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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은 조미향 선생님께

긴 글/생활글

by 최규화21 2010. 5. 14.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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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고 싶은 조미향 선생님께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선생님 이름 앞에 어떤 말을 넣어서 불러야 할지요. ‘존경하는’, ‘그리운’, ‘고마운’ 등 여러 말을 썼다 지우고 결국 그냥 ‘보고 싶은’으로 했습니다. 한 번도 직접 선생님을 그렇게 불러 본 적은 없지만 해마다 5월이면 제 마음은 그랬습니다. 선생님이 보고 싶었습니다. 5월에는 스승의날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제가 선생님을 보고 싶어하는 데는 다른 까닭이 있습니다.

  선생님과 함께 에밀레종을 보러 갔던 때가 5월이었습니다. 스무 명 남짓 됐던 것 같습니다. ‘문예’에 대한 아무 관심 없이 그저 축구반이나 농구반에 지원했다가 가위바위보에 져서 문예반에 ‘밀려’ 들어온(부끄럽지만 저도 그랬습니다) 중학교 1년 까까머리들을 데리고 선생님은 경주박물관으로 가셨지요. 다른 아이들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저는 부모님 없이 시외버스를 타고 나가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그 가운데는 다른 특별 활동반 선생님들처럼 대충 시간이나 때우다가 일찍 집에 보내 주지 않고 괜히 ‘이상한 데’나 간다고 투덜댔던 녀석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박물관에 도착해서 입장권을 끊어 한 장씩 쥐어 주시면서 선생님이 하신 말씀도 뜻밖이었습니다. 당연히 저희들을 쭉 데리고 다니면서 이것 봐라 저것 봐라 설명해 주실 줄 알았는데, 그냥 각자 알아서 보고 몇 시까지 모여라, 하고 마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어리둥절한 상태로 박물관 마당을 걸어가다가 에밀레종과 딱 마주쳤습니다. 아, 그때 기분은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처음 만나는 그 검고 큰 쇳덩어리에서 천 년 역사의 무게와 선조들의 피를 느꼈다……’고 하면 좀 뻥이겠지만, 에밀레종 하나만으로도 선생님이 왜 여기까지 저를 데려 왔는지 까닭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숙제로 써 낸 박물관 답사 후기에는 국어 시간에 배운 ‘여정, 견문, 감상’의 ‘기행문의 3요소’ 따위는 없었고, 오로지 에밀레종 이야기뿐이었습니다.

  집과 학교밖에 모르는 샌님이었던 제가 선생님 덕분에 처음 가 본 곳은 경주박물관만이 아니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화랑이라는 곳을 가 봤던 겁니다. 선생님께서 학교에서는 국어 선생님으로 일하시지만 학교 밖에서는 꽤 이름이 알려진 화가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그 전까지 제가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본 화랑에는 체크무늬 자켓을 입고 빵모자를 쓰고 입에는 파이프를 문 콧수염 난 아저씨들이나 검은 벨벳 드레스를 입고 가슴에는 장미 모양 브로치를 단 아줌마들만 있었습니다. 입장료를 안 내면 못 들어가는 줄 알았고, 일단 들어가면 한 장에 수백만 원이 넘는다는 비싼 그림을 사야 되는 줄만 알았습니다.

  그렇게 화랑이라는 곳을 새롭게 알게 되면서 저는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미술 학원은 아니고 그냥 영어 학원입니다. 집 근처에도 학원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굳이 시내에 있는 큰 학원을 다녔습니다. 왜냐하면 그 학원 바로 옆에는 대구에서 화랑이 제일 많이 모여 있다고 선생님이 소개해 주신 봉산문화거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 인생에서 학교를 제외하고 뭔가를 배우는 곳을 석 달 이상 등록해 본 적은 그때 말고는 없습니다. 당연히 학원 수강증은 그냥 책갈피로 썼고, 저는 주말마다 두 시간씩 화랑을 기웃거렸습니다. 아들 녀석이 중학생 되더니 정신 차리고 학원도 다닌다고 기뻐하셨던 엄마한테는 참 죄송했지만, 다행히 그 학원은 다른 학원보다 수강료가 훨씬 싸서 좀 덜 죄송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 덕에 처음 시작한 것들 가운데 에밀레종보다 화랑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글’입니다. 특별 활동 시간의 대부분을 박물관이나 화랑으로 다니며 보냈지만 가끔 교실에서 글을 직접 쓴 적도 있었지요. 그날 내 주신 주제를 아직도 똑똑히 기억합니다. “내가 지금 학교를 그만둔다면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 나이 마흔이 됐다고 생각하고 상상해서 써 봐라.” 황당했습니다. 지금은 가끔 학교를 다니지 않고 혼자서 공부하는 청소년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그때는 학생이 어떻게 학교를 안 갈 수 있는지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냥 저희들의 인생은 중고등학교, 대학교, 군대까지는 다 똑같고 스물 일고여덟쯤 돼서야 사람마다 좀 달라지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제가 쓴 이야기는 대충 ‘가출을 하고 방황을 하며 몇 년을 보내다가 후회를 하고 농촌으로 가서 날품팔이로 일한다. 성인이 된 뒤 마을 주민들의 인정을 받아서 빈 집도 얻고 소작도 얻어서 그럭저럭 살림을 일구고, 착한 마을 처녀와 조금 늦은 결혼을 해서 아들 하나 딸 하나 놓고 잘 산다’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제 글을 읽으시고 소리를 내서 웃으셨습니다. 그러고는 교실 앞으로 저를 불러서 친구들한테 그 글을 읽어 주게 하셨죠. 쭈뼛거리며 글을 다 읽었을 때 선생님이 제 인생을 바꾼 한마디를 해 주셨습니다. “일간지에 실리는 웬만한 삼류 소설보다 재밌다.”

  기분이 묘했습니다. 그냥 막 기쁜 것도 아니고 진짜 묘했습니다. ‘어라? 이건 뭘까? 이런 글은 한 번도 써 본 적도 없고, 아무도 이런 글을 쓰라는 사람도 없었는데, 이 선생님은 왜 이렇게 좋아하실까?’ 그때부터 써 보지 않았던 글, 누가 쓰라고 하지 않았던 글들을 제 마음대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소설인지 수필인지 시인지 그런 것 따위 상관없었습니다. 아버지한테 혼났을 때도 쓰고, 누나들과 싸웠을 때도 쓰고, 어디선가 잊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쓰고, 이 말 저 말, 말 잘 ‘듣기’만 바라는 어른들한테 내 말을 해 주고 싶을 때도 썼습니다. 그 글을 통해서 ‘나’라는 사람의 존재감을 느끼게 됐다고 할까요? 내 이름만으로는, ‘무슨 중학교 몇 학년 몇 반 몇 번’으로는 표현되지 않는 ‘나’라는 사람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저는 누가 쓰라고 하지도 않고, 아무도 기다리지도 않고, 돈도 안 되는 글을 쭉 써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루 종일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고, “글을 쓰세요! 우리가 글을 쓰면 세상이 바뀝니다!” 하고 이야기하는 일을 밥벌이로 삼고 있습니다. 저한테 글을 보내 주시는 분들은 대개 일하면 일할수록 더 가난해지는 노동자들이나, ‘아버지의 나라’인 이 사회에서 숨죽여 지내는 여성들, 한때는 ‘천하지대본’이었다가 지금은 그냥 ‘고향 지킴이’가 돼 버린 농민들, ‘생각’은 하지 말고 ‘공부’만 할 것을 강요받는 청소년들입니다. 그 가운데는 태어나서 글이라는 것을 처음 쓰는 사람도 있고, 글을 꽤 써 본 사람들도 있고, ‘글쓰기’가 아닌 ‘글짓기’만 배워서 안 쓰는 것보다 못한 글을 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선생님이 저한테 해 주셨던 말씀 때문일까요? 한 달에 수십 편씩 들어오는 글을 읽으면서도 제가 “이 글은 별로네요” 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웬만하면 좋다, 재밌다, 진솔하다, 감동적이다, 하는 말을 더 많이 하게 됩니다. 선생님이 저한테 해 주신 칭찬이 그랬듯이, 제가 하는 짧은 칭찬 한마디도 그 사람들한테 새로운 세상을 열어 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돈이든 힘이든 가진 것 많은 사람들만 기억하는 이 기울어진 세상에서,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진짜 역사’를 기억하게 하는 글쓰기의 힘을 느끼게 해 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사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습니다. 아직도 글은 특별한 사람들만의 것이고, 재주 있는 사람들의 것이고, 잘난 사람들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서글픈 것은 아직은 그 말이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하지도, 재주가 있지도, 잘나지도 않은 사람들의 글을 모아서 책으로 엮는 제 일이 중요한 거라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꿈의 온기만으로 버티기에 서른 살의 세상은 너무 차갑습니다. ‘이게 다 뭔가. 이런 글 한 편 읽고 쓰는 게 무슨 소용이 있나’ 하는 생각이 문득 문득 고개를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이 또 보고 싶어집니다.

  이제야 이렇게 고맙다는 인사를 올리는 저를 용서하십시오. 사실 예전에는 선생님이 보여 주신 에밀레종과 화랑과, 선생님이 해 주신 칭찬의 고마움을 제대로 몰랐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선생님과 함께했던 시간들이 제 인생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를 확인하면서야 비로소 그 고마움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까지 15년이나 걸렸습니다. 그동안 저처럼 선생님 칭찬 덕분에 ‘글쓰기의 세상’을 만난 후배들이 더 많이 생겼겠지요? 선생님이 조금 섭섭해하실지 모르겠지만 선생님 못지않게 그 후배들도 보고 싶습니다.

  선생님, 앞으로도 계속 건강하게 교단을 지키면서 제게 열어 주신 새로운 세계를 더 많은 후배들에게 열어 주십시오. 저도 선생님처럼 그 세계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 주면서 더 신명나게 말하고 글쓰며 살아가겠습니다. 그것만이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을 갚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것을 알고 나니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선생님과 제 사이가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아, 이 말은 이미 가까이 있는 것 같으니 굳이 직접 찾아뵐 필요는 없겠다는 뜻이 ‘절대’ 아닙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보고 싶습니다, 선생님! 더 가까이에서 선생님의 마음을 더 오래 느끼고 지키며 살겠습니다. 여름휴가 때 고향에 내려가면 잊지 않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찾아뵐 때까지 꼭 안녕히 계셔야 합니다. 꼭입니다, 꼭!

 

2010년 5월 13일

문예반 스무 명 가운데, 선생님이 유부녀라는 소문에 유일하게 속상해했던 최규화 올림

   

* 덧붙임말 : 고등학교 3학년 때, 잊지 못할 선생님을 한 분 더 만났습니다. 글 잘 쓴다고 나름 까불고 다니면서도 제대로 된 상 하나 받은 적이 없어서 주위에서 놀림만 실컷 받고 있었는데, 그 선생님이 생각하지도 못한 큰 상을 주시는 바람에 용기를 얻어서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겠다고 마음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 선생님 이름이 조‘향미’ 선생님이랍니다. 참 신기한 인연이죠, 조‘미향’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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