국 학자는 역사적 유래와 이러한 상사성이나 일치성을 근거로 아스떼끄인들은 우리 민족일 것이라 주장하기도 한다”라고 전했다.

그토록 찬란한 문명을 꽃피운 라틴아메리카이지만, 그들에게는 서구의 식민지배로 지워진 길고 긴 암흑의 시대가 있었다.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를 결정적으로 왜곡한 식민지배의 역사가 책 곳곳에서 확인된다. 정수일 소장은 그 역사를 “인디오문명 말살사”라고 표현하기도 했고, 이후 200여 년간 진행된 ‘미화작업’을 “역사에 대한 용서 못할 범죄”라고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그가 식민지 역사의 비극성을 가장 크게 느낀 곳은 답사 여정 중 어디였을까?

“답사한 모든 곳, 모든 나라에서 그 비극성을 느꼈습니다. 가장 크게, 그리고 생생하게 느낀 곳은 적도상에 위치한 에콰도르 국립박물관에서입니다. 다른 나라 박물관들과 마찬가지로 1층에는 찬란했던 잉카문명 유물들이 제대로 전시되어 있습니다. 정상적인 궤적을 밟아오던 이 나라의 역사는 식민주의자들의 강점과 찬탈, 말살과 멸시에 의해 단절 아닌 단절의 비운을 맞게 됐습니다. 2층에서는, 타의에 의해 맞게 된 역사의 거지중천(居之中天, 텅 빈 공간)이라는 기상천외한 비극을 이 나라의 역사랍시고 몇 점의 성화(聖畫)로 대치하고 있는 현실을 목격했습니다.”

노천식당에서 선보이는 탱고 춤

페루의 베 짜는 여인들

“식민지배로 맞게 된 역사의 빈 공간… 반객위주의 전도된 구조”

정수일 소장은 책에서, 그런 단절의 역사를 “반객위주(反客爲主, 손님이 주인 행세를 함)의 전도된 구조”라고 표현했다. 한 세기 전 식민지배를 겪은 우리 역시 무겁게 여겨야 할 대목이다. 정수일 소장은 라틴아메리카의 역사가 우리에게 “어떠한 외세의 간섭이나 압력을 배척하면서 자기 역사는 자기 힘으로 지키고 가꾸며 이어나가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고 말하기도 했다.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대목은 또 있었다. 한 우리에서 살아가는 쿠바산 악어와 미국산 악어 이야기. 처음에는 서로 싸우고 잡아먹기까지 했던 악어들이 지금은 사이좋게 공생하면서 자연스레 교배해 새 품종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정수일 소장은 쿠바를 방문하며, 오랜 세월 얼어붙어 있던 쿠바와 미국 사이에 해빙의 훈풍이 부는 것도 목격했다. 그리고 한반도의 평화 문제에 대해 “평화의지만 굳건하다면 극복 못할 난관은 없다는 점”을 느끼고 왔다고 이야기했다.

우리의 방문 직전인 7월 13일, 인도적 지원물자를 만재한 화물선 안나세실리아(Anna Cecilia)호가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항구에서 기항해 아바나항으로 직항했다. 이것은 양국 간에 50년간이나 단절되었던 해상운송이 회복되었음을 말한다. (줄임) 이 대목에서 좀 전에 사빠따 악어사육장에서 미국산 악어와 쿠바산 악어가 갈등하다가 공생하는 장면이 자꾸만 눈앞에 떠오른다. 미물들마저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이 인간다워야 하지 않겠는가. - <문명의 보고 라틴 아메리카를 가다> 2권 319쪽

<문명의 보고 라틴 아메리카를 가다>는 문명교류사에 대해 잘 모르는 ‘초심자’들에게 좋은 입문서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근본적인 질문 하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왜 실크로드를, 문명교류의 역사를 알아야 할까?

“인간이 오늘날까지 수천 년 동안 그나마 ‘인간다움’으로 살아오게 된 것은 실크로드를 통한 문명교류 덕분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혜택을 제대로 알지 못하다가 겨우 130여 년 전부터 눈뜨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이 해결하지 못한 각종 갈등과 모순을 인간관계의 공통분모인 문명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이른바 ‘문명대안론’이 시대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이것을 실현하자면 실크로드를 통한 문명 간의 교류와 소통, 통섭(通涉)이 필수입니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실크로드학’이나 ‘문명교류학’을 새로운 인문학 분야로 개척 중에 있으며, 한국 학계는 그 진두에 서 있습니다.”

정수일 소장은 현재 ‘문명의 요람 아프리카’란 제목의 아프리카 문명답사기를 쓰고 있고, 이어 ‘문명의 용광로 아시아’(가칭)란 제목의 아시아 문명답사기도 쓸 계획이다. 84세가 되는 2017년에는 유럽 문명답사기 집필을 위한 유럽 답사까지 계획하고 있다. 인간관계의 공통분모인 문명 간의 소통과 통섭. 그의 식지 않는 열정이 새로운 세대, 새로운 인류와 함께 만들어낼 소통을 기대한다.

우리는 값진 재보를 쌓아둔 창고 같은 라틴아메리카의 문명에서 어제의 어울림이나 상관성을 찾아낼 뿐만 아니라, 내일에 유용한 공통 가치들을 골라 건져내야 한다. 그럴 때 지금까지 격폐되어온 신-구대륙 간의 간극을 줄이고 공생공영을 함께 도모할 수 있으며, 지구는 동-서반구를 가리지 않는 일체로 영원히 남아 있게 될 것이다. - <문명의 보고 라틴 아메리카를 가다> 1권 27쪽

사진 : 정수일/ 창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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