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책>과 동갑내기, 우리는 1995년생 동지들입니다 [작은책이 만난 사람]
<작은책>과 동갑내기, 우리는 1995년생 동지들입니다_ 김다원 양동민 양현준
글_ 최규화 사진_ 정인열
초등학교 교실 의자에 앉아 본 게 얼마 만일까. 초록색 책상, 작은 의자에 앉아 눈으로 한 바퀴 둘러본다. 배우고 가르치는 사람들의 정성스러운 손길이 교실 곳곳에 남아 있다.
그중 유독 눈에 들어오는 노란색들. 컴퓨터 모니터에, 칠판 옆에 붙은 손수건과 엽서에, 가방에 달린 배지에, 세월호 참사를 상징하는 노란 리본이 있다.
“2014년 4월 16일에 뭐 하고 있었는지, 우리 국민이라면 다 기억하시잖아요.”
어떻게 잊을 수 있겠나. 14학번 대학교 신입생 김다원에게도 그랬다. 세월호에 타고 있던 단원고 학생들이 끝내 닿지 못한 수학여행지, 제주도는 그의 고향이다. 희생 학생들은 그와 또래이기도 했다. 슬픔은 훨씬 더 가까이 느껴졌다.
시간이 흘러 교사가 된 그는, 교실과 그의 물건 곳곳에 그 기억을 남겨 뒀다.
“기억이 가장 큰 힘이라고 하니까, (세월호 상징물을) 계속 붙여 두는 거죠. 저도 잊지 않으려 계속 생각하고, 또 누구라도 그걸 보고 제게 물어보면 얘기해 줄 수 있으니까요.”
김다원 교사가 일하는 교실. '노란 리본'이 눈에 띈다. 사진_ 정인열
김다원은 경기 화성시 상봉초등학교에서 일하는 특수교사다. 그리고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화성오산지회장이다. 올해는 <작은책>이 서른 살 되는 해. <작은책>이 창간한 1995년에 태어난 ‘동갑내기’들을 만나 보고 싶었다. 첫 인터뷰의 주인공이 바로 김다원 교사다.
특수교사가 된 지 7년째. 대학에서 특수교육을 배우면서도, 처음부터 교사가 되겠다 생각한 건 아니었다. 학교보다 사회복지 현장으로 가겠다는 생각이 더 컸다. 그런데 대학생 시절 봉사활동으로 만난 장애아동들과의 인연이 그를 교사의 길로 이끌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봉사활동을 갔는데, 갈 때마다 애들이 좀 정말 조금씩 좋아지는 게 눈에 보여요. 그때 ‘우리 반 아이가 아닌데도 이렇게 뿌듯한데, 우리 반 아이가 이렇게 성장하는 걸 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2019년 교사가 됐다. 그리고 1년쯤 뒤에 전교조 조합원이 됐다. 전교조가 주최한 한 강연에서, 그는 “인생을 바꿔 놨다”고 할 만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의 인생 목표는 ‘자신의 행복’이었다. 강연은 그에게 무거운 질문 하나를 남겼다.
‘내가 생각하는 행복이 진정한 행복일까? 혹시 혼자만의 만족은 아닐까?’
만족과 행복 사이, 혼자와 같이 사이에서 고민이 깊어졌다.
“집에 와서도 곰곰이 생각했어요. 내가 생각한 행복은 너무 작은 나만의 만족이었다, 다 같이 행복해야 나도 행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부터 마음가짐이 변했어요.”
내 행복이 어떻게 세상을 구하는지 묻고 실천하기
언제가 그가 “나의 가치와 미래”라는 제목 아래 써 둔 메모다. 그는 지금도 행복이란 말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 땅에 태어난 누구든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
김다원 교사는 전교조 경기지부 청년사업단의 청년 교사들과 함께하며 고민을 키워 나갔다. 사진 제공_ 김다원
지난해 말에는 지회장 선거에 출마했다. 만으로 스물아홉 살이었다. 지회 조합원은 무려 600여 명. “세상에 소금이 되고 싶은 20대 지회장”이란 모토를 내걸었다.
“제 MBTI가 ISTJ인데 ‘세상의 소금형’이거든요. 그 말이 정말 좋았어요. ISTJ는 사실 한국인들에게 흔한 유형이지만, 소금이 없으면 아무도 살 수 없잖아요. 흔하게 보이지만 없어서는 안 될 사람. 그런 존재가 되고 싶어요.”
장애아동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그는 ‘누구나 열심히 일하면 잘 살 수 있는 사회’에 대한 갈망이 크다. 장애인도 직장을 갖고 노동을 하며 경제적인 자립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사회임금이 낮은 사회에선 아직은 머나먼 이야기다.
“근로소득으로 먹고살 수 있어야 한다는 걸, 이기적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더라고요. 남들은 주식이나, 부동산, 코인 같은 걸로 불로소득을 얻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는데, 왜 만만하게 근로소득만 가지고 잘 먹고 잘 살겠다는 거냐, 이거죠.”
노동의 가치가 뒤집어진 사회. 그래서 김 교사는 윤석열 탄핵을 위해 광장에 모인 힘이 ‘사회 대개혁’의 에너지로 이어지기를 고대하고 있다.
그는 ‘내란정국’이 시작된 지난해 12월 3일부터 열심히 윤석열 탄핵 집회에 참석했다. 빠진 적은 손에 꼽을 정도다.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선고일이 공고된 뒤 진행한 철야 투쟁에도 빠지지 않았다. 밤새 광장에서 투쟁을 하고 새벽에 바로 학교로 출근했다. 화성에서 서울까지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고 왕복 서너 시간이 걸리는 길을 출퇴근하듯 다녔다.
지난해 12월 21일 밤, 이른바 ‘남태령 대첩’의 현장에도 있었다. 그날 저녁 도심 집회에 참가한 일행들은 모두 집으로 가고, 혼자 남태령으로 갔다.
'인간 키세스'가 돼서 눈을 맞으며 광장을 지킨 김다원 교사. 사진 제공_ 김다원
“그날 밤새 거기 있으면서 엄청 큰 감동을 느꼈어요. 5·18 당시 시민들의 공동체 정신이 남태령에서 재현됐다고 할까요?”
현장에는 시민들이 보내 준 음식과 커피, 핫팩 등이 밤새 이어졌다. 핫팩 하나가 필요하다고 누가 손을 들면, 어느새 사방에서 핫팩 서너 개가 전달됐다. 누구 하나 더 가지고 더 먹겠다는 사람도 없었다. 눈물과 함께 경험한 그날의 시간들은 잊지 못할 감동으로 남았다.
“안녕하세요. 저는 길을 여는 민주노총, 그리고 자랑스러운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전교조 조합원입니다. (…) ‘교사가 정치적 중립도 지키지 않고 감히?’라고 생각할까 두려웠지만 교사라는 정체성을 숨기고 발언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탄핵 광장에 나설 때. 그의 손에 '샤이니' 응원봉이 들려 있다. 사진 제공_ 김다원
그는 탄핵 집회 현장에서 교사임을, 전교조 조합원임을 자랑스럽게 밝히며 발언한다. 두렵고 걱정되는 마음이 없진 않지만, “나를 지켜 줄 조직”에 대한 믿음으로 용기를 낸다.
“저는 제가 1995년생이라는 게 되게 좋거든요. 왜냐하면 민주노총이 1995년에 창립했어요. ‘민주노총이랑 동갑입니다’라고 말씀드리는 걸 좋아해요. 민주노총은 노동자가 힘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조직이잖아요. 같은 해에 태어난 게 영광이죠.”
그는 인터뷰 자리에 여러 물건들을 챙겨 왔다. 그중 하나가 ‘전교조 조끼’였다. 집회 갈 때는 챙기지만 학교에선 입을 일이 없었다. 그런데도 인터뷰 자리에 갖고 나온 이유가 있다.
“제 자랑이어서요.”
김다원 씨의 자랑 '전교조 조끼'. 사진 _ 정인열
교실에는 책 읽는 책상이 따로 있다. 매일 30분 일찍 출근해서 책을 읽는다. 지금 읽는 책은 《전태일 평전》. 어린 시절 어느 잡지에서 읽은 ‘전태일 만화’가 그의 가슴을 뛰게 했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어두운 세상, 용기가 필요한 지금, 다시 한번 ‘전태일’을 읽는다.
김다원 씨가 《전태일 평전》을 펴 보인다. 사진_ 정인열
바다에서 폭풍우를 만날 수도/ 산에서 천둥번개에 맞을 수도 있음./ 얼음땅을 지나다/ 꽁꽁 언 얼음과자가 될 수도/ (…) // 모든 위험을 뚫고/ 세상 끝에 무사히 도착한다 해도/ 대가는 단 하나!// 그 누구보다/ 커다란 세상을 알고 있는 거미가 되는 것./ 들려줄 이야기가 지구만큼 많은 거미가 되는 것뿐.
그가 탄핵 집회에서 낭독한 동시 <거미줄 게시판>(김성은)의 일부다. 시를 원래 좋아하진 않지만, 독서 모임에서 함께 읽으며 그 재미를 알았다. 쉽고 간결한 글귀로 힘을 주는 시를 좋아한다. 그는 인터뷰 자리에서도 동시를 낭독했다. 김기은 시인의 <뜨거운 사람>.
배꼽도 귓속도/ 뜨거운 눈알 가린 눈꺼풀도 뜨거운/ 나는 뜨거운 사람이야// (…) 아무리 얼음을 씹어 먹어도/ 뜨거운 생각들이 머릿속을 뛰어다니는/ 나는 정말 뜨거운 사람인데
눈물도 많고 웃음은 더 많은 “뜨거운 사람”은 또 광장으로 간다. 그의 “자랑”인 조끼를 입고, 손에는 그만큼이나 소중한 ‘샤이니’ 응원봉을 들고.
“집회가 중요하기 때문에 가기도 하지만, 제가 사람들하고 같이 노래 부르고 행진하는 걸 너무 좋아해요. 즐겁게 가는 거죠. 그냥 ‘길거리 노래방’ 간다, 이런 생각으로.”(웃음)
김다원 교사가 뜨겁게 투쟁하던 그 광장에, 카메라를 들고 늘 함께해 온 사람이 있다. ‘동갑내기’ 인터뷰의 두 번째 주인공, 양동민 ‘스튜디오 알(R)’ 활동가다.
그를 만난 곳은 광화문 앞 윤석열 탄핵 ‘농성촌’이었다. 그곳에 양 활동가가 매일 오가며 연대하는 ‘투쟁사업장 연대 농성장’이 있다. 인터뷰를 하러 찾아간 날도 그는 농성장 근처에 현수막을 달고, 경찰과 실랑이(?)를 하느라 바빴다.
양 활동가가 매일 오가며 연대하는 광화문 앞 윤석열 탄핵 ‘농성촌’의 ‘투쟁사업장 연대 농성장’에서 그를 만났다. 사진_ 정인열
2014년 양 활동가가 대학에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세월호 진상규명 운동에 참여하면서 운동을 처음 시작하게 됐다. 2017년 박근혜가 탄핵되는 것까지 보고 군대를 갔다. 그때부터 미디어 활동에 대한 고민이 자라났다.
“2년 뒤에 제대하면 운동을 계속할 수 있을지 고민이 엄청 많았죠. 그때 외국의 미디어 활동 사례를 많이 찾아봤어요. 극우파는 유튜버도 많고 미디어 활용을 잘하잖아요. 미디어를 활용해서 운동을 더 발전시킬 방법이 있을 거란 생각을, 군대에 있는 동안 많이 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핸드폰 사진이나 찍어 봤지, 카메라는 전혀 다뤄 본 적도 없었다. 미디어 활동가가 되겠다고 생각한 뒤에 ABC부터 하나하나 배워 나갔다.
'동갑내기' 인터뷰 두 번째 주인공은 양동민 스튜디오 알(R) 활동가다. 사진 제공_ 양동민
스튜디오 알의 이름 앞에는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을 위한 투쟁의 미디어”라는 수식이 붙는다. 이름에 들어간 ‘알(R)’은 혁명, 레볼루션(revolution)의 머리글자다.
2020년 4월에 혼자 유튜브에 채널을 만들고 첫 영상을 올렸다. 초기에는 다양한 형식의 콘텐츠들을 시도하다가, 2020년 10월 LG트윈타워 청소노동자들의 농성을 계기로 전환점이 만들어졌다. 인터뷰와 현장 기록 등을 중심으로, ‘숏다큐’ 형식 콘텐츠의 원형을 만들어 간 것. 이제 딱 만 5년이 됐다. 그동안 선보인 콘텐츠는 약 500개.
지난해 12월 3일 비상계엄 이후 만들어진 광장은 양 활동가에게도 특별한 현장이었다. 한국 사회는 ‘응원봉 세대’의 등장에 놀라워했다. 현장에서 바라본 그의 느낌은 어땠을까.
“처음에 ‘응원봉’이라는 호칭과 함께 등장했을 때는, 저도 저와는 좀 다른 타자로 느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이른바 ‘광장식 자기소개’라는,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는 소개가 엄청 많이 확산됐어요. ‘응원봉을 들었다는 것 말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치로서 우리를 불러 달라’는 한 동지의 말에 공감이 많이 되더라고요.”
자신들의 공간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운동’과 ‘정치’를 해 오던 사람들이, 내란사태 이후 열린 ‘광장’을 계기로 자기를 드러내게 됐다. 이 사회에서 가장 많이 차별과 억압에 노출돼 있고, 가장 많이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 이 광장에서 자기 목소리를 냈다.
양 활동가가 이들의 존재를 반기는 이유는 또 있다.
“그동안 제가 같이 활동해 온 동지들은 저보다 열다섯에서 스무 살은 많아요. 가끔 솔직히 10년 뒤, 20년 뒤가 안 그려질 때가 있거든요. ‘그 세대가 확 빠지면 과연 운동이 지속될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이 있었어요. 요즘에는 ‘말벌동지’들하고 같이 우리 세대 운동을 이어 가면 되겠다는 생각을 해요. 이제 뭔가 그림이 그려지는 것 같아서 되게 반가웠어요.”
광장의 청년들은 ‘말벌동지’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연대의 현장으로 달려가는 그들 모습이, 언제든 말벌이 보이면 바로 뛰어가 꿀벌을 구해 주던 한 TV 출연자와 닮았다 해서다.
“한 말벌동지가 다른 동지들한테 ‘이제 우리 시민과 노동자 말고, 같은 노동자계급으로 만나자’ 이런 얘기를 했거든요. 그게 되게 공감됐어요. 광장의 시간이 끝나더라도 말벌동지들이 계속 운동을 해 나갈 수 있는 틀을 만드는 게 중요한 과제이지 않을까 싶어요.”
2023년 스튜디오 알은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영상으로 성실하게 기록하여 ‘불평등 해소와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우분투 미디어상’을 받았다.
“예전에 윤석열 퇴진 비상행동 집회 때 ‘고공농성자들의 목소리’ 이런 코너로 4분이 주어졌대요. 누가 급하게 영상을 만들어야 된다고 해서 제가 만들었는데, 그런 영상을 만들 수 있을 때, ‘지금으로선 내가 적임자다’ 이런 생각이 들 때 보람찬 것 같아요.”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거제·통영·고성(거통고)조선하청지회 투쟁 기록 영상도 그의 손으로 만들었다. 짧은 시간 안에 7년간의 긴 투쟁을 담아야 해서 힘들었지만, “내가 그 투쟁을 기록할 수 있었다”는 것, “언젠가 누구라도 볼 수 있는 자료를 남겼다”는 것이 뿌듯했다.
그는 투쟁 현장에서 마이크를 잡아야 할 때가 있으면 직접 발언도 하고, 노래 공연으로 연대해야 할 일이 있으면 기타도 치고 노래도 부른다. 스스로를 카메라를 들고 기록하는 사람이 아니라, 카메라를 들고 ‘투쟁하는’ 사람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마이크를 잡아야 할 때가 있으면 직접 발언도 한다. 그는 카메라를 들고 '투쟁하는' 사람이다. 사진 제공_ 양동민
양 활동가의 활동에는 어린 시절의 영향도 없지 않다. 그의 고향은 울산. 부모님은 ‘울산노동자배움터’에서 활동하셨다.
“어렸을 때 하교하면 거기 가서 슈퍼마리오 게임 하고.(웃음) 배움터에서 했던 선동교육이 기억나요. 막 구호도 외치고 이런 걸 가르쳐 주던 모습…. 그런 것도 넘겨다보고 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게 됐던 것 같고요. 고등학생 정도 됐을 때 가끔씩 배움터 토론회에도 갔는데, 내용은 기억이 안 나지만 저한테 많은 자극을 줬던 것 같아요.”
인터뷰는 윤석열 탄핵심판 선고를 나흘 앞두고 진행됐다. 내란정국이 정리되면, 양 활동가의 카메라는 또 어디를 향할지 궁금했다. 그의 대답은 역시 ‘노동자들의 고공농성장’이었다.
“이번에 만난 말벌동지들하고 우리 세대의 운동을 계속할 수 있는 토대를 잘 닦았으면 좋겠고요, 그것을 위한 준비 작업을 꾸준히 해 보고 싶습니다.”
내란정국이 끝나면 그의 카메라는 또 어디를 향할까. 대답은 역시 '고공농성장'이었다. 사진 제공_ 양동민
그는 이미 그가 해야 할 일을 조용히 해 가고 있다. 말벌동지들은 대체 누구인지, 이들과 투쟁 현장의 노동자들은 어떻게 만나고 있는지, 긴 다큐멘터리에 담을 생각이다. 가제는 ‘무지개 조선소’. 올해 안에 세상에 내놓겠다고 자신과 약속했다.
양 활동가는 2021년 한 인터뷰에서 “청년 뮤지션을 발굴해서 뮤직비디오를 시리즈로 제작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거기 추천하고 싶은 밴드가 있다. 이름은 ‘풀때기망고빙수리필(bandPMBR)’. ‘동갑내기’ 인터뷰의 세 번째 주인공이 속한 밴드다.
주인공 양현준의 직업은 변호사다. 그를 정식으로 소개하려면 조금 더 긴 수식이 필요하다.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공익법률센터 공익펠로우변호사.’ 공익펠로우변호사가 대체 뭘까. 양 변호사도 “어딜 가나 설명이 좀 필요한 이름”이라며 웃는다.
‘동갑내기’ 인터뷰의 세 번째 주인공 양현준 씨. 사진_ 정인열
공익펠로우십 프로그램은 로스쿨을 졸업하고 공익법무 분야로 진출해 공익전담 변호사로 활동할 수 있도록 교육하고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서울대 공익법률센터만의 특별한 제도.
양 변호사는 지난해 5월 공익펠로우변호사로 선발됐다. 그는 ‘직장갑질119’에서 활동한다. 기본적인 상담과 함께, 정기 회의에 참석해 이슈를 발굴하고 대응을 논의한다. 또 ‘아프면 쉴 권리 공동행동(준)’에서 유급병가와 상병급여(상병수당) 법제화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3일 이후 시작된 ‘내란정국’은 그를 더 바쁘게 만들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소속으로 노란 조끼를 입고 ‘인권침해 감시단’ 활동을 한다. 겨우내 수차례 이어진 변호사들의 시국선언에도 참여하며 목소리를 더했다.
탄핵 광장에서는 민변 '인권침해 감시단'으로 활동한다. 사진 제공_ 양현준
법조인 출신이라는 대통령이 앞장서서 법을 모욕했다. 같은 법조인의 심경은 어떨까.
“화나죠. 어떻게 이렇게 곡학아세 할 수가 있나. 법을 하나도 모ㄴ르는 사람도 딱 보면 알 수 있는 걸, 막 법이 어쩌고저쩌고 이상한 소리를 하니까. 노동자들은 억울하게 재판에 져도 법원 앞에서 기자회견하면서 울기나 했지, 법원을 때려 부숴 봤어요, 판사한테 맹비난을 해 봤어요? 선배 변호사들이 같은 법조인으로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저도 공감이 되고요, (윤석열과) 다른 법조인도 있다는 걸 많이 보여 드려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양 변호사는 노동자 투쟁에 연대하다가 경찰에 연행된 말벌동지를 접견한 적이 있었다. 내란정국에 겪은 여러 일들 가운데서도 특히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여러 가지 취약성이 있지만 열정적이고 강인하게 투쟁하는 말벌동지들의 모습이 인상적으로 각인됐다.
“남태령 정신을 시민사회가 뼛속 깊이 새겨야 된다고 생각해요. ‘남태령 대첩’에서부터 많이 발견된 다양한 의제 간의 연대가 파면 이후에도 계속됐으면 좋겠어요. 과거 박근혜 탄핵 이후에는 그러지 못했다는 반성적인 평가가 많잖아요. 이번엔 좀 다르다고 생각하거든요. 남태령 이후, 다양한 의제에 연대하는 사람들이 이제 광장의 주류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응원봉 세대’, ‘말벌동지’들이 끌어올린 에너지는 광장에만 머물러선 안 된다. 광장에서 일상으로, 정치에서 관계로 개혁은 이어져야 한다는 게 양 변호사의 생각이다.
“일상 속 나이주의든 성차별이든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에서 개혁이 따라오지 않으면 사회 대개혁도 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 변호사 집단이든, 기성세대 집단이든, 제가 가교 역할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어요. 저도 부족하지만 조금이라도 끌고 가고 싶은 거죠.”
진지한 얘기를 오래 했지만, 그는 자기 스스로 ‘재미추구자’라 부른다. 그는 밴드 ‘풀때기망고빙수리필’에서 기타와 작곡과 노래까지 맡고 있다. “망할 것 같은 상태로 14년차”를 버틴 밴드다. 밴드 이야기를 시작하자마자 돌아온 그의 첫마디.
“아… 1집을 내야 하는데 돈이 없어서….”
양현준 씨가 속한 밴드 풀때기망고빙수리필. 사진 제공_ 최규화
그가 대학에서 반(班)학생회장을 하던 2016년, 학내 민주화 투쟁으로 본관 점거 농성까지 이어진 적이 있었다. 양 변호사는 직접 투쟁가(?)를 만들어 부르며 힘을 보탰다.
“기타 치면서 이상한 노래나 만들고 있었죠. 진지한 투쟁가는 하나 정도밖에 없었고, 나머지는 약간 풍자….(웃음) 그냥 (농성장에) 가면 재미있었거든요.”
그는 밴드 풀때기망고빙수리필에서 기타와 작곡과 노래까지 맡고 있다. 사진 제공_ 양현준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지만 로스쿨에 진학하면서 변호사의 길을 택했다. 그때부터 이미 공익변호사로 활동하겠다는 전망을 세웠고, 로스쿨에서 공익조교를 하며 진로를 굳혔다. 지금은 누가 봐도 변호사스러운(?) 단정한 외모지만, 그때는 행색부터 좀 달랐다.
“서울대 로스쿨 졸업생은 거의 다 대형 로펌을 가거든요. 다들 최소한 면접 정도는 보는데 저는 지원을 안 했어요. 그때 머리카락을 탈색하고 보라색으로 바꿨어요. 다른 사람들은 갈색 머리로 있다가도 면접 봐야 되니까 까만색으로 물들이는데, 그게 너무 싫더라고요.”
로스쿨 졸업을 앞두고 염색머리 시절. 그는 '재미추구자'라 소개했다. 사진 제공_ 양현준
‘<작은책> 동갑내기’ 인터뷰에 양 변호사를 추천해 준 제보자(?)는, 그를 “무던한 사람”이라 소개했다. 양 변호사는 본관 점거 농성 당시에도 자기는 징계 대상에도 들어가지 않을 만큼 가늘고 “은은하게” 활동해 왔다며, 추천자의 말이 그런 뜻이라면 동의한다고 웃었다.
재미를 추구하는 삶의 태도와 ‘은은하고 무던한’ 성격은 뜻밖에도 하나로 연결된다.
“자주 듣는 말 중에 이런 게 있어요. ‘변호사면 돈 많이 벌 수도 있는데 공익활동을 하시고 대단하세요.’ 사실 저는 완전히 ‘재미추구자’라서 그냥 재미있는 거 하고 살아야 되는 사람이거든요. 그냥 재미있어서 하는 거죠. 오히려 어떤 투철한 사명감으로 했으면 한 번 불태우고 끝날 수도 있는데, 그냥 재밌게 하다 보면 오래 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공익변호사로 활동하는 데도 ‘은은하고 무던한’ 성격이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변호사와 활동가 사이에서 자신의 위치를 잘 잡는 것도 필요하다. 양 변호사는 활동가들과 분리되지 않으면서도 그들과 잘 어우러지는 활동을 하고 싶다.
“변호사라고 (활동가들에게) 대접받고 싶지도 않고, 그렇다고 ‘법률용역’이 되고 싶지도 않다는 생각이에요. 그냥 그 활동의 일원으로서 평등하게 활동하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재미라는 가벼운(?) 단어가 오히려 그의 활동을 지탱하는 힘이 됐다. ‘동갑내기’ 인터뷰의 첫 주인공이었던 김다원 교사가, 매일 저녁 ‘길거리 노래방’ 가는 마음으로 윤석열 탄핵 집회에 나간다고 말했던 것도 같은 뜻일 거다.
2025년 4월 4일. 비상계엄 이후 123일 만에 윤석열은 파면됐다. 촛불 시민들이, 광장의 청년들이 이겼다. <작은책>과 같은 해에 태어난 1995년생 서른 살 동갑내기들. 김다원의 낙관과, 양동민의 뚝심과, 양현준의 재미가 새로운 30년을 써 나갈 거다.
“재미있게 살고 싶어요. 끝까지 웃으면서 하는 게 투쟁이잖아요.”(양현준)
- 월간 <작은책> 2025년 5월호