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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리앗보다 즐거운 다윗

긴 글/인터뷰와 현장기사

by 최규화21 2009. 12. 22.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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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리앗보다 즐거운 다윗

 

 

“일터 탐방은 제가 쓰겠습니다.” 말은 해 놓았지만 사실 부담스러웠다. ‘일터 탐방’은 명실상부한 <작은책>의 대표 꼭지인 까닭도 있고, 앞선 두 해 동안 수많은 애독자들을 만들어 왔던 오도엽 작가의 명성 때문이기도 했다. 그 동안 어깨 너머로 인터뷰하는 것도 보고 사진도 찍어 왔지만 막상 혼자 맡아서 해결(?)하려고 하니 막막했다. 12월 9일, 인터뷰를 약속한 날이 되자 부담은 백배가 돼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색하지 않으려 해도 다 티가 났는지, 일손이 넉넉하지 못해 모두 각자의 일로 눈코 뜰 새 없는데도 총무부 선배가 같이 가 주겠다고 나섰다. 속으로는 눈물 나게 고마웠지만 겉으로는 쿨한 척 “아, 그럴래요?” 하고 같이 길을 나서는데 마음이 얼마나 든든한지 몰랐다. 이래서 하나보다 둘이 낫다고들 하나 싶었다.

서울 지하철 2호선 선릉역에서 내려 출구를 빠져나오니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한 고층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서울 시민이 된 지 10년이 다 됐지만 이곳은 올 때마다 나를 주눅 들게 한다. 건물들이 다 얼마나 높고 큰지 이름도 ‘○○빌딩’이 아니라 ‘○○타워’가 많았다. 우리가 찾아가는 곳도 ‘PCA라이프타워’. 영국계 다국적 생명 보험 회사인 PCA생명보험의 노동자들이 구조 조정과 외주화에 맞서서 천막 농성을 벌이고 있는 곳이라고 했다. 멀리서 바람에 펄럭이는 현수막으로 둘러싸인 농성 천막이 보였다. 가까이 가 보니 체구가 작은 여성 한 분이 천막 주위에 어질러져 있는 팻말을 주워서 잘 보이게 정리를 하고 있었다. “어제 제가 좀 아파서 천막에 사람이 없다 보니 여기 있던 것들을 치워 놨네요.” 충분히 열 받을 만한 일인데도 너무도 해맑게 웃으며 말했던 그 사람, 전국생명보험산업노조 PCA생명지부 손현주 지부장이다.

지난해 9월 1일 PCA생명은 CS(고객서비스)팀 44명의 노동자들을 모아 놓고 외주화 설명회를 열었다. CS팀을 없애는 대신 MPC라는 외주업체로 고용을 승계해 줄 테니 모두 퇴직을 신청하라는 것이었다. 회사가 말한 퇴직 시한은 그날로부터 고작 사흘 뒤인 9월 4일, 퇴직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11월 27일자 정리 해고 통지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해 3월 <이코노믹리뷰>와 나눈 인터뷰에서 “대부분 구조 조정을 통해 비용을 절감하면서 성장률을 높여 나가지만 PCA생명은 단 한 사람도 내보내지 않고 같이 성장해 나갈 겁니다” 하고, 정리 해고는 없을 것이라며 노동자들을 안심시켰던 김영진 사장은 그렇게 뒤통수를 친 것이다.

“제가 근무를 시작한 게 2003년 9월 4일이에요. 그런데 딱 6년 되는 날, 지난해 9월 4일에 인사과에서 저한테 사직서를 디밀더라고요. 나름 입사 기념일인데. PCA에서의 시작과 끝을 같은 날에 하게 될 줄은 몰랐죠. 9월 4일이라는 날짜를 아마 평생 못 잊을 것 같아요.”

1년 동안 지금의 임금을 보전해 주고 100퍼센트 고용 승계를 보장하겠다고 회사는 계속 이야기했지만 너무 갑작스런 이야기에 노동자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비정규직이 되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더니 비정규직이 절대 아니고 외주 회사의 정규직이 되는 거라고 했다. 하지만 외주 회사와의 계약 기간은 3년. 3년 뒤에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 따졌다. 그러자 회사는 이미 업무 제휴 관계가 만들어져 있는데 그때 가서 결별할 리야 있겠냐고, 만약에 계약을 연장하지 않더라도 다른 보험 회사와 계약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대답했다. 사실상 3년 뒤에 계약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는 말이고, 결국 외주 회사의 노동자 모두가 3년짜리 계약직인 셈이다.

우리가 보험 약관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있거나 따질 것이 있어서 보험 회사로 전화를 하면, 그 전화를 받는 사람들이 바로 CS팀의 노동자들이다. 이들이 일하는 곳을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유리 감옥’이라고 부르는데, 항상 그 자리에 지키며 고객들의 전화를 받고 상담을 해야 하기 때문에 자리 한번 마음대로 뜰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같은 팀에 있는 노동자들끼리도 얼굴을 대하고 만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다. 서로 이름도 잘 몰라서 누구한테든 그냥 ‘언니’ 하고만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에 손현주 지부장은 아무도 싸우자는 사람 없이 자기 혼자 남아서 싸울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싸움을 시작하고 보니 서른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남았고, 다른 부서의 사람들까지 200여 명이나 모여서 노조까지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상했다. 석 달 전에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싸움을 시작했는데, 지금 이 천막에는 손현주 지부장 한 사람밖에 없다. ‘이 사람이 정말 열흘 전에 해고당한 사람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 밝고 즐겁게 얘기하던 손현주 지부장의 얼굴빛이 잠깐 어두워진다. 회사가 퇴직 신청을 하지 않는 노동자들을 해고하겠다고 한 11월 27일을 지나면서, 결국 그날까지 함께 남아서 싸우던 22명의 노동자들은 모두 퇴직금을 받고 일을 그만두거나 외주 회사로 갔기 때문이다.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예상했던 것이 맞은 걸까? 끝까지 회사의 방침을 거부했던 손현주 지부장만이 혼자 해고자의 신분이 돼서 천막 앞에 ‘농성 52일째’ 하고 걸려 있는 달력을 또 한 장 넘기고 있는 것이었다.

“<작은책> 읽다 보니까 누가 재밌게 투쟁하자고 글을 써 놨더라고요. ‘이분 나하고 생각이 똑같아’ 그랬죠. 지금 제일 미안한 게 그거예요. 재밌게 하자는 얘기를 나한테만 계속 얘기하지 말고 다른 22명한테도 똑같이 그렇게 얘기를 계속 해 왔더라면 지금 이 자리에 좀 더 많은 사람이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에 참 서툴렀던 것 같아요. 얼마 전에 우연히 드라마 <선덕여왕>을 봤는데, 마침 ‘얼마나 사람을 얻는 게 어려우면, 사람을 얻으면 나라를 얻는다는 이야기를 하겠느냐’ 하는 대사가 나오더라고요.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게 정말 어렵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공감했죠.”

노동자의 ‘노’ 자도 몰랐고 거리에서 누가 집회를 하면 일단 짜증부터 냈던 사람들이, 노조가 생기면 회사가 망하는 줄 알았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노조를 만들고 집회를 하고 노동자가 됐다. 지부장이라고, 집행부라고 다를 것은 하나도 없었다. 누구 하나 준비된 사람 없이 그렇게 갑작스럽게 싸움으로 몰린 사람들이 끝까지 한 몸이 되어 싸우기는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서로 이름도 모르던 ‘유리 감옥’ 속의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이해는 됐지만 그래도 안타까운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비정규직 집회에서 발언을 하다가 ‘연대’라는 말이 너무 어색해서 ‘협조’를 부탁한다고 했다가 다른 노동자한테 지적을 받았다면서, 그렇게 아직 부족한 것이 많아서 사람들한테 오해도 사고 뼈아픈 실수도 많이 했다고 웃어 보이는 손현주 지부장의 모습이 더 안쓰러웠다.

지금도 그 미안함 때문에 천막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지난 석 달 동안 조합원들한테 아무것도 해 준 것이 없다는 미안함. 정리 해고를 막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 해고 1주일 앞두고 노조에 가입한 조합원들에 대한 고마움. 바로 그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 때문에 이 번쩍번쩍한 강남 거리에 외로운 섬처럼 덩그러니 놓여 있는 천막을, 아니 정확히 말하면 노조를 지키고 있는 것이었다. 이제 손현주 지부장의 앞에는 조합원들을 다시 모아서 단체 협약을 잘 맺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자신에 대한 해고를 철회시키고 일터로 돌아가야 하는 문제도 남아 있지만, 사실 그것은 마음먹기에 따라 하루아침에 이루어낼 수도 있다.

“회사에 인사 담당 이사가 12월 1일자로 새로 왔어요. 그분이 너무 재밌는 제안을 하는 거예요. 이 천막을 사겠다는 거예요. 혼자 있는데 무슨 천막까지 필요하냐고. 그래서 제가 여기다가 노조 간판 걸고 노조 사무실로 쓸 거라고 그랬어요. 그러고 개인적으로 하는 말이라면서 덧붙이는 말이, 노조를 만들고 투쟁을 시작한 9월 14일 이전으로 시간을 되돌렸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PCA생명의 ‘직원’ 손현주와 PCA노조의 ‘지부장’ 손현주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는 말이더라고요.”

노조를 포기하면 일자리를 주겠다는 회사. 그리고 구조 조정은 없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사장에게 노조 파괴에 성공했다는 타이틀만은 절대로 주고 싶지 않다는 노동자. 아시아에만 24개의 법인이 있다는 160년 역사의 다국적 기업과, 그 회사에 맞서는 단 한 사람의 노동자. 몇십 층 고층 빌딩 아래에 볼품없는 천막을 치고 혼자 앉아 있어도 당당하고 밝게 웃을 수 있는 그 사람이 참 부러웠다. 같이 갔던 총무부 선배는 다른 일정이 있어서 먼저 떠나고 혼자 사무실로 돌아오는데, 아침에 안절부절못했던 내 모습이 떠올라 창피해 견딜 수가 없었다. 돌아오는 내내 손현주 지부장의 밝은 웃음이 생각나서 그 웃음을 다시 보려면 이 싸움이 더 오래 가기를 바라야 하는 건지, 잠깐 헷갈렸다.

 

 

- <작은책> 2010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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