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닮은꼴 노동르포 ‘뜻밖의’ 시너지

긴 글/리뷰

by 최규화21 2016. 4. 6.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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닮은꼴 노동르포 ‘뜻밖의’ 시너지

[서평] <기록되지 않은 노동>과 <섬과 섬을 잇다 2>



답답한 사람들이다. 어쩌자고 이런 책들을 줄줄이 냈을까. 지금이 어떤 시대인가. 자기가 직장인인 줄은 알아도 노동자인 줄은 모르는 시대, ‘연봉 올리는 법’ 자기계발 책은 사 읽더라도 ‘필수 근로기준법’ 사회과학 책은 쳐다도 안 보는 시대 아닌가. 그런 시대에 ‘노동’을 떡하니 내걸고 책을 내다니 대체 무슨 배짱인가. 출판사가 일부러 망하려고 작정했을 리는 없고, 뭔가 ‘그래도 망하지는 않겠다’ 싶은 비장의 무기가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기록되지 않은 노동>(삶창)과 <섬과 섬을 잇다 2>(한겨레출판)를 살펴보려는 이유다.


지난해 12월 30일에 나온 <섬과 섬을 잇다 2>와 올해 1월 20일에 나온 <기록되지 않은 노동>. 한 달이 채 못 되는 사이에 줄줄이 나온 두 책은 언뜻 봐도 비슷한 구석이 눈에 띈다. 바로 ‘노동’과 ‘르포’라는 점이다. <섬과 섬을 잇다 2>에는 서울 광화문에서 농성 중인 장애인 이야기가 한 편 들어 있지만, 나머지 네 편의 이야기는 모두 노동자들의 투쟁 이야기다. <기록되지 않은 노동>은 제목 그대로, 우리 사회 곳곳에 숨겨진 노동하는 여성들의 이야기 스물세 편을 모은 책이다. 르포의 현장성은 <섬과 섬을 잇다 2>에서 더 두드러지지만, <기록되지 않은 노동>은 다양한 인터뷰이들의 목소리를 성실히 담아내려 노력했다.


만화의 힘은 역시 강했다. <섬과 섬을 잇다 2>을 읽고 가장 크게 느낀 바다. 노동자들의 투쟁을 다룬 르포집, 특히 주인공들과의 인터뷰가 중심인 르포집을 만들 때 아주 신경 써야 할 점이 있다. 그건 바로 ‘거기서 거기’ 같은 느낌을 줘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사업장 이름만 바뀌고 업종만 바뀌었을 뿐, 당하고 뺏기고 터지고 하는 이야기는 어딜 가나 비슷하기 십상이다. 신문기사를 읽을 때도 그렇지 않나. 노동문제에 아주 관심이 있어서 여러 현장의 투쟁 소식을 꼼꼼히 챙기는 사람이 아니라면, 실제로 대부분의 ‘평범한’ 독자들에게 노동문제는 ‘거기서 거기’인 임금인상 문제 또는 불법파업 문제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다섯 군데의 현장 이야기를 2인 1조의 ‘만화가+르포작가’가 각각 만화와 글이라는 이중의 매체로 표현한 것은 평면적인 이야기가 입체적으로 독자의 눈앞에 살아 펼쳐지게 해줬다. 그것은 각각의 만화가 하나의 완결된 스토리를 가지고 분량상으로도 비중 있게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저 지루함을 달래주기 위한 삽화 수준으로 들어갔다면 그런 효과는 크게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림체도 다르고 구성도 다른 만화로 직접 독자의 눈앞에 생생하게 보여준 것이 각각의 이야기가 가지는 차별성을 부각시켰다.


르포 글 역시 작가마다 다른 개성이 느껴졌다. 특히 전주 지역 버스 노조 이야기를 다룬 송기역 작가의 글은 인상적이었다. 2014년 회사 현관 국기봉에서 자결한 신성여객 버스노동자 진기승 씨의 이야기를 소설적으로 재구성한 도입부는 읽는 내내 깊이 몰입하게 만들었다. 송기역 작가의 글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인터뷰이의 생생한 얼굴과 구체적인 장면이 현장감 있게 그려지는 점이 좋았다.

 

“미안해. 아빠 회사에 왔어. 아빠 이제 집에 못 가.”

 

나는 핸드폰의 종료 버튼을 눌렀다. 어디선가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나는 주변 사람에게 예약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지상에서의 마지막 일이었다. 내일 내가 없는 세상에서 남은 이들이 받을 문자였다.


“그동안 가정이 파괴되고 내 생활은 엉망이 돼버렸네요. 가정파괴는 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이용만 당한 것 같아 너무 억울하네요. … 다음 생에는 버스기사가 대우받는 곳에서 태어나고 싶습니다.” - <섬과 섬을 잇다 2> 84~85쪽 ‘버스는 생명을 싣고 달린다’(송기역) 중에서

 

<기록되지 않은 노동> 책을 받아들고 목차를 보는 순간,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런 인터뷰이들을 다 어떻게 섭외했을까?’ <섬과 섬을 잇다 2> 작가들에게는 좀 미안한 이야기지만, ‘지금 투쟁하고 있는’ 현장을 섭외하는 건 별로 어렵지 않다. 그들은 한 마디라도 더 자신들의 이야기를 알리기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이니까 취재를 마다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기록되지 않은 노동>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다르다. 노동조합을 만들고 파업 투쟁을 하거나 농성을 하거나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으니까(5장에 노동조합을 만든 여성 노동자들 이야기가 나오지만 ‘투쟁현장’이라고 표현하기는 힘든 곳들이다).


직장인들의 술자리는 보통 회사 욕하고 상사 욕하고 신세한탄 하는 것으로 채워지지만, 그 앞에 녹음기를 갖다 대고 인터뷰를 하겠다고 하면 십중팔구 머뭇거리며 걱정부터 하기 마련이다. 혹시나 회사에서 인터뷰 글을 보지는 않을까, 자기한테 불이익이 오지는 않을까 걱정도 하고, 좋은 얘기도 아니고 고생하는 이야기를 뭣하러 하나, 이웃이나 가족들이 보고 불쌍하게 생각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도 한다. <기록되지 않은 노동>의 저자들은 그런 걱정 속에 ‘숨겨진’ 여성들을 불러내고, 그들의 이야기를 성의껏 기록했다.


언젠가 한번쯤 이른바 진보언론의 기획기사쯤에서나 봤을까 말까 싶은, 텔레비전 뉴스나 ‘주요’ 일간지 같은 데서는 절대 찾아볼 수 없는 노동. <기록되지 않은 노동>은 야쿠르트 아줌마, 행사 도우미, 여성 트레이너, 여성 대리운전, 톨게이트 여성 노동자, 산모도우미, 돌봄교실 선생님, 방과후 교사, 어린이집 보육교사 등 다양하고 ‘숨겨진’ 노동의 주인공들을 발굴해 소개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줄 만하다. 아무래도 저자가 ‘여성노동자글쓰기모임’ 소속 열세 명의 여성이라는 점이 그런 장점을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싶다.


저자들의 갖는 차별성은 이 책의 3장에서 빛을 발한다. 3장 ‘텔레비전에 안 나오는 나의 노동 이야기’에는 저자 네 명이 몸소 겪은 ‘여성노동’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이 책에 실린 인터뷰들을 한 편 한 편 읽어나가면서 아쉬움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앞서 얘기한 ‘거기서 거기’ 문제 말이다. 300쪽 정도의 분량 안에 스물세 편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 보니, 아무래도 비슷비슷한 이야기가 자꾸 나온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이야기가 흘러가는 것이 좀 바쁘다고 해야 할까? 얼마나 당하고 얼마나 빼앗기고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만 반복적으로 이야기되는 느낌이 좀 있었는데, 3장의 글들이 그런 아쉬움을 많이 상쇄해줬다. 책 전체에서 3장의 비중이 더 커졌어도 좋았겠다 싶었다. 3장에 실린 글들에는 확실히 ‘눈앞에서 보는 듯한’ 장면이 살아 있었다. 그리고 직접 경험한 사람만이 전할 수 있는 ‘공감’의 힘이 느껴졌다.


“왜요? 고소라도 하시게? 고소하면 누가 준답디까? 아줌마, 그 나이에 이런 데 다니면 쪽팔린 줄 아셔야지. 며칠이나 일했다고 돈을 받으러 와?”


과장은 내 삶의 불리한 조건들을 약점 삼았다. 안전한 환경에서 일하고 싶은 내 욕구와 최소한의 돈을 지켜야 하는내 욕구가 벼랑 끝에 섰다. 뒤로 물러설 데가 없었다.


나는 과장이 한 말을 꼭꼭 씹어서 내뱉었다. “네 말 맞아. 못 배워서, 늙어서, 이 꼬라지로 살아서, 그 돈이 필요한 거야. 그 돈 꼭 받아야겠어. 지금 입금하지 않으면 내가 붙인 거 싹 다 뜯어버릴 거라”며 악다구니했다. - <기록되지 않은 노동> 162쪽 ‘어느 하청공장 지하 창고에서의 3일’(윤춘신) 중에서

 

<기록되지 않은 노동>에서 ‘공감’이라는 키워드로 차별성을 얻은 부분이 3장이라면, <섬과 섬을 잇다 2>에서는 스타케미칼 이야기를 취재한 유명자의 글이 그랬다. 그래, 그 사람 맞다. 재능교육 해고노동자 유명자. <섬과 섬을 잇다 1>에 인터뷰‘이’로 참여해 재능교육 투쟁 이야기를 들려준 그녀는 <섬과 섬을 잇다 2>에서 인터뷰‘어’로 스타케미칼 투쟁 이야기를 기록했다. 2822일의 농성 끝에 올해 1월 복직한 유명자 씨가 작가로 참여한 것은 '연대'의 참뜻을 살리는 훌륭한 기획이었다.


신문 기사나 텔레비전 뉴스에서 ‘투쟁’하는 사람들을 가끔 보긴 하지만, ‘저 사람들은 뭣 때문에 저렇게까지 싸울까’ 하는 궁금증은 해소하기 힘들다. <섬과 섬을 잇다 2>는 그런 현장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여준다는 장점이 있다. 다만 ‘싸움’이 있는 곳에는 양쪽의 목소리가 있기 마련인데, 지나치게 일방적으로 한쪽의 목소리만을 전한다는 인상은 지울 수 없었다. 분량상 기계적인 중립을 지키라는 소리는 절대 아니지만, 가끔은 ‘저쪽’의 이야기도 전해주는 게 ‘이쪽’ 이야기의 진실함을 더 부각시키기도 하는데 말이다.  


<기록되지 않은 노동>과 <섬과 섬을 잇다 2>. 3주 사이에 두 권의 책이 연달아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이 많았다. 두 출판사 다 쉽게 망해서는 안 되는 출판사들인데 미리 ‘쇼부’(합의) 좀 보고 내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마치 소녀시대와 원더걸스가 같은 달에 새 앨범을 내서 서로 손해 보는 짓 같았다고나 할까. 하지만 두 권을 다 읽고 나니, 내가 괜한 걱정을 한 것 같다. 오히려 두 권을 같이 읽고 나니 생각 못한 ‘시너지’ 같은 것이 느껴졌다. 크게 봐서는 비슷한 주제이지만 각각이 가진 장점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기록되지 않은 노동>을 통해 자라난 관심이 <섬과 섬을 잇다 2>를 통해 채워질 수도 있고, <섬과 섬을 잇다 2>를 통해 생겨난 물음이 <기록되지 않은 노동>을 통해 해결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관심 없는 사람들이야 둘 다 쳐다도 안 보겠지만, 작은 관심으로 한 권을 집어든 사람이라면 다른 한 권에 담긴 이야기까지도 충분히 궁금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참에 두 출판사가 공동 마케팅을 해보는 건 어떨까? 혹시나 두 출판사의 마케터도 이 책들이 ‘둘 다 죽을까’ 걱정하고 있었다면, 용기를 내어 서로에게 연락해보시길 바란다.


- 계간 <삶이보이는창> 2016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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