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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의서가] 일상을 노래하는 가수 이한철이 '녹색'에 꽂힌 까닭

긴 글/인터뷰와 현장기사

by 최규화21 2015. 12. 17.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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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파크도서 북DB

[명사의 서가] 일상을 노래하는 가수 이한철이 ‘녹색’에 꽂힌 까닭







“나 명사 아닌데….”

지난 늦여름 어느 날, 명사의 서가 인터뷰를 부탁하기 위해 그에게 전화했을 때 그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였다. 그가 새 앨범과 공연 준비로 바쁘다고 하면서 가을에 다시 이야기하자고 했을 때, 나는 사실 그게 ‘완곡한 거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반쯤은 단념한 채 한 달 남짓 시간이 흘렀나. 그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다. 연락이 늦어 미안하다며 인터뷰 약속을 잡자고.

가수 이한철. 1994년 MBC 대학가요제 대상을 수상한 뒤 이듬해 1집 앨범 ’DEBUT 1995’를 발표하며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올해가 데뷔 20주년. 그동안 솔로로, 또는 ‘불독맨션’ 등의 그룹으로 수십 장의 앨범을 발표한 중견(!)가수이자, ‘튜브앰프뮤직’이라는 레이블의 대표이기도 하다. 하지만 인터뷰를 위해 만난 자리에서도 그는 “나 명사 아닌데…”라고 말하며 쑥스러워했다. 주위에 있는 보통의 40대 ‘아저씨’들에게서는 자주 보지 못한 겸손함이 느껴졌다.

인터뷰는 10월에 발매된 정규앨범 ‘늦어도 가을에는’ 이야기로 시작했다. 올 3월 발매된 ‘봄날’에 이은 ‘사계절 프로젝트’ 가을편 앨범이다. 사계절 프로젝트는 그의 데뷔 20주년을 자축하는 프로젝트. 보통은 20주년 기념공연을 하거나 기념앨범을 낼 텐데, 그는 “그럴 만한 업적도 없는 것 같다”라고 또 겸손하게 대답하며 “왠지 자신을 박제하는 느낌도 들었다”라고 말했다. 대신 그는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있게 앞으로 걸어나가는 것’을 선택했다. 올해 봄편(‘봄날’)과 가을편(’늦어도 가을에는’)을 발매했고, 내년에 여름편과 겨울편 앨범을 내며 2년간의 프로젝트를 완성할 계획이다.

그는 이번 앨범을 만들면서 ‘티저 콘서트’ 형태로 팬들의 의견을 들어 앨범에 반영하는 독특한 소통을 시도하기도 했다. 노래를 미리 들려주고, 이 부분 가사에는 “셔츠가 좋을지 스웨터가 좋을지 카디건이 좋을지” 팬들의 의견을 들은 것이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지지(?)한 가사나 악기를 실제로 노래에 반영하는 ‘민주적인’ 시도를 통해 서로가 서로에게 더 깊게 관여하는 재미를 추구했다.

“‘늦어도 가을에는’이라는 앨범 제목은 <늦어도 11월에는>이라는 소설책에서 따온 거예요. 한스 에리히 노삭이라는 유명한 독일 작가가 쓴 책이에요. 몇 년 전에 읽은 책인데, 노래랑 책 내용은 상관없지만 이 책 제목이 딱 떠올랐어요. 뭔가 그 계절에 해당하는 단어를 품고 있으면서 좀 독특한 표현을 찾고 있었는데, 이 책 제목이 딱 떠올라서 ‘11월’ 대신 ‘가을’을 넣어서 앨범 제목을 붙이게 됐죠.”

이한철을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가 만든 노랫말이 좋아서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에게는 일상적이고 평이한 낱말들을 사용해 생활 속의 감성을 전달하는 재주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노래를 만들거나 노랫말을 쓸 때 영화나 문학 등 다른 문화 콘텐츠의 도움을 많이 받는다고 했다. 특히 그의 1집 앨범은 수록곡 대부분에 영화 제목과 같은 제목을 붙였을 정도다.

그는 최근까지도 평소에 책을 보면서 밑줄을 그어놓고, 데이터베이스처럼 컴퓨터 파일로 기록해뒀다고 한다. 노랫말을 쓰기 전에 ‘참고문헌’ 찾듯이 그것들을 뒤져 보는 것이다. 그리고 시를 노랫말 삼아 즉석에서 멜로디를 붙이는 작업을 ‘공부’처럼 하고 있다. 그는 문학 장르 가운데 아무래도 시를 제일 앞에 내세울 수밖에 없다며, 시인들이 세상에 없던 표현들을 먼저 만들어내면 그것이 다른 문학이나 예술로 번지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봄날’ 앨범에 실린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도 김소월의 시에 가락을 붙인 노래다.




블로그에 올린 여행기를 모은 책. 몇 년 전 팬들이 그의 생일을 맞아 깜짝선물로 만든 것이다.



“사계절 프로젝트 앨범 제목, <늦어도 11월에는> 소설에서 따온 것”



이한철은 스스로를 “책을 많이 읽는 건 아니지만 책 사는 걸 엄청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나중에 읽고 싶을 때 바로 꺼내서 읽으려고 한 권 두 권 사두기 시작한 것이, 지금은 집 한쪽 벽을 가득 채울 정도로 많아졌다. 당장 책을 읽을 시간이 생긴다면 얼마 전 김연수 작가를 만나서 선물받은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을 제일 먼저 읽고 싶다고 했다.

그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는 누구일까? 꼭 한번 만나고 싶은 작가가 있는지 물었다. 그런 작가가 있었는데 얼마 전에 직접 만났다며 들뜬 얼굴로 대답했다. 그 작가는 바로 한강. 지난 9월 서울 서촌에서 열린 ‘이상 생일 골목 잔치’에 함께 참여한 한강 작가를 만나서 ‘팬심’을 표현했단다. 핸드폰을 꺼내, 한강 작가와 같이 찍은 사진을 보여줬는데, 확실히 그의 표정은 반가움과 긴장으로 묘하게 굳어 있었다. 웃음이 나왔다.

"한강 작가님을 정말 좋아하는데, 얼마 전에 만났어요. 제가 얼굴이 완전 빨개졌어요. 가서 인사하고 책에 사인 받았어요. 사진도 찍었어요. 제가 하는 음악이나 제 성향하고는 다른데, 글 자체를 정말 잘 쓰시는 것 같아요. ‘나는 헤비메탈 안 좋아하지만 메탈리카는 좋아’ 그런 거 있잖아요. 사람의 기본적인 성향까지도 넘어서서 좋아하게 되더라고요. 작품들 다 좋지만 <소년이 온다>가 참 좋았고 <노랑무늬영원>도 좋았고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책을 직접 쓰고 싶다는 욕심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특히 음악 하는 사람들 중에 책을 쓴 사람들도 꽤 있지 않나. 아니나 다를까 얼마 전에도 한 출판사에서 여행 에세이 책을 내자는 제안을 했단다. 하지만 노랫말을 쓰는 거나 여행잡지에 한 페이지짜리 글을 쓰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거라서, 쉽게 용기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몇 년 전 생일 날, 블로그에 올려둔 여행기를 팬들이 책으로 만들어서 깜짝선물을 해준 적도 있었다. 그 책이 ‘인생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감동적이었다고 한다.

앨범 준비에, 공연에, 방송 출연에, 최근에는 ‘제주도 살아보기’라는 리얼리티 예능프로그램에도 출연하고 있어서 정말 바쁠 것 같았다. 그렇게 바쁜데 책은 언제 읽을까? 책은 주로 앨범을 한 장 내놓고 나서, 당분간 새 노래를 창작하지 않아도 될 때 읽는다고 했다. 또 하나의 앨범을 내놓고 다음 앨범을 내기 전에 쉬는 시기가 있을 때도 책을 읽는다. 그런데 올해는 겨울에 앨범을 준비해서 봄에 내고, 여름에 또 앨범을 준비해서 가을에 내느라 책을 정말 못 읽었다고 아쉬워했다.

마침 인터뷰 하기 전 주말에 <녹색평론>을 몇 장 읽은 게 정말 오랜만에 책을 읽은 거란다. 그런데 소설책이나 시집이 아니라 책도 두껍고 글도 빽빽한 ‘생태주의’ 잡지를 읽었다는 대답이 약간 의외였다. 더군다나 <녹색평론>은 그냥 ‘환경을 보호하자’라는 수준이 아니라 ‘사람과 자연 사이의 분열을 치유하고, 공생적 사회의 재건’을 추구하는 좀 빡센(?) 내용의 잡지 아닌가.

“모르겠어요. 빡센 게 어떤 거예요?(웃음) 정기구독 하면서 저도 보고 아내도 보는 책이에요. 그런(환경과 생태에 관한) 소식이나 정보들을 접할 데가 잘 없잖아요. 매체가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다양하면 좋은 거죠. 판단은 내가 하면 되는 거잖아요. 읽으면서 어떤 때는 ‘이건 너무 현실성 없는 거 아냐?’ 생각할 수도 있고, 어떤 때는 ‘우와 진짜 이거 정말 고마워 죽겠네’ 생각할 수도 있는 거고…. 내가 사회적으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그렇게 다양한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환경에 대한 관심으로 <녹색평론> 정기구독... “여행 갈 때 꼭 챙기는 책”



여행을 좋아하는 것으로 유명한 그가 여행가방에 챙겨가는 책도 <녹색평론>이었다. 재생지로 만들어진 책이라 가벼운 것이 장점이라며, ‘소설책+<녹색평론>’ 또는 ‘시집+<녹색평론>’을 챙긴다고 말했다. 긴 흐름 읽어야 하는 책이 아니라서 잠깐 잠깐 어디 머물 때 짧게 짧게 읽을 수 있는 것도 장점이라고 덧붙였다. 

환경문제에 대한 그의 관심은 오래된 것이었다. 그는 올 여름, 새 앨범 준비로 바쁜 와중에도 한국의 환경재단과 일본의 ‘피스보트’가 함께 주최하는 ‘피스&그린보트’ 행사에 참여했다. 피스&그린보트는 한국과 일본의 시민 천여 명이 한 배를 타고 여행하며, 아시아의 역사·사회·문화·환경문제를 열린 시각으로 바라보고 대안을 찾기 위해 만들어진 행사다. 올해로 8회째를 맞은 이 행사는 열흘간 부산과 블라디보스토크, 홋카이도, 나가사키, 후쿠오카 등지를 돌며 진행됐다. 이한철은 벌써 5년째 빠지지 않고 참여했다. 스스로 “붙박이 전속가수 같은 느낌”이라고 말하며 웃었지만, “정말 짜릿하고 특별한 경험”이라고 애정을 드러냈다.

확실히 그는 사회적 발언이나 실천에 적극적인 가수다. 보통의 가수들이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사양하는 무대에서도 그는 노래한다. 나도 몇 년 전 MBC 노동조합이 파업을 할 때, 그 자리에서 노래 부르는 이한철을 직접 본 적이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행사에서도, 인권센터 설립을 위한 헌정공연에서도, 세월호 참사 문화행동 무대에서도 그는 노래했다. 그리고 인터뷰 사흘 전에도 그는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문화제에서 공연을 했다.

“자기 음악세계는 오롯이 자기만의 세계인 거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는 동료들을 많이 봤고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해왔는데, 그렇게 내 마음대로 만든 노래 속 스토리나 인물이 결국 내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아서 나라는 사람을 통해 투영된 거더라고요. 전혀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는 것을 어느 순간 생각하게 됐어요. 그러니까 당연히 사회적인 문제에 목소리를 내는 게 맞는 거죠.”

데뷔 20년. 가수로서 이한철의 인생을 한 편의 소설이라고 생각한다면, 지금은 기승전결 중 어디쯤 와 있는 걸까? 그는 “전개의 끝 무렵”이라고 대답했다. 아직 이런저런 실험과 시도를 통해 자기만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거쳐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최근에야 자기 목소리를 찾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겨우(?) 전개의 끝까지 오는 데 20년이나 걸렸다는 말인가 되물었더니 “그만큼 앞으로 오래 해먹겠다는 얘기죠”라고 말하며 웃었다. “잘하는 것보다 오래 하는 게 더 행복한 것 같다”는 그는, 지속가능한 음악을 하기 위해서 ‘몸을 가볍게’ 하며 앨범을 많이 발표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인터뷰를 하면서 그의 재주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대단한 일을 별로 대단하지 않게 말하는 것. 별것 아닌 것도 대단한 일처럼 허세를 부리고 공치사를 하는 게 보통의 40대 아저씨들 아닌가. 꽤 대단한 ‘별일’들을 별일 아닌 듯 허허 말하는 이한철. 경상도 사투리 덕분에 더 그랬는지는 몰라도, 꼭 동네 편의점 앞 파라솔에서 이웃집 큰형님(?)과 캔맥주 하나 놓고 수다를 떠는 느낌이었다. 가수 이한철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일상의 행복’이 그의 인생 속에서도 오래 지켜지기를, 그의 바람처럼 “오래 해먹게” 되기를 바란다.





사진 : 이한철 제공


프로필

1972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1994년 MBC 대학가요제 대상을 수상하고 1995년 1집 앨범 ‘DEBUT 1995’를 발표하며 데뷔했다. 싱어송라이터로, 올해로 데뷔 20주년을 맞이한 중견가수다. ‘지퍼’, ‘불독맨션’, ‘하이스쿨 센세이션’, ‘주식회사’ 등의 그룹에서도 활동했다. 동아방송예술대학 겸임교수, 튜브앰프뮤직 대표를 맡고 있다. KBS ‘올댓뮤직’을 진행했고, 현재 TV조선 ‘제주도 살아보기’에 출연 중이다. 2007년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팝싱글상과 올해의노래상을 수상했다.

명사의 추천도서 독자가 읽으면 좋은 책을 명사가 직접 추천합니다.

녹색평론 제145호 (격월간) 11,12월호 | 녹색평론사편집부 | 녹색평론사(잡지)

정기구독 하면서 저도 보고 아내도 보는 책이에요. 그런(환경과 생태에 관한) 소식이나 정보들을 접할 데가 잘 없잖아요. 매체가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다양하면 좋은 거죠. 판단은 내가 하면 되는 거잖아요. 그렇게 다양한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소년이 온다 | 한강 | 창비(창작과비평사)

한강 작가님을 정말 좋아하는데, 얼마 전에 만났어요. 제가 얼굴이 완전 빨개졌어요. 가서 인사하고 책에 사인 받았어요. 제 음악이나 성향하고는 다른데, ‘나는 헤비메탈 안 좋아하지만 메탈리카는 좋아’ 그런 거 있잖아요. 사람의 기본적인 성향까지도 넘어서서 좋아하게 되더라고요.

늦어도 11월에는 | 한스에리히노삭, 김창활 | 문학동네

‘늦어도 가을에는’이라는 앨범 제목은 <늦어도 11월에는>이라는 소설책에서 따온 거예요. 한스 에리히 노삭이라는 독일 작가가 쓴 책이에요. 그 계절에 해당하는 단어를 품고 있으면서 좀 독특한 표현을 찾고 있었는데, 이 책이 딱 떠올라서 ‘11월’ 대신 ‘가을’을 넣어서 제목을 붙이게 됐죠.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 김연수 | 문학동네

저는 책을 많이 읽는 건 아니지만 책 사는 걸 엄청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당장 책 읽을 시간이 생긴다면 김연수 작가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을 제일 먼저 읽고 싶어요. 얼마 전에 작가님을 직접 만나서 선물로 받았는데 아직 못 읽고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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