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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터뷰] 친일파 저격수 정운현 "정치권 친일 2세대 대단해"

긴 글/인터뷰와 현장기사

by 최규화21 2016. 3. 25.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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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파크도서 북DB

[저자인터뷰] 친일파 저격수 정운현 "정치권 친일 2세대 대단해"

* 3단계의 점층적 형식으로 선보이는 ’프리즘 인터뷰’입니다. 삼각형의 틀을 통해 빛을 다채롭게 보여주는 프리즘처럼 작가와 책에 대한 이야기를 쉽고 다양하게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 기자 말





[프리즘①] 정운현의 말, 말, 말



- "주목한 것은 여성은 이중고, 삼중고를 겪었다는 점이죠. 밖에 나가서 의병활동을 하든 광복군 훈련을 하든, 집에 오면 밥을 하고 빨래를 해야 해요."



- "문제는 그들의 후예, 후학들이 대를 이어 ’제2의 친일’을 구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정치권의 ’친일 2세대’는 그 위세가 대단하다고 하겠습니다."



-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명예회복은 50점도 주기 힘들죠. 역대 정권들이 그런 걸 꽉 틀어막다 보니 학계 연구조차도 잘 안 되고 있는 거예요. 자칫하면 빨갱이로 몰릴 테니까."



[프리즘②] 1200만 원 독자 펀딩으로 탄생한 책



▷ 정운현은 누구? 기록하는 사람. 1959년생 중년이지만 여전히 ’열혈청년’이라 자부한다. 1984년부터 중앙일보, 서울신문, 오마이뉴스 등을 거치며 20여 년 동안 기자로 살았고, 지금은 전업 작가로 산다. 1980년대 말 친일연구가 임종국 선생을 알게 된 뒤 친일파 연구를 인생의 과업으로 삼았다. 그동안 <친일파는 살아 있다> 등 친일파 관련 책을 10여 권 썼고, 한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사무처장을 지냈다.



▷ 어떤 책을 냈나 여성 독립운동가 24인의 이야기를 담은 <조선의 딸, 총을 들다>. 지난해 12월부터 ’묻히고 잊힌 제2의 안윤옥들’이라는 제목으로 포털사이트 다음 ’스토리펀딩’을 통해 먼저 공개돼 독자들의 뜨거운 호응을 이끌어낸 책이다. 한 달 반 정도 진행된 펀딩에 참여한 독자는 모두 518명. 무려 1172만7000원의 후원금이 모금됐다. 작가조차 놀랐다는 십시일반 독자들의 정성으로 이 책은 출간될 수 있었다.



▷ 지금 왜 그를 만났나 한-일 ’위안부’ 피해자 합의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 등 지난겨울 국내 정치의 가장 큰 이슈는 ’과거사’였다. 일제의 식민지배는 우리 근현대사의 가장 큰 질곡. 그것이 지금까지도 ’핫’한 이슈인 까닭은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는 친일청산 문제 때문이 크다. ’친일파 저격수’로 살아온 정운현 작가의 새 책을 통해 우리에게 남은 숙제를 다시 한번 분명히 확인하고자 했다.



▷ 인터뷰 현장 스케치 기자 출신 작가들을 만날 때는 더 긴장된다. 인터뷰 준비를 잘했나 못했나 편집국장한테 검사받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정운현 작가는 그 말을 듣자마자 "왕년에 뭐 아닌 사람이 어디 있나요. 언론사 나오고 나서는 그런 거 다 잊어버렸어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양복 안주머니에서 꺼내든 답변지. A4용지 여섯 쪽 분량으로 답변을 미리 준비해온 것이다. 정확한 이야기만 전달하겠다는 ’기자스러움’이 엿보였다. 인터뷰가 끝나고, 소주 한잔과 함께 ’수다’를 이어간 합정역 순댓국밥집은 잊지 못할 맛집이었다.





[프리즘③] 일문일답 들여다보기



Q 어떤 계기로 언제부터 집필을 시작하셨나요?



작년 여름 영화 ’암살’의 안옥윤(배우 전지현)이 관심을 받으면서 국민들이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주목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런 국민들의 관심은 있는데 그것을 채워주는 것(콘텐츠)이 없었어요. 사실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연재를 할 만한 사람이 많지는 않아요.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거나 폄훼했다는 건 아니지만, 독립운동사 기록이 남성 위주로 치우쳐온 것은 사실이니까요. 그리고 전문 연구자들은 대중적인 글쓰기에 익숙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 ’아, 내 몫인갑다’ 생각한 거죠.



Q 자료를 구하고 또 정리하는 일이 정말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어떤 식으로 진행하셨나요?



여성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사전 연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몇 분은 평전이 있고 또 몇 분은 관련 논문도 있습니다만, 일생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자료는 흔치 않았습니다. 게다가 일제시대 원문 자료를 다시 찾아서 확인해야 하는 일도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국가보훈처, 독립기념관, 국사편찬위원회 등 국가기관에서 구축한 역사데이터베이스는 기본이요, 일제 당시 발행된 신문을 두루 뒤졌습니다. 사진자료가 많지 않아서 당시 신문기사를 사진 대신 쓰기도 했습니다.



Q 책에 소개한 24인 가운데 가장 특별하게 생각되는 두 사람을 꼽으라면 누구를 꼽으시겠습니까?



첫 번째로는 안경신 의사입니다. 여자의 몸으로 남자들도 선뜻 나서기 어려운 폭파의거에 참여했고, 비록 거사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얼마 뒤 체포됐을 때 안 의사는 출산한 지 불과 12일 정도 지난 상태였습니다. 그 몸으로 갓 태어난 아이와 함께 8년간 옥살이를 했는데 감옥에서의 영양실조 탓으로 아이가 시각장애인이 됐습니다. 게다가 안 의사는 물론 그 가족들의 행방도 알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두 번째는 ’여장군’이라 불린 김명시 선생입니다. 젊어서부터 조선공산당에 가입해 활동했고, 상해와 국내를 오가며 활동하다 인천에서 파업을 지도하던 중 체포돼 7년간 감옥살이를 했죠. 그 뒤 연안 조선의용대로 가 무정 장군 밑에서도 활동했어요. 해방 후 귀국해 서울서 활동하다 모종의 사건으로 체포돼 부평경찰서 유치장에 수감 중 1949년 치마를 뜯어 목매 스스로 숨을 끊었습니다. 일각에서는 타살 의혹을 제기하기도 합니다만, 이유야 어쨌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Q 책에는 차마 소개하지 못했지만 ’25번째’ 인물로 고민했던 분이 있다면 소개해주시죠.



권애라(權愛羅) 여사입니다. 신여성이에요. 유치원 교사 출신으로 3.1혁명 때 만세항쟁에 가담한 이후 국내와 중국에서 항일투쟁을 하신 분입니다. 권 여사의 남편은 의열단 출신 김시현(金始顯) 의사로, 김 의사는 일제 때 6차례에 걸쳐 16년간 옥고를 치른 분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지금도 아니고 일제 때 여섯 번, 총 16년을 감옥에 있었다니. 초인적입니다. 그런데 여태 포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1952년 ’이승만 대통령 저격미수사건’에 연루돼 감옥살이를 한 때문입니다.



권애라 여사는 1942년 중국 길림에서 아들과 함께 관동군 특무대에 체포돼 1년 이상 비밀감옥에서 고문을 당했고, 이후 장춘고등법원에서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해방을 맞아 풀려났습니다. 권애라 여사는 김시현 의사의 부인이기도 하지만 독자적으로 활동을 했고, 뚜렷한 족적을 남겼어요. 이 책을 보고 어떤 분은 저한테 2권, 3권을 더 내라는 말씀을 하더라고요. 여기 못 들어간 분들이 훨씬 많잖아요 그래서 저도 한 권 정도는 더 내볼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2권을 쓴다면 꼭 쓰고 싶은 분이 권애라 여사예요.





Q 같은 사실을 쓰더라도 쓰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그려질 수도 있습니다. ’여성’이기 때문에 특별히 유념한 부분이 있나요?



여자라고 해서 업적을 더 높이 사준다거나 하는 것 자체가 성차별이라고 봐요. 다만 주목한 것은 여성은 이중고, 삼중고를 겪었다는 점이죠. 밖에 나가서 의병활동을 하든 광복군 훈련을 하든, 집에 오면 밥을 하고 빨래를 해야 해요. 아이들을 키우고 시부모 봉양에 농사까지 지어야 돼요. 봉건 잔재가 지금보다 훨씬 많이 남아 있던 그 시대에는 정말 힘들었겠죠. 그런 점은 조금 배려를 했어요. 두 곱 세 곱의 일을 한 거니까.



Q 아직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제대로 평가를 받고 명예를 회복하려면 우선적으로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요?



당사자나 증인은 이제 거의 다 사망했습니다. 독립운동 관련 재판기록이나 수형자 기록 같은 것을 뒤지고 재검토하는 일 말고는 달리 다른 방법이 없어 보입니다. 특히 서대문형무소 수감자 기록 가운데는 여성들이 적지 않은 데 그간 이들에 대한 검토가 부족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혹자는 이렇게도 이야기해요. ’독립운동가 남자가 만 명이면 여자도 만 명이다.’ 상징적인 표현이죠. 지금은 독립유공자 1만4000명 중 여성이 270명이란 말입니다. 꼭 남녀 비율이 1:1이 돼야 한다는 말은 아니지만 (여성이) 너무 적은 건 확실해요. 열 배 스무 배의 발굴 노력이 필요해요. 그동안 너무 소홀했던 것을 반성하고 되돌아봐야죠.



Q 좌익 활동 이력이 해방 후 정부 포상이나 사회적 평가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 인물들이 여럿 있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그런 이력이 어느 정도나 영향을 미쳤다고 보시는지요.



국가 포상의 기본법인 상훈법은 ’서훈 취소 등’을 규정하고 있는데요, ’국가안전에 관한 죄를 범한 사람으로서 형을 받았거나 적대지역(敵對地域)으로 도피한 경우’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사회주의 계열에서 독립운동을 했다고 해서 건국훈장을 주지 말라는 규정은 없습니다만, 바로 이 조항이 적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대한민국은 반공을 국시(國是)로 하고 있어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에 거부감을 갖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죽산 조봉암(曺奉巖) 선생의 경우 이승만 정권 때 농림부장관까지 지냈는데도 조선공산당 출신이라는 이유로 여태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1929년 ’광주학생항일의거’의 주역 장재성(張載性)은 월북자여서 여태 훈장을 받지 못한 반면 그의 동지나 후배들은 전부 포상을 받았습니다. 훈장은 독립운동 행적을 가지고 주는 거지, 좌냐 우냐 따져서는 주는 건 아니라고 봐요.



독립유공자 1만4000명 중 여성 270명... "열 배 스무 배 발굴 노력 필요"



Q 현재 대한민국의 여러 가지 모순의 뿌리를 ’미완의 친일청산’에서 찾는 시각이 있습니다. 친일청산의 완성을 수치로 100이라 본다면 지금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 와 있다고 보십니까?



우선 인적 청산의 경우 당사자가 거의 다 자연사한 상태에서 저절로 청산이 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흡하지만 해방 후 ’반민특위’에 이어 참여정부 시절에도 국가 차원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 청산작업을 한 바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후예, 후학들이 대를 이어 ’제2의 친일’을 구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정치권의 ’친일 2세대’는 그 위세가 대단하다고 하겠습니다. 제도적 청산은 상당한 수준에서 마무리됐다고 생각되는 데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개칭한 것이 그 한 예입니다.



반면 사회·문화적 청산은 아직도 미흡한 구석이 많아 보입니다. 친일반민족 행위자들의 이름을 딴 각종 상(賞)이나 기념사업, 그리고 건설 현장이나 출판계 등에서 습관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일본식 용어 등은 아직도 여전한 실정입니다.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명예회복은 50점도 주기 힘들죠. 자조적인 말만 있잖아요. ’독립운동을 하면 삼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삼대가 흥한다.’ 기껏해야 민주정부 들어서 10년 정도 청산 작업이 진행됐지, 역대 정권들이 그런 걸 꽉 틀어막다 보니 학계 연구조차도 잘 안 되고 있는 거예요. 자칫하면 빨갱이로 몰릴 테니까.



Q 작가님의 삶에서 ’친일청산’이라는 화두가 가지는 의미는 어느 정도인가요?



부끄러운 역사에 대한 참회와 반성을 촉구하자는 것입니다. 만델라 대통령 시절 남아공에서 활동한 진실화해위원회가 성공을 거둔 가장 큰 배경은 당사자들의 고백과 참회, 사죄와 용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역사청산과 함께 화해를 이끌어낼 수 있었죠. 우리도 참여정부 시절 남아공을 본 따 시도했는데, 우리는 실패했습니다. 증언에 나서는 사람도 별로 없었고 사죄와 참회,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 거의 전무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전통은 해방 후 친일파를 제대로 단죄하지 못한 데서 비롯한 악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도 처음에는 분노에서 시작했어요. 어느 시점부터는 나이가 들어서 유연해진 건지, 열불 내서 떠든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역사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차원이 돼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동안 쓴 친일파 책들도 사료에 입각해서 차분하게 썼어요. 10여 권 썼습니다만 단 한 권도 소송에 걸린 책은 없습니다. 사실로써 설득하고, 그것으로 그들이 반성하면 용서를 구하게 되고, 그리고 그들을 용서하면 화해가 이뤄져요. 그게 역사와의 화해거든요. 제대로 된 인정, 사죄, 참회, 용서가 없으니까 화해가 없는 거예요.





Q 역사학자들이 한국 현대사에서 좀 더 연구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분야가 있다면 말씀해주시죠.



통사 위주의 주류학문에만 매달리다 보니 친일 반민족사 같은 것은 주변학문으로 밀려나 소홀히 다뤄지고 있습니다. 한일 간의 과거사는 아직도 현실 속에서 주요 이슈로 다뤄지고 있으나 우리 역사학계나 여성학계에 위안부 문제 전문 연구자가 과연 몇 명이나 되는지 궁금합니다. 한일관계사 같은 분야는 국가 차원에서 지원을 해서라도 연구자를 길러내야 할 것입니다. 게다가 통일시대를 앞두고 북한 연구자도 더 많이 배출돼야 할 것입니다.



Q 20여 년간 기자로 살다가 지금은 전업 작가로 살고 계십니다. 기자 시절과 비교하자면 어떤 점이 달라졌나요?



작가라는 말이 아직은 생소해요. 우선 하루하루 주어진 일에 급급하기보다는 자신의 계획대로 추진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 같습니다. 책을 낸다면 주제선정에서부터 방향, 일정관리, 출판사 선정 등을 자신이 주도 하에 주체적으로 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특정 매체에 소속돼 있다면 이런 것이 자유롭지만은 않죠.



기자로서 내 제일 큰 보람은 일반인들이 만날 수 없는 역사적 인물들을 만난 거예요. 단순히 한철 지나가는 정치인이 아니라…. 내가 나중에 칠팔십이 돼서 회고록을 쓴다면 내 얘기보다 내가 만났던 분들, 내가 꼭 기억해야 할 분들 이야기를 쓰고 싶어요. 기자가 됐든 작가가 됐든 죽어도 나는 기록하다가 죽어야 돼요. 그게 제 본분이에요. 기록하는 사람.



Q 앞으로는 또 어떤 책을 보여주실지 기대됩니다. 준비 또는 구상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말씀해주시죠.



그간 제가 관심 갖고 공부해온 분야가 일제 통치사, 항일투쟁사, 친일 반민족사, 그리고 해방 후 현대사 등 우리 역사에 관한 것이다 보니 아무래도 앞으로도 이 분야의 책을 더 낼 계획입니다. 다만 통사(通史)보다는 인물사, 생활사 등 미시사(微示史)를 주로 다뤄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작년에 소설(<작전명 녹두>)을 처음 출간했는데요, 쓰면서 재미와 보람을 느꼈습니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을 구현해낼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 같습니다. 앞으로 기회가 닿으면 우리 근현대사를 줄기로 한 대하 역사소설을 써보려고 합니다.



Q 마지막으로 현대사의 진실을 알지 못하는 보통의 사람들이 조금은 편하게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책들이 있다면 추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쉽게 읽을 수 있는 대중적 역사책으로는 원로 재야사학자인 이이화 선생이 펴낸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언론학자인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강준만 교수가 펴낸 <한국 근대사 산책>과 <한국 현대사 산책> 등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노동운동가 출신의 소설가 안재성씨가 그간 우리 역사의 공백지대로 남아 온 사회주의 계열의 인물사를 다룬 책들도 편하게 읽을 수 있는 대중서라고 생각됩니다.





 

사진 : 신동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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