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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열어준 인연의 길을 따라

긴 글/생활글

by 최규화21 2021. 12. 30.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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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은 어떻게 되세요?”

“직업요? 어…… 공무원이에요.”

 

지난달 코로나19 자가격리 통보를 받았다. 나를 담당하는 공무원이 전화로 이것저것 조사하다가 내 직업을 물었다. 순간 멈칫했다. 공무원이라는 단어가 아직 입에 붙지 않아서였다.

 

두 달 전부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별정직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 줄여서 진실화해위원회. 뭐하는 곳인지 잘 모르는 분들이 많다. 한국 현대사 속 국가폭력과 인권침해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일을 한다. 시민단체라고 아는 분들도 있는데, 대통령이 위원장을 임명하는 독립적인 ‘국가’기구다.

 

2005년 1기 진실화해위원회가 만들어져 2010년까지 활동했다. 국민보도연맹 학살이나 간첩조작 사건 등 많은 사건들의 진실을 ‘국가의 이름으로’ 밝혀냈다. 그리고 10년 만인 2020년 2기 진실화해위원회가 다시 출범했다. 법으로 정해진 활동기간은 기본 3년에 최대 4년. 긴 이름만큼이나 긴 설명이 필요한 직장이다.

 

그나저나 내가 공무원이 되다니, 아직도 어리둥절하다. 마흔 살 먹도록 살면서, 인생의 절반쯤은 정부를 욕하는 일만 전문적으로(?) 해왔다. 지인들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면접시험보다 신원조회를 더 걱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말 세상이 바뀐 건지, 공직 검증 시스템에 구멍이 생긴 건지, 내가 공무원이 돼버렸다.

 

지난해까지 나는 기자로 일했다. 13년 가까운 시간 동안 몇 군데 회사를 거쳤지만, 내 직업은 늘 읽고 쓰는 일이었다. 12월 31일자로 마지막 사표를 낼 때, 내 머릿속에는 두 가지 목표가 있었다. 서울을 떠나 살기, 그리고 조직을 떠나 일하기. 작은 도시에 살면서 혼자 글을 쓰고 소박하게 먹고살고 싶었다.

 

내가 ‘이야기 자영업자’로서 써야 할 첫 번째 글은 우리 할머니의 인생 이야기였다. 4년 전 3박 4일 정도 휴가를 내고, 할머니가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녹음을 해뒀다. 하지만 막상 녹음을 해두고 나니 마음이 느슨해졌다. 언제든 녹음 파일을 듣고 글을 쓰면 된다고 생각해서 그런가. 미루고 미루다 보니 4년이 흘렀다.

 

할머니는 1929년에 태어났다. ‘위안부’에 끌려가지 않으려 선택한 결혼, 가난하고 혹독한 시집살이, 일본군 징병을 피해 숨어 지낸 산골살이, 가족을 덮친 좌우 갈등과 전쟁의 참화,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기적, 고통과 가난을 견디게 해준 작은 행복,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보내고 남은 외로움…….

 

할머니의 인생 이야기는 한 권의 책이 됐다. <사다 보면 끝이 있겠지요>라는 제목으로 오는 9월 사람들 앞에 내놓을 예정이다. 올해 93세인 할머니가 살아 계실 때 책을 안겨드릴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 책을 쓰는 과정이 더 뜻깊은 것은,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우리 가족의 역사를 알게 됐기 때문이다.

 

“같이 거 어든 창고 긑은 데 가가 갇해가 있었단다. 형 동생도 서로 아는 척도 안 하고, 할 수도 없고, 서로 눈마 끔쩍거리고……. 느그 작은할배가 한 사날 앞에 나갔다 카더라. 그래 가는데, 느그 할배는 그기 죽으러 가는 줄 알았다 카더라고. 동생이라 소리도 몬하고, 속눈물마 흘리고……. 그래가 죽여뿌고…….”

 

작은할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는 우리 가족 누구도 제대로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한국전쟁 때 납북됐다고도 하고, 대구 10월항쟁 때 돌아가셨다고도 하고, 언제 어디서 돌아가셨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내게 할머니가 겪은 모든 것을 말해주셨다. 자식들인 아버지나 고모들도 듣지 못한 이야기였다.

 

작은할아버지는 한국전쟁 전 좌익들에게 끌려가셨다. 전쟁이 일어나기 몇 달 전, 할아버지는 ‘빨갱이’들에게 밥을 해줬다는 이유로 경찰에 잡혀갔다. 창고에 갇혀서, 먼저 그곳에 잡혀온 동생(작은할아버지)을 만났지만 서로 알은체를 할 수도 없었다. 어느 날 동생이 먼저 끌려나갔고, 그게 죽으러 가는 길인 줄 할아버지는 아셨단다. 할아버지도 형무소에 갇혀서 3개월간 더 고문과 폭행을 당한 끝에 풀려날 수 있었다.

 

한국전쟁 전후로, 과거 좌익 활동을 했거나 좌익세력에 부역한 혐의를 받는 이들을 법적 절차 없이 구금하고 살해하는 일들이 전국적으로 있었다. 1기 진실화해위원회가 그 신원을 확인한 사람들만 2만 명. 군․경이 쥐도 새도 모르게 끌고 가서 몰래 죽이고 어딘가 묻어버린 민간인의 수는 최대 백만 명까지 추정된다.

 

내 할아버지는 그 때문에 구금과 고문을 겪어야 했고, 작은할아버지는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도 모르게 목숨을 잃어야 했다. 수십 년이 지나도록 ‘빨갱이’라는 세 글자의 낙인은 무서웠다. 할아버지는 30년 전 돌아가실 때까지 그 일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고, 할머니는 70년 만에 내게 처음으로 말씀하셨다.

 

총탄이 오가는 전쟁은 오래전에 끝났지만, 할머니는 골방 안의 전쟁을 계속 해오신 거다. 방문을 열고 나오면 누군가 군복을 입은 자들이 총구를 들이밀고 ‘너는 어느 편이냐’ 물을 것만 같은 골방 안의 전쟁. 피해자이면서 억울하다 말 한마디 하지 못한 그 침묵의 전쟁을 끝내는 것이 바로 진실화해위원회의 일이다.

 

할머니 이야기를 책으로 쓰면서 1기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 자료를 많이 참고했다. 그리고 지난 2월 책 원고를 탈고할 때쯤 2기 진실화해위원회가 사람을 뽑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루도 고민하지 않았다. ‘서울을 떠나 살기’, ‘조직을 떠나 일하기’라는 목표를 몇 년 미루더라도 내가 꼭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할머니 같은 사람들이 70년을 기다리고 기다려서 얻은 소중한 기회 아닌가. 국가폭력의 어두운 역사를 끝끝내 숨기고 싶은 이들이 여전히 고개를 쳐들고 있는 정치 상황에서, 어려운 타협 끝에 3년이라는 시간을 얻어냈다. 한 분이라도 더 살아 있을 때,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드려야 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다.

 

공무원이라는 직업은 평생 생각해본 적도 없지만, 할머니가 열어준 인연의 길을 따라 여기까지 왔다. 여기서 내가 하는 일은 슬픔의 목격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 할머니가 내게 70년 만에 진실을 말씀해주셨듯이, 수많은 분들이 오랫동안 간직해온 그날의 진실을 가슴에 품고 진실화해위원회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비록 너무 아프고 슬픈 이야기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겸손하게 듣고 또 세상에 알리는 것이 지금 내 일이다. 아마 앞으로 3년 또는 4년 진실화해위원회가 활동하는 내내, 공무원이라는 이름에 적응하지 못할 수도 있다. 공무원이라는 신분보다는 기록하는 사람, 겸손한 목격자라는 이름을 내내 되새기며 일하고 싶다.

- 월간 작은책 2021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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